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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 20일 16시 00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4월 20일 16시 00분 KST

얼어붙은 균열들을 녹여내는 대화의 힘 : 김연철 『70년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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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5월의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 간의 대화에 대한 기대치가 최고조에 달해 있다. 반갑게도 『70년의 대화: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창비 2018)의 밑바탕에는 대화의 힘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남북관계를 대결과 경쟁의 역사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70년간 지속된 대화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프롤로그를 읽는 순간 큰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이 책에 서술되어 있는 모든 내용에 공감했고 동의했다. 저자는 남들이 바뀌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대응하기보다, 스스로 먼저 움직이는 능동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세계사를 포괄하는 폭넓은 시야, 긴 역사적 시선으로 남북관계를 볼 것을 주문한다.

이 책은 한국전쟁 정전협상이 진행되던 판문점에서부터 제네바 정치회담, 1960년대 푸에블로호 사건을 풀기 위해 이루어진 회담과 협상, 1970년대 7·4남북공동성명을 전후로 한 대화의 사례, 탈냉전 이후 북방정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이끌어냈던 남북 대화, 2000년과 2007년 두번의 남북정상회담을 치르는 과정에서의 대화를 꼼꼼히 짚어준다.

이 책을 통해 돌이켜보면 남과 북은 냉전경쟁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에도 다양한 대화를 이어갔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정전협상은 2년반 동안 본회의 159회를 포함해 765번의 회담을 통해 결론에 이르렀다. 그 이후 정전협정 4조 60항을 지키기 위해 제네바협상을 이어갔는데, 저자가 정확히 지적하고 있지만, 국제사회가 본격적으로 한국문제 해결에 대해 논한 것은 제네바회담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이후 한반도 통일 문제는 다자회담의 토론주제가 된 적이 없다.(52면) 제네바회담은 비록 실패로 끝난 회담이었지만, 지금 다시 시작된 대화가 궁극적으론 어떤 방향으로까지 발전해 나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lias Katsouras via Getty Images

1968년 미 정보선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되어 발생한 위기국면에서도 북한과 미국은 대화를 시도했다. 오늘의 관점에서 새로운 것은 1월 23일에 사건이 발생한 후 단 며칠간의 준비를 거쳐 2월 2일 미국과 북한이 판문점에서 협상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판문점에 군사정전위원회라는 제도적 대화 채널이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북한은 총 29차에 걸친 회담을 10개월간 이어간 끝에 협상을 종료했다. 비교적 빨리 대화가 시작되었고 대화를 지지한 정치적 리더십이 있었지만, 협상을 장기화하려는 북한의 이해관계가 존재했다. 그뒤 1970년대에는 인도주의적 문제로 접근하는 적십자가 남북대화의 통로가 되었다. 1972년에 25회의 적십자 예비회담이 열렸고, 1973년까지 7차례의 본회의가 열렸다. 중미 화해와 미소 화해, 유럽의 데땅뜨로 이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남북도 화해를 시도했다. 1972년 6월 21일 북한의 김일성 수상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4단계 군축안을 밝혔고, 이는 남북 정상 간의 7·4공동성명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이 중요한 요소였다. 한반도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남과 북은 대화를 이어갔다. 1985년 현재 약 1000만명에 이르렀던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정상회담은 무산되었지만, 경제회담이 열렸고,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았던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북방정책이 추진되어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한반도 비핵화선언이라는 역사적 성취를 이루었다. 1990년대 김영삼정부의 공백을 거쳐 김대중정부는 독일 신동방정책의 핵심인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erung)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통일과 평화에 대한 철학과 신념에 기반해 남북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했고,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6·15공동선언이 공표되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약 10년간 북한 핵개발과 이에 대한 강력한 제제로 이어진 악순환 속에서 남북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통일비용에 대한 공포감이 과도하게 조장되었고, 평자의 판단으로는 수동적이고 수단에 불과한 제제가 만능의 정책인 것처럼 지속되었다.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그 어떤 대화도 접촉도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책은, 이처럼 70년간 지속된 남북의 대화 사례들을 세세히 검토하여 다양한 대화의 채널과 주제, 사례와 방식에 대한 지혜들로 향후 대화의 나침반을 제공해주고 있다.

최근에는 이 책의 바람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처럼, 대화를 향한 의지와 노력들이 다시 복원되고 있다. 촛불시민혁명을 통한 정권교체와 지난 1년간의 부단한 노력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치러낸 평창동계올림픽, 그리고 남북 문화공연을 거치며 10여년 만에 새로운 대화가 시작되었다.

평자는 누구보다도 대화의 힘을 믿으며, 대화하지 않고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기만에 불과하다는 말을 보태고 싶다. 만나고 대화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 대화하고 교류하지 않으면 무엇도 변화하지 않는다. 냉전을 시작한 미국과 소련이 화해하고, 분단된 독일이 통일되고, 미국과 중국이 화해한 것도 모두 대화를 통해서였다. 사회주의의 발원지인 독일의 분단을 넘어서려던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시작된 문제를 우리가 풀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대화에 나섰다. 남과 북은 왜 여전히 화해하지 못했을까. 냉전을 시작한 국가들은 자신의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갔는데, 우리는 우리 문제를 우리가 풀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부족했던 것일까?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대화 없이 살 수 없다. 대화는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사피엔스가 다른 종들을 제치고 지구를 정복한 요인은 함께 소통하는 능력이었다고 말한다. 뇌가 더 크고, 지능이 발달하고, 손재주가 더 좋았던 것은 부차적인 요인이었다. 인간의 지구 지배는 호모사피엔스가 “여럿이서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기 때문이었다. 대화는 우리가 가진 최대의 능력이자,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적일 수 있는 최선의 행위이다.

*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