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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4월 13일 11시 03분 KST

'텔레그램 n번방' 공범 중 십대 많은 이유에 대한 십대들의 생각

청소년 5명이 디지털 성범죄와 성교육 부재에 대해 말했다

‘n번방 사건’을 비롯해 한국 사회의 공분을 산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의 주요 표적은 청소년을 포함한 20살 안팎의 여성들이었다. 피해자들의 삶을 파탄 내는 경악스러운 범죄를 저지른 주요 공범 중에도 아직 스무살이 넘지 않은 남성 청소년이 여럿 섞여 있어 충격을 더했다. 또다른 보안 메신저 디스코드에서 성착취방을 운영하거나 성착취물을 유포해 경찰에 붙잡힌 이들 10명 가운데 8명도 청소년이었다.

stockcam via Getty Images

기성세대 일부는 엔번방 사건을 두고 “요즘 10대들 무섭다”고 말한다. 10대 청소년들의 생각은 달랐다.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에 만연한 남성연대와 강간문화(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합리화하는 문화)가 교실에서도 일상화되면서 벌어진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한겨레>는 9~12일 청소년 페미니즘 단체 ‘위티’ 등의 도움을 받아 5명의 남녀 청소년을 심층 인터뷰해 엔번방 사건의 원인과 해법에 대해 들어봤다.

청소년들은 무엇보다 “기성세대가 문제의 원인을 제공해놓고, ‘비행청소년의 문제’라며 선을 긋고 있다”고 분노했다. 10대 남성의 성범죄는 왕성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실수’로 여기고, 10대 여성의 ‘일탈’은 ‘문란함’으로 비난하는 풍토는 기성세대의 유산이고, 이런 교육과 문화가 엔번방 사건을 낳았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여성 청소년 정지원(18)씨는 “10대 여성 청소년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면서, 여성 청소년이 성에 대해 말하면 음란함이나 문란함으로 규정짓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고 짚었다.

남성 청소년 김정현(가명·18)씨는 “교실에서 남자애들이 또래 여학생의 사진을 보면서 성적인 발언을 할 경우, 이를 불편하다고 말하면 ‘선비’라며 놀린다. 그때 동조하고 묵인하는 분위기가 남자애들을 성범죄에 둔감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은 케케묵은 방식의 성교육을 뒤집지 않는 한 수많은 ‘엔번방 동조자’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뉴스1
텔레그램 대화방 '박사방'에서 조주빈의 미성년 성 착취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 '부따' 강모씨가 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마친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10대인 강씨는 조주빈의 다른 공범들과 함께 박사방 참여자를 모집·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암호화폐로 모금한 범죄수익금을 인출해 조주빈에게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20.4.9

“부모님에게 말한다”는 어떻게 협박이 됐나

“순진무구함, 순결함, 아무것도 모르는, 그리고 ‘딸 같아서’. 여성 청소년한텐 늘 이런 수식어가 따라붙어요. 거기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비행청소년’이 되죠.”

여성 청소년 윤달(활동명·16)은 이렇게 짚었다. ‘피해자들은 절대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는 텔레그램 성착취 가해자들의 맹신은 여기서 비롯된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한겨레>와 인터뷰한 청소년들은 그 배경에 ‘10대가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고 봤다. 특히 우리 사회가 여성 청소년에게 지우는 ‘순결’과 ‘성적 대상’이라는 이중적인 이미지는 여성 청소년이 협박을 당하고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텔레그램 성범죄 피해자 중 일부는 노출 사진 등을 올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일탈’ 계정을 운영했다. 청소년 페미니즘 단체 위티는 “성을 욕망하는 여성 청소년에게는 익명성을 빌려 자신을 드러내는 ‘일탈’만이 허락됐다”고 설명했다. 그런 피해자들에게 “너의 부모님에게 알리겠다”는 엔번방 범죄자들의 협박이 미친 영향은 강력했다. “여성 청소년이 성적 욕망을 드러내거나 말하는 건 잘못된 거란 생각 때문에 범죄 피해를 당하고도 도움을 청하지 못했을 것”이란 설명이다.

20여년 전 성폭행을 당한 10대 청소년의 영상이 ‘빨간 마후라’라는 이름으로 유포됐을 때부터, 한국 사회는 여성 청소년 성착취물을 ‘범죄물’로 단죄하는 대신 ‘음란물’로 소비해왔다. 범죄 피해를 당하고도 청소년들이 입을 열지 못하는 까닭이다.

가정이 보호보다는 통제와 훈육의 공간인 점도 청소년들의 피해 호소를 막았다고 이들은 설명했다. 정지원씨는 “일단 경찰에게 알려 수사를 요청하려면 부모님을 대동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수사기관의 도움을 받는 게 청소년한텐 멀고 힘든 일”이라며 “부모님 등 친권자에게 알리지 않고도 수사를 진행할 수 있게 해, 신고의 문턱을 낮췄으면 한다”고 말했다.

남성 청소년 최혜성(18)씨는 “부모님에게 알리겠다는 말이 협박이 돼버린 건 가정이 청소년의 의사를 무시한 채 훈육을 위한 집단으로 전락했다는 뜻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성세대에게 배운 ‘남성연대’ ‘강간문화’ 답습하는 교실

청소년들에겐 교실도 폭력을 내면화하는 공간이었다. 교실에선 성적 욕망을 마음껏 분출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숨기고 쉬쉬하는 부류가 있다. 5명의 청소년들은 이를 나누는 기준이 성별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윤달은 중학교 2학년 수업 시간에 영화를 본 경험을 떠올렸다. “수업 시간에 영화를 보고 있는데, 여자 주인공 2명이 달리는 장면이 나오자 뒤에 있는 남자애들이 음담패설을 큰 소리로 말했어요. 저도 여러 생각을 하지만 남자애들에게만 이런 발언이 허락된 거죠.”

성에 대해 말하는 일이 남성에겐 허용되고, 여성에겐 금기가 되는 배경에는 남녀를 생물학적으로 가르는 논리가 숨어 있다. “남자애들은 원래 짓궂다”는 논리는 교실에서도 일상화돼 있다.

윤달은 “텔레그램 성착취방의 채팅 대화들을 봤는데 그건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평소 교실에서도 듣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선생님께 얘기하면 ‘남자애들이 아직 어려서 그런다’며 그냥 넘어갔던 말들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선생님들이 용인해준 말들이 엔번방에서 폭력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뼈아픈 지적이다.

‘단톡방 성희롱’ ‘외모 품평’ ‘불법촬영물’ 등 남성연대를 기반으로 한 각종 성범죄는 ‘선생님 불법촬영’ ‘동급생 불법촬영’ ‘엄마몰카’라는 이름으로 이미 교실에서도 유행한 지 오래다. 양지혜 위티 대표는 “엔번방 사건은 여성 외모 품평이나 불법촬영물 콘텐츠가 오가는 단톡방 문화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엔번방 사건이 기존의 남성 권력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요즘 애들 참 안타깝다’고 말할 때가 아니다. 이런 구조부터 끊고 바꿔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혜성씨도 ‘일상에서 마주한 여성혐오 문화를 해결하지 못한 기성세대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씨는 “남성이 여성뿐만 아니라 약자들을 착취할 수 있는 강자라고 보고 ‘남성성’을 드러내는 것이 남성연대의 핵심인데, 이건 10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 전체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뉴스1
대전여성단체 연합 회원들이 30일 오전 대전지방검찰청 앞에서 텔레그램 N번방 이용자 강력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3.30

‘내 몸 보호’에만 그친 성교육, 혐오와 성 인지 감수성까지 가르쳐야

청소년들은 ‘성교육 정상화’가 제2의 엔번방 사건을 막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지적했다. ‘내 몸은 내가 보호해야 한다’는 식의 전통적인 성교육은 여성혐오와 강간문화에 바탕을 둔 최근의 성범죄 예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범죄를 또래문화 속 권력관계 또는 놀이 정도로 생각하게 만드는 결과만 낳았다.

여성 청소년 토은(활동명·17)은 “성교육을 할 때 여전히 남학생들에겐 욕망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고, 여성에게는 성기는 중요한 부위이니 함부로 만져지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교육할 때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남자애들은 낄낄거리기만 한다”며 “새로운 여성주의적 관점이 들어간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성 청소년 김정현씨도 “엔번방 사건 이후 ‘우리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게 안타까웠다. 학교 안에서 내가 받은 성교육도 ‘내 몸 지켜야 한다’는 수준에서 멈췄기 때문이다”라며 “또다시 이 문제를 청소년을 성으로부터 격리, 보호해야 한단 목소리가 높아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성 인지 감수성과 성별혐오까지 인권교육을 함께 다루는 포괄적인 성교육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공교육이라는 마당에서 10대들이 진지하게 성을 토론하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혜성씨는 “여성혐오, 성범죄 문제와 관련해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논의를 꺼리고 쉬쉬해왔다. 이제는 학교에서 그게 잘못됐다는 걸 알아들을 때까지 말해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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