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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5월 02일 16시 45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5월 02일 18시 06분 KST

누가 인간을 정하는가 - 500년을 거스른 한국 기독교의 오만

huffpost

여기, 역사 속 한 장면이 있습니다.

때는 1550년, 스페인의 도시 바야돌리드. 지금은 스페인의 한 주도에 불과하지만 불과 500년 전 이곳에서는 역사의 큰 분기를 가른 논쟁이 있었습니다. 세풀베다와 라스카사스 신부. 이 두 사람이 수많은 논리와 문장으로 옳고 그름을 가르고자 했던 논쟁의 주제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유럽인과 같은 인간의 권리가 있는가?’

그리고 여기, 현재 진행형인 역사의 또 다른 장면이 있습니다.

2017년 6월. 서울의 시청 광장 외곽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시청 광장을 하룻동안 자신들의 공간으로 빌린 성소수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구호와 함성이 있었지만 그런 그들의 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소수자들에게는 우리 ‘일반인’과 같은 권리가 없다!’

이 두 사건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별개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두 사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기독교가 당사자들의 의지와는 별개로 누가 사람이냐 아니냐를 결정지으려했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 왜 1550년에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도 당연해서, 아무 의미 없는 논쟁이 그렇게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부터 이야기해야겠지요?

torwai via Getty Images

1400년대부터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알던 세상이 산산히 부서지고 더 넓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지구는 평평하며 그 끝으로 가면 떨어져 죽어버릴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고, 서쪽 바다 너머에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엄연히 그곳은 원주민들이 살던 땅이었으나 유럽인들은 그 땅에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원주민에게 ‘인디언’이라는 이름을 동의없이 자기 멋대로 붙였습니다. 그리고 탐욕 어린 학살과 수탈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실려온 전염병으로 인해 이에 내성이 없는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망했습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황금도시를 믿었던 유럽인들에게 뼛속까지 착취당했습니다. 할당된 양의 금을 가져오지 않으면 가족을 인질로 잡고 손목을 잘랐으며, 심지어 재미삼아 학살당했습니다. 유럽인들이 그들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죠. 기독교 신앙의 믿음 아래 자신들이 선택받았고, 믿지 않는 이들은 이교도이기에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는 오만. 그 오만이 유럽인들을 그렇게 까지나 잔인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원주민들의 현실을 구원함 또한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파견된 수도사들 중 일부는 원주민들의 처지가 부당하다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현지 영주들의 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이들은 인간이며, 우리가 충분히 주 예수의 길로 이끌 수 있다. 이들을 탄압하는 것은 인간의 법이지 신의 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 중 대표적인 한명이 바로 라스카사스 신부였고, 그러한 목소리가 여론을 형성하여 결국 바야돌리드에서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스페인의 석학 세풀베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며 ‘태초부터 야만인인 인종들이 있으며, 그런 인종들을 유럽인들이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유럽인들의 학살과 수탈은 인신공양을 했던 원주민들에 대한 정의 구현이다.’ 라고도 하였죠. 반면 라스카사스 신부는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기는 하나,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빼어난 수준의 자연법과 인권 의식을 근거로 원주민들의 인권을 옹호하였습니다.

결국 라스카사스 신부의 주장에 손을 들어준 교황청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간으로 ‘대접’해 줄 것을 결정했으나, 아이러니한 것은 원주민을 대체하기 위해 흑인 노예들을 운송해왔으며 이것은 새로운 비극을 낳게 되었지요.

하지만 결국 같지 않나요? 세풀베다와 라스카사스가 서로 생각이 달랐을지라도 결국 둘 다 그것은 같습니다. 자신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간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다고 오만하게 판단했습니다. 바야돌리드에서 그 누구도 원주민을 직접 데려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은 당신을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느냐고.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냐고. 당사자 없는 논쟁의 가치는 과연 그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고 2017년. 성소수자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 또한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소수자에게 묻지 않습니다. 말을 한다 한들 듣지 않습니다. 세풀베다와 라스카사스처럼 오직 기독교 신앙이 기준이 되어 당사자들의 말은 듣지도 않은채 자신들 멋대로 정죄와 용서를 운운합니다. 그 와중에 폭행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하는 박해는 단 하나도 염두에 두지 않지요.

‘원주민에 대한 잔학행위를 옹호했다’며 카톨릭 교황청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고쳐나가려 하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국 기독교는 자신들의 잣대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그 믿음을 타인에게 강요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피해가 오직 성소수자에게만 미치는 걸까요?

불상과 단군상을 훼손하고 ‘오직 예수’라며 락카칠을 하고, 길거리에서 타인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전도 행위를 합니다. 여행금지구역인 아프가니스탄에 갈 때는 예수의 법을 우선시하더니, 현지인의 반감을 사는 전도로 인해 피랍이 된 이후에는 한국의 법에 호소를 합니다. 지금까지 생물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탁월한 가설인 진화론이 성경 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과서에서 삭제해줄 것을 요구했으며, 온갖 문화 매체가 음란하며 타락하다는 이유로 검열을 조장합니다.

심지어 대형 교회의 목사가 강단에서 대놓고 특정 정당에 투표하지 않으면 지옥에 보내버릴 것이라고 협박을 합니다. 정치권에서 세금 부여와 인권조례 등 자신들의 입맛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신도들을 동원하여 압박을 가합니다. 과거 기독교의 권력이 하늘 높이 치솟았던 시절, 교황은 황제를 내복차림으로 엄동설한에 무릎 꿇린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 기독교는 그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할 때, 10명의 의인이 도시 안에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겠노라 말하였다지요? 그런데 과연 지금 한국 기독교 주류 사회 안에 10명의 의인이라도 있나요? 설사 10명의 의인이 있다 한들, 그들의 목소리를 한국 기독교는 듣고 있나요? 500년 전의 오만을 그대로 계승한 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 오만을 강요하며 한국 사회 곳곳에 흩뿌리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낡은 옛 가치관을 그대로 고집하며, 그로 인해 소수자, 약자와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치는 무리들. 우리는 최근 그런 것들을 적폐라고 말하지 않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