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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인 ‘조상’ 광서와 ‘초기’ 감염인 알라의 이야기

키씽에이즈살롱 시즌 2, 두 번째 이야기

ⓒHIV/AIDS
ⓒhuffpost

HIV/AIDS 인권활동가 네트워크는 작년 한 해 에이즈에 대해 더 친숙하게 말하기, 더 많이 알기, 감염인과 함께 살기, 적극적으로 알리기라는 목표로, ‘키씽에이즈살롱’이라는 오픈 토크를 진행했다. HIV/AIDS 이슈를 좀 더 생생하고, 친숙하게 알리기 위한 시도였다. 올해 ‘키씽에이즈살롱 시즌 2’는 이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기획으로 HIV 감염인 당사자들이 직접 나와 이야기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HIV 감염인들의 삶을 공유하여 HIV 감염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이고, 감염인과 비감염인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고민하기 위함이다.

5월 26일에 진행된 키씽에이즈살롱 시즌 2 두 번째 시간에는 광서와 알라, 두 감염인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에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동성애와 에이즈를 잇는 혐오의 양상은 어떤 식으로 변화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광서와 알라는 각각 1994년과 2016년에 HIV 감염 확진 판정을 받았다. 20여 년이라는 시차는 두 사람이 HIV 감염인이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스스로 ‘감염인 조상’이라고 말하던 광서와 초기 감염인 알라는 HIV 검사를 받을 때부터 다른 상황에 놓여있었다. 광서는 1994년 교통사고로 입원하게 된 병원에서 동의 없이 HIV 검사를 받았다. 감염인 중 광서처럼 본인의 동의 없이 HIV 검사를 받은 경우는 적지 않다. <한국 HIV 낙인 지표 조사>에 참여한 104명의 감염인 중 61.5%인 64명이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검사가 되었고, 검사가 끝난 후에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한국 HIV 낙인 지표 조사 공동 기획단, 2017). “HIV 검사를 강제로 받았”다고 응답한 이들도 2명(1.9%) 있었다. 

반면 2016년 당시 몸 상태가 예전과 다르다는 걸 느낀 알라는 HIV 검사를 받으러 아이샵(iSHAP)에 갔다. 검사 결과를 알게 된 날 알라는 애인과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얘기했다. “나 양성이야…” 별로 놀라는 낌새도 없이 애인은 말했다. “아, 그래? 그거 큰 문제 아니야.” 돌이켜 생각해봐도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 달 뒤, 알라는 한국 청소년·청년 감염인 커뮤니티 알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지지를 얻었던 알라와 달리 광서는 “철저히 혼자”였다. 광서가 감염 사실을 알게 된 90년대 후반은 버스정류장에 해골과 함께 ’AIDS, 걸리면 죽는다’는 문구가 적힌 광고가 버젓이 걸려있던 시기였다. 그걸 보고 나니 ‘나는 언제 죽지?’ 이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감염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신문에 나와 있는 에이즈 상담 ARS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상담은커녕 차가운 기계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유일하게 광서가 기댈 수 있는 건 술뿐이었다. 98년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HIV/AIDS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이듬해에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지지자가 되고자 하는 바람으로 광서는 스스로 감염인 자조 모임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러브포원이다.

누군가에게 내가 감염인이라는 걸 밝히지 않은 채 살아가기도 쉽지 않았지만, 감염인으로 커밍아웃하고 나서 게이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평소 가던 바에서 술을 먹고 나면 직원들이 고무장갑을 끼고 광서가 있던 테이블을 치웠다. 심지어 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락스를 쓰기도 했다. 술집은 물론이거니와 커뮤니티 내 모임에서도 배제됐다. 심지어 연애를 시작하려 할 때도 광서보다 먼저 주변에서 상대방에게 조심하라며 자신의 감염 사실을 알렸다.

알라 또한 HIV 감염 이전과 이후의 인간관계가 달라졌다. 감염 사실을 알기 전에는 귀에 거슬리지 않았던 말들이 이제는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에숙이(‘에’이즈와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를 담은 ‘숙이’를 합쳐서 부르는 말) 같은 에이즈 혐오 발언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지인들을 점점 멀리하게 됐다. 직접 혐오 발언을 들은 적은 없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가 먼저 끊어버렸다.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이 느끼고 겪어왔던 상황이 많이 다르기도 있지만 또 비슷한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과연 과거에 비해 현재의 상황이 더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OECD 14개 가입국 중 AIDS 환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        (김승섭, 2017)
OECD 14개 가입국 중 AIDS 환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        (김승섭, 2017) ⓒHIV/AIDS

2010~2014년에 진행된 제6차 세계가치조사에 따르면, OECD 가입국 중 “AIDS 환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한국(88.1%)이다(김승섭, 2017). 한국인 10명 중 8~9명이 AIDS 환자를 이웃으로 원하지 않는다. HIV/AIDS에 대한 혐오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광서는 과거 HIV/AIDS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던 시기에는 잘 몰라서 막연한 공포를 느꼈다면, 요즘에는 관련 정보를 활용해 더욱더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에이즈 혐오가 재생산되고 있다고 했다. 알라 또한 정치적으로 질병을 이용하는 것을 보면서 감정적으로 소모감을 느낀다며 힘듦을 토로했다. 이렇게 재생산된 혐오는 대중들뿐 아니라 감염인들에게도 가닿는다.

최근 수행된 <HIV/AIDS에 대한 20~30대 HIV 감염인의 인식 조사>에 따르면, 198명 중 193명(97.5%)이 지난 1년간 “동성애를 하면 에이즈 걸려 죽는다”라거나 “HIV 감염인은 세금도둑”이라는 혐오표현을 매우 자주 또는 가끔 듣거나 본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박광서 외., 2018).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혐오를 접하는 감염인들은 “화가 나”기도 하고, “가능한 영향을 받지 않으려” 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자책하기도 한다. 계속되는 혐오에 스스로 무디어지려고 하지만, 하루가 멀다고 무너져 내린다고 광서는 말한다. 

에이즈에 대한 혐오 때문에 감염인들은 종종 삶의 끈을 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같은 조사에서 혐오표현을 접한 응답자 중 약 20%는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힘이 든다”고 했다(박광서 외., 2018). 실제로 국내 감염인의 자살 관련 행동은 위험한 수준이다. 조사에 참여한 남성 HIV 감염인 중 지난 1년간 자살을 생각한 이들은 59.4%로, 남성 전체 인구집단(2.5%)보다 23.8배 높다(박광서 외., 2018). 2005년 질병관리본부의 내부 자료를 재분석해 국내 사망원인 통계와 비교한 결과, HIV 감염인이 자살로 사망할 비율은 전체 국민의 자살 사망률보다 10배가량 높다(이훈재 외., 2005). ‘10배’라는 수치만으로도 놀랍지만, 비교 대상인 한국 전체 인구집단의 자살률이 OECD 가입국 중 1위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HIV 감염인의 자살률이 그보다 10배 높은 점에 주목해야 한다. 

키씽에이즈쌀롱 두 번째 시간
키씽에이즈쌀롱 두 번째 시간 ⓒHIV/AIDS

한국 사회에서 HIV 감염인과 AIDS 환자는 단순히 하나의 질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 HIV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감염 이전과 이후의 삶 자체가 완전히 바뀌기도 하고, 에이즈에 대한 혐오 때문에 감염인들은 자신의 존엄을 지키지 못한 채 삶의 끈을 놓아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에이즈 혐오를 멈춘다면, HIV에 걸렸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로, HIV 감염인들은 본인의 위치에서 당당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여주기. 둘째로, ‘키씽에이즈살롱 시즌 2’와 같이 각자의 삶을 이어가는 감염인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를 계속해서 마련하기. 마지막으로, 감염인의 인권을 지지하는 이들과 연대해서 HIV/AIDS에 덧씌워진 낙인과 혐오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 가지기.

HIV/AIDS 인권활동가 네트워크는 혐오의 시대에 맞서 감염인의 인권을 향상하기 위해서 2018년 ‘키씽에이즈살롱 시즌 2’를 통해서 감염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지자들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자리를 지속해서 마련하고자 한다. 더 많은 감염인과 더 많은 지지자가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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