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태도를 지켜보면 아직도 핵심에 파고들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말하기 쑥스러워서인지는 몰라도 정책의 실패를 인정한 대목은 없다.”
2020년의 글일까? 아니다. 1988년 8월의 기사였다. 이런 문장도 있다.
“10년 전인 78년에도 똑같은 소리가 나왔었다.”
정부가 정책을 펴도 집값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옛날부터 많았다. 가진 사람의 반대도 옛날부터였다. “토지공개념에 입각, ‘균전론’을 편 성호 이익 선생은 ‘찬성하는 자가 100명이고 반대하는 자가 1명이라 하더라도, 1명의 힘이 100명의 입을 막기에 족하니 어찌 시행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이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생각나는 지역이 있다. 서울의 강남이다. 궁금하다. 강남 아파트는 어째서 비쌀까? 강남 아파트값이 비싸다는 사실은 또 어째서 문제가 될까? 자기가 자기 집 비싸게 팔겠다는데 신경 안 쓰면 그만, 그런데도 우리는 강남 아파트를 입길에 올리니 말이다. <한겨레> 아카이브에서 강남 아파트를 살펴봤다.
강남과 아파트와 <한겨레>, 1980년대부터 이야기해보자. 왠지 한겨레신문은 아파트 개발을 싫어했을 것 같다고 지레짐작하실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1988년 한겨레 창간호의 1면 광고가 무엇일까? 우성건설의 부평단지 아파트 분양광고였다.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안기부를 비롯해 모든 부처와 기관이 총궐기하듯 <한겨레>에 광고를 못 하게 노골적으로 탄압을 하던 때”였다고 2020년에 당시 광고를 집행한 우성건설 상무 조계현은 회상했다. “이른바 ‘빨갱이 신문’에 광고를 하는 업체엔 불이익을 주겠다”며 정부가 나서서 협박을 했다나. 조계현은 “고심 끝에 사장도 회장도 몰래 혼자 결단을” 내렸다. <한겨레> 창간호에 광고를 싣기로 한 뒤 “회장에게 사직서를 내고 두달간 도피 생활을” 했다. 회사도 조계현도 “안기부 등에 4번이나 사직서 낸 사실을 확인시키며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잊을 만하면 물난리 나던 동네
일간지 창간호 1면에 아파트 분양광고가 실린 점 역시 눈길을 끈다. 1980년대는 아파트가 ‘사랑받기’ 시작한 시절이다. 전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1960년대 말까지 아파트에 대한 저항은 완강했다. 정부는 아파트 홍보에 열을 올렸지만, 마당이 없다거나 공동생활의 불편함이 크다는 것 등이 아파트를 꺼리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은 아파트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국의 아파트 가구율은 세계 최고다. 70년대부터 지속돼온 아파트값 폭등 속도도 세계 최고일 것이다.” 2005년 <한겨레21>에 실린 강준만의 글이다.
1980년대에 강남도 떴다. 전 시대에는 “한적한 농촌이었다.” 부자동네가 아닌 건 물론이고 심지어 사람이 모여 살던 동네가 아니었다. “강남 개발은 1980년대 지하철 2, 3호선의 개통과 더불어 완성됐다.” 2012년 <한겨레21>에 실린 박스 기사의 제목은 ‘강남의 탄생’이다.
급히 띄운 지역이라 강남에는 아직 해결 안 된 문제도 많다. 예를 들어 비가 많이 오면 강남 이곳저곳은 물에 잠긴다. 1990년에는 대치동의 아파트 상가가 물에 잠겨 상인들이 항의시위를 했고, 1998년에는 지하철 선릉역이 침수되었다. 여전히 강남역은 잊을 만하면 물난리가 난다. 오늘날 화려한 모습만 보면 상상이 안 되지만 말이다. 강남이 그토록 급하게 개발되었다는 이야기다.
짧은 기간 동안 강남 아파트값이 무섭게 올랐다. 왜일까. 사람들이 꼽는 첫번째 이유는 자녀교육이다. 한때 강남은 공교육이 좋은 동네라고 소문이 났다. “개발 수요가 강남으로 집중되도록” 정부는 “인구 집중을 유발하는 명문 고등학교와 법원 등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1976년 경기고를 필두로 시작된 학교 이전의 효과는 확실했다.” 2012년 <한겨레21>의 분석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집 가까운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그런데 어떤 고등학교는 다른 고등학교보다 유명대학에 합격생을 많이 냈다. 게다가 그런 고등학교들을 정부는 이른바 “8학군”, 서울 강남 지역에 몰아넣었다. 서둘러 개발은 하는데 사람이 더디 모이니, 강남에 이사 가는 사람에게 일종의 특권을 준 셈이다. 곧 사람이 모이고 집값이 올랐다. 주소만 강남에 옮기는 ‘위장전입’의 편법도 쓰였다.
‘입시명문’ 학원들이 모이다
1988년 7월의 <한겨레> 칼럼은 이렇게 꼬집었다. “소위 일류학교에 입학할 기회를, 현 제도는 8학군에 입주할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에게 부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제도를 대학에 적용할 경우를 가정해 보자. 서울대학이 있는 봉천동과 신림동의 주민은 부동산 값의 엄청난 상승과 함께 여러가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로 학군제 대신 직업을 배정하는 취업군제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 제도에 의하면 여의도에 살아야 증권사에 취직할 수 있다. 이런 제도는 모두가 터무니없다고 일소에 부칠 것이다. 그런데 이들과 고교 학군제도가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 이 칼럼의 제목은 ‘귀족학군과 사회병폐’였다. 강남은 이때 이미 귀족들이 사는 동네로 불린 셈이다. “교육과 부동산 관련 정책에서 이 본질적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아마도 이해당사자 사이에 묵시적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