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08일 18시 40분 KST | 업데이트됨 2020년 10월 09일 12시 35분 KST

[한글 의사] 2020년 현대판 집현전 학자들은 이 사람들이다

글 읽는 속도를 높여주는 한글 의사 시리즈 12편

<허프포스트>가 사단법인 국어문화원연합회의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의 지원을 받아 ‘한글 의사’ 시리즈를 진행합니다. 한글 의사는 영어로 써진 어려운 용어 등을 쉬운 우리말로 바꿔주는 이로서 ‘글 읽는 속도를 높여주겠다’라는 포부를 가진 인물입니다. 어려운 용어 때문에 정보에 소외되는 국민 없이 모두가 함께 소통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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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한글은 세종대왕이 몸소 만들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정확히 한글을 창제하게 된 연유도 쓰여 있다. 언해본의 서문이자, 유명 구절이기도 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는 우리의 말이 중국과는 달라서 한문으로는 뜻이 통하지 않았기에 새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한글은 소통이라는 뼈대 위에 세워졌다. 덕분에 문자로 뭐든지 표현할 수 있는 멋진 자유를 얻었고,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적은 나라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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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2018.10.22 / 뉴스1)

한글의 우수성이야 말하기도 입 아프다. 한글을 잘못 사용한 사례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일례로 글로벌 숙박 공유 업체에 쓴 한국인의 숙박 후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후기 속 맞춤법이 매우 엉망인데, 솔직한 숙소 사정을 알리고 싶던 누군가가 번역기를 사용하는 숙소 주인을 속이기 위한 방편으로 탄생했다. 이는 한글이 과학적인 표기법이기에 가능했다.

 

‘한꾹인뜰만 알아뽈쑤 있께 짝썽하껬씁니따’

글로벌 숙박 공유 업체 '에어비앤비(Airbnb)' 속 후기
'한국인들만 알아볼 수 있게 작성하겠습니다'를 '한꾹인뜰만알아뽈쑤있게짝썽하껬씁니따'로 바꿔적었다. 잘못 적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자판으로도 따라 하기 어렵다.

발성 기관을 본 떠 만든 글자인 한글은 설사 맞춤법이 틀렸더라도 소리 나는 대로 쓰면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ㄴ, ㄷ, ㅌ’은 소리 나는 위치가 같고, 글자의 형태도 유사하다. ‘ㄴ’을 써야 하는 자리에 ‘ㄷ’을 써도 단어나 전체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쉽게는 된소리를 활용할 수도 있다. 종종 외래어 표기법에서 무시되거나 외국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된소리가 모국어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들만의 기호가 되는 것이다. 이는 한국어와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끼리는 ‘소통’의 최강자가 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갖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누구나 평등하게 정보를 공유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방법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하지만 최근 외래어로 소통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외래어는 나빠’, ‘무조건 한글만 써야 해’라고 외치는 건 요즘 같은 세상의 어불성설이다. 다만 외국에서 사용되는 어려운 경제 용어나 마케팅, 홍보 등을 위해 새로이 만들어진 단어들이 그대로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사람 간의 소통을 막는 것이 문제다.

뉴스1
온라인으로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하는 모습(왼쪽), 패스트푸드점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모습(오른쪽) 최근 코로나 19로 인해 '비대면'의 영역이 늘어나면서 '언택트'라는 용어가 급부상하고 있다.

언택트(untact) 같은 용어가 대표적이다. 접촉하다는 콘택트(contact)에 부정어인 언(un)을 합성해 만들어진 용어로 우리말로는 ‘비대면’이다. 언택트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소통’이라지만, 해당 용어를 모르는 이들과는 일단 소통 자체가 불가하다는 점은 드러나지 않는다. 미디어나 출판계 등은 분별없이 단어를 사용했고, 새로운 단어는 힘을 얻고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다.

이러한 외래어가 소통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말로 순화해 사용할 필요성이 재기 됐다. 연령과 계층 간의 대화를 단절시키는 외래어를 바로 잡자는 것이다. 이에 훈민정음의 보급에 앞장섰던 15세기 집현전 학자들처럼 순화어 보급에 앞장서는 이들이 생겨났다. 바로 ‘새말모임’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국립국어원과 함께 지난 2019년 10월부터 운영 중인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국어가 퍼지기 전에 쉬운 우리말 대체어를 만드는 게 주요 업무다. 구성원에는 국어 전문가를 비롯해 외국어, 교육, 홍보·출판, 언론계 인사뿐만 아니라 금융과 생명과학, 정보통신 등 외래용어 유입이 잦은 분야의 종사자들도 포함됐다. 이들은 한 달에 2~3회씩 누리소통망(SNS)으로 모임을 갖고 있으며, 현재까지 124개의 대체어를 만들어냈다.

국립국어원
국립국어원 공식홈페이지

소통에 앞장서는 모임원 중 두 명과 인터뷰를 나눠봤다. 동국대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정영효 박사와 10년째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조영미 선생이다.

- 새말 모임 참여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한다고 참여할 순 없겠죠?

= 정영효: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함께 근무하던 선생님이 지금 국립국어원에 계시는데, 참여 제안을 주셔서 함께하게 됐습니다.

= 조영미: 저는 지난해 국립국어원이 개최한 ‘우리말 다듬기 공모’에서 ‘에이에스엠알(ASMR)’을 ‘감각소리’로 바꿀 것을 제안했어요. 이 단어가 국민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해 으뜸상을 받았고, 새말 모임 위원 참여 자격도 얻었습니다.

 

 

- 누리소통망(SNS)으로만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방식이 궁금하네요.

=조영미: 매주 금요일 대화방에 제시어가 공개됩니다. 국립국어원 연구원께서 새말로 바꿀 외래어와 뜻풀이, 용례, 참고자료까지 보내주시면 읽어보고 일요일까지 대체어를 제안하는 방식이에요. 

=정영효: 새말의 방향성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빈번합니다. 가끔은 낯설고 어려운 새말이 제시되면 많은 논의가 대화 창안에서 오가기도 해요. 이때 누군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참여자 중 대표를 뽑지 않았어요. 새말 대화방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한과 역할을 부여받았기 때문이에요. 다양하고 공정한 논의를 위해서 모임을 처음 가질 때부터 지켜온 방식이죠.

연합뉴스TV 캡처
연합뉴스TV 유튜브 '[맛있는 우리말] 8회 : 공공언어 바로쓰기' 편에 소개된 '동물 수집꾼'

- 제안한 말 중에 채택된 것이 있다면? 말을 생각하게 된 과정과 연유가 궁금합니다.

=정영효: ‘동물 수집꾼’이 채택된 게 기억에 남아요. ‘동물 수집꾼’은 “동물을 모으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나, 기르는 일에는 무관심해 방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애니멀 호더(animal hoarder)’의 새말입니다. ‘수집’이라는 말이 ‘우표 수집’처럼 취미 활동의 한 형식을 가리킬 때 자주 쓰잖아요. 동물을 수집한다고 하면 분명 부정적 의미가 될 것 같더라고요. 동물은 마땅히 애정과 관심의 대상인데, 수집의 대상이 되면 사회적 문제로 이어지겠죠. 그래서 ‘애니멀 호더’의 부정적 의미를 곧바로 전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동물 수집꾼’이라는 새말을 제안했어요.

=조영미: 얼마 전에 ‘라키비움(larchiveum)’‘의 대체어로 제안한 ‘복합 문화 공간‘이 채택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도서관(Library)과 기록관(Archives), 박물관(Museum)의 성격을 통합적으로 갖춘 기관, 또는 공간을 의미한다는 뜻을 확인하고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어려웠어요. 우선 ‘문화’라는 단어가 떠올랐는데, 도서관, 기록관 박물관까지 다양한 문화를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다는 의미를 더하기 위해 ‘복합 문화’라고 정했죠. 다음은 장소를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문제였는데, ‘복합 문화관’이라고 하니 건물로 범위가 한정되는 것 같아 ‘공간’으로 바꿔봤습니다.

다만 ‘복합 문화 공간’은 이미 사용되고 있었어요. 작품 전시와 판매의 기회, 배움의 기회, 작업 공간을 제공하여 누구나 쉽고 다양하게 예술과 문화를 접하며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간을 의미해요. 그런데 이 ‘복합 문화 공간‘과 ‘라키비움‘의 차이를 구분 짓는 게 오히려 앞으로 발전해 나갈 ‘라키비움’의 기능을 제한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심 끝에 해당 단어를 제시했습니다.

 

 

- 말을 다듬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문이 무엇일까요?

= 정영효: 개인적으로는 ‘친근감’을 중시해요. 사람들이 새말을 보고 말의 뜻을 직관적으로 알고, 유추하기 쉬웠으면 좋겠어요.

= 조영미: 저도 누구나 직관적으로 의미를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쉬워야 하고, 되도록 간결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 단어 사이의 결합이 자연스러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감이 없어야 하고요.

 

 

- 새말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 같아요.

= 조영미: 저는 제시어가 나오면 일차적으로 외국어나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부터 시작하는데요. 이것만으로는 매끄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쉽게 바꾼 단어의 유의어도 살펴보는 편입니다. 자세히 풀어쓸수록 쉬운 말이 만들어지는데, 길어질수록 호응을 얻을 수 없는 부문은 고민입니다.

= 정영효: 맞아요. 외래어도 줄임말이나 합성어가 많아서 원래 가지고 있는 뜻을 온전히 새말에 담는게 마냥 쉽지만은 않더라고요. 그럴 때 유사한 사례를 조사하거나 사전을 찾아보면서 최대한 외래어의 뜻과 쓰임을 대신할 수 있는 새말을 떠올리려고 노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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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7일에 찍은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 새말 모임을 진행하시면서 가장 뿌듯했을 때는 언제였는지?

= 정영효: 새말 모임의 논의 과정을 통해 곧바로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체어가 탄생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팬데믹(pandemic)’의 대체어로 ‘(감염병) 세계적 유행’을, ‘에피데믹(Epidemic)’의 대체어로 ‘(감염병) 유행’이 채택된 사례가 있었어요. 이 용어가 의료 현장이나 뉴스 보도에 곧바로 사용되면서 보건 정책과 국민들의 안전에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새말 모임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되더라고요.

= 조영미: 같은 의견입니다. 우리 회의를 통해 바꾼 말이 언론에 실제로 적용된 것을 확인하니 정말 뿌듯했습니다. 새말 모임에서 다른 위원님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일이 보다 많은 사람이 국어를 쉽게 사용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새말 모임을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조영미: 모 광고에서 바다를 청소하고 나온 한 남자가 이 넓은 바다가 그런다고 회복되겠냐는 질문에 ‘최소한 우리가 지나온 길은 바뀌잖아요’라고 대답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외국어와 난해한 용어들의 대체어를 마련하는 일은 넓은 바다의 작은 부분을 청소하는 일과 같이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 ‘우리’의 범위가 서서히 넓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 범위를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넓히는 일이 국어 교사로서, 새말 모임의 위원으로서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부터 쉽고 올바른 우리말을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글에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정영효: 새말 모임은 뜻깊은 공간이에요. 많은 사람이 자신의 현장 경험과 시각을 토대로 새말 모임에 참여하면서 말이 가진 뜻과 느낌을 이야기하고, 적절한 말의 쓰임을 생각하거든요. 이런 다양한 의견 수렴이 새로운 말에 반영된다면 말이 좀 더 많은 이들을 포용하고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으로도 새말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