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프포스트>가 사단법인 국어문화원연합회의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의 지원을 받아 ‘하하호’ 시리즈를 진행합니다. ‘하하호’는 어떤 외래어든 쉬운 우리말로 바꿔주는 ‘소통 특급 번역기’입니다. 새로운 신조어나 외래어가 세대 간의 소통을 막고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소외되는 이 없이 모두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땅속에서 글자가 나왔다. 2021년 6월, 인사동 건물 밑에 묻혀있던 항아리 속에서 조선 전기에 제작된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발견되었다. 이 중에서 1,000점은 한자, 600점이 한글이었다. 게다가 만든 시기며 종류가 다른 것들이 무더기로 담겨 있었다. 왜, 어떠한 연유로 보통 사람들이라면 구경도 못 했을 금속 활자 1,600개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안에서 15세기에만 사용되었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금속 활자가 나왔다는 점만은 확인되었다.
‘동국정운’이란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일종의 외래어 표기를 최초로 정리한 책이다. 세종은 1447년 당시 한자음을 중국의 운학이란 것에 입각해 한자음 표기 체계를 수립했고 이것을 동국정운에 담았다. 다만 이 표기법이 현실적인 한자음과 차이가 나면서 세조 이후인 16세기부터는 자취를 감춘다.
그렇기에 동국정운식 표기법은 우리나라 사료 검토 시 매우 중요한 시대 지표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책에 동국정운식 표기법인 ‘ㅱ, ㆆ, ㆅ’ 등이 포함돼 있다면 이는 16세기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번에 출토된 금속 활자 형태상 세조 즉위년인 1455년에 주조한 ‘을해자(乙亥字)’로 추측했다. 조선 후기의 금속 활자는 남은 게 수십만 점 정도 되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을해자는 고작 30점 정도에 불과하니 엄청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자리 바뀔 수도
중요한 건 소통을 위한 우리의 노력
정확히 연구해봐야 알겠으나 1434년 제작된 ‘갑인자(甲寅字)‘를 비롯해 1465년 제작된 ‘을유자(乙酉字)’ 활자들도 포함돼있다고 전해졌다. 만약 갑인자가 확실하다면, 1440년 구텐베르크를 앞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의 자리가 갑인자로 바뀔 수 있다.
이를 두고 각계각층에서는 여러 가지 말이 나왔다. 구텐베르크보다 앞서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전 세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 상업 출판으로 말미암아 성서를 무한히 찍을 수 있게 되면서 종교개혁과 산업혁명, 민주주의로 이어지게 됐기 때문이다.
결국 지식과 정보의 힘이 어린 백성들이 제 뜻을 펼치는 기회를 만들면서 전 세계에서 인정하는 성과가 됐다. 왜 우리는 고도의 인쇄술이 있었으면서도 이를 활용하지 못했는가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번 발견에서 우리에겐 더는 동국정운식 표기법이 필요치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문을 병행하여 글을 읽을 필요도 없다. 오로지 자음 14자, 모음 10자까지 총 24글자만으로도 모든 음성을 표기할 수 있다. 600년이 지난 지금 한글을 모어로 쓰는 사람들끼리는 어떤 이야기도 쉽게 의미가 통한다.
양반 계급은 한문을 쓰고, 대다수 백성이 한글을 쓰던 시대에는 언어로 계층이 나뉘었다. 선조들은 한문을 쓸 수 있다면 지배자, 모르는 이들은 피지배자가 되는 신분제의 굴레 속에 살아야만 했다. 지금처럼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지 못했다는 거다. 세종대왕이 꿈꿨던 ‘모든 백성이 문자를 읽고 쓰는 나라’는 이미 이뤄졌다.
하지만 최근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으로 단절감, 고립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워케이션, 펀세이빙 워커밸, 푸드리퍼브, 디지털디톡스, 펀슈머까지 일상에서 사용되는 이러한 외래어나 신조어는 빠르고 쉬운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혹 외래어로 불편한 적이 없었다면, 그건 반대로 자신이 단절을 주도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세종실록엔 갑인자를 주조한 직후 세종이 ”‘자치통감’을 인쇄하고 반포해서 노인들이 보기 쉽게 하고자 한다”고 기록돼 있다. 종이 30만 장으로 500~600권을 만들 수 있으니 종이와 먹을 준비하는 계책은 승정원에서 마련하라”는 이야기도 한다.
요즘이라면 종이 30만 장도 필요 없이 휴대폰 하나면 충분하다. 그 어떤 때보다 쉽게 정보를 교환하고 생각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럴 때 쉬운 우리말을 사용함으로써 소통을 가로막는 것들을 줄이고 서로를 이해하는 문화가 넓어질 수 있다. 600년을 땅속에 있던 문자들이 현재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구텐베르크보다 10년은 빠르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평등하게 소통하고 자유로이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힘이 언어에 담겨있다는 뜻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