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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처 게임의 상상력이 주류문화를 파고든다

중독담론 넘어선 비평적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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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적 관점에서 게임 인구와 플레이 시간의 증가는 어리석은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아니다. 현실보다 나은 무엇이 있기 때문에 현실 아닌 게임을 선택한다.” 경제학자 에드워드 카스트로노바의 말이다. 게임 디자이너 세스 프리벳치는 이렇게도 말했다. “미래 세계는 게임 레이어 위에 펼쳐지며 게임 레이어에서는 가상뿐 아니라 현실의 모든 일까지도 게임의 활용과 확장을 통해 수행된다.” 원칙·미션·승패·보상으로 이뤄지는 게임의 룰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교육·정치·환경·마케팅에서 게임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는 뜻이다. 게임 외적인 분야에 게임의 메커니즘과 사고방식을 접목하는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란 말도 있다.

가령 국민 프로듀서(시청자)들이 투표를 통해 아이돌 멤버를 뽑는 TV 오디션 ‘프로듀스101’은 TV로 들어온 게이미피케이션이다. 게이머가 아버지가 되어 딸을 키우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인 ‘프린세스 메이커’를 TV 오디션 형식에 차용했다. 그것도 이중 게임이다. 오디션에 나온 아이돌 후보들끼리 경합을 벌이고, 시청자는 자신이 원하는 멤버를 데뷔시키기 위해 경쟁 후보를 견제하는 등 게임처럼 프로를 즐긴다.

오랫동안 서브 컬처에 속했던 게임이 영화와 드라마 등 주류문화를 파고들고 있다. 게임 원작 영화 리메이크는 오래된 일이다. ‘워크래프트’ ‘파이널 판타지’ ‘툼 레이더’ ‘레지던트 이블’ 등 인기 게임들이 속속 영화로 옮겨졌다. 게임에 사용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나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로 만들어지는 ‘머시니마 (Machinima)’영화도 있다. 일부 영화에서는 게임의 1인칭 시점을 가져와 게임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1인칭 슈팅 게임의 시점을 그대로 가져와 상영시간 내내 주인공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 ‘하드코어 헨리’(2015) 등이다. 극장 개봉 중인 김병우 감독의 영화 ‘PMC 더 벙커’도 관객의 현장감을 위해 게임의 1인칭 시점을 적극 활용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 게임 소재의 블럭버스터 ‘레디 플레이어 원’(2018)으로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했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 유일한 탈출구인 가상현실 게임 ‘오아시스’에 열광하는 주인공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다 현실 세계의 악을 물리치는 얘기다. 캐시템(게임 아이템), 워프(순간이동), 상처에서 줄줄이 흐르는 코인 등 게임 요소들을 적절히 배치해 게임 팬들에게 어필하는 한편, 중요한 건 진짜 현실이란 메시지를 담았다. 우리 영화로는 온라인 게임과 액션을 버무린 박광현 감독의 ‘조작된 도시’(2017)가 있다. 초반부 대규모 전투 장면은 온라인 게임 속을 누비는 주인공의 상상 액션이다.

최근 국내외 젊은 관객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과 넷플릭스 영화 ‘블랙 미러:밴더스내치’도 게임이 소재다. 게임을 다루는 훨씬 진화된 방식이 눈길을 끈다.

우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포켓몬 고’ 같은 증강현실(AR·Augmented Reality) 게임을 소재로 한 국내 첫 드라마다. 스마트렌즈를 눈에 끼면 가상의 적이 실물처럼 나타나 대결을 펼치는 증강현실 게임을 실감 나게 재현했다. 그런데 여기엔 치명적 오류가 있다. 유저끼리 게임을 하다 한쪽이 죽으면 실제로도 사망하게 되고, 이때부터 현실과 게임이 뒤섞인다. 사망한 유저는 좀비가 돼 주인공을 쫓고, 설상가상 렌즈를 끼지 않아도 자동 로그인이 된다. 절대 게임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도의 시작이다.

전작인 TV 드라마 ‘W’에서 웹툰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국내 판타지물의 새 장을 개척한 송재정 작가의 예측불허 탄탄한 극본이 시종 감탄을 자아낸다. 한국 드라마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가 절로 나온다. 현실과 게임을 오가다 게임 안에 갇히는 설정은 게임에 대한 통제불능, 게임중독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으로도 읽힌다. 이미 일상어가 됐지만 크리(치명타), 던전, 퀘스트, 레벨업 등 게임 용어와 방식을 TV 드라마 안에 그대로 담아냈다.

'밴더스내치' 중 한 장면
'밴더스내치' 중 한 장면

넷플릭스의 야심작 ‘밴더스내치’는 게임의 이야기 방식인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으로 주목받은 세계적 화제작이다. 플레이어의 선택과 피드백에 따라 진행이 바뀌는 게임처럼, 시청자의 선택으로 줄거리가 바뀐다. 줄거리 자체가 게임 개발자의 게임 개발 과정이다. 주인공에게 주어진 크고 작은 선택지는 30여개, 준비된 결말은 5개지만 최종 경우의 수는 그보다 더 많다. 러닝타임도 천차만별, 길게는 5시간에 달한다. 사실 결론이 무엇이냐 보다, 주인공이 자신의 선택이 제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관객 혹은 넷플릭스)의 조작이라는 의심을 품는 대목이 궁극적 메시지다. 관객에게 선택지를 더 많이 열어줬지만 결국은 손바닥 안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미디어와 기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담은 영화다.

게임 소재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두 작품의 외피는 게임·기술 비관론이지만, 역설적으로 더 이상 게임이 주변부 문화가 아니라는 것도 보여준다. 정신과 의사 하지현이 책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의 추천 글에서 “20세기가 영화의 세기였다면, 이제는 영화에 대한 관심이 조만간 게임으로 옮겨가지 않을까” 했던 전망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현은 이렇게도 썼다. “일반적으로 역사는 승자의 시점에서 쓰인 것이라는 결과 위주의 스토리텔링인데 반해, 게임 속의 역사는 그것을 플레이어들이 만들어가고, 작동방식이나 어떤 인물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열린 시스템으로 구성돼 있다. 역사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문명’ ‘삼국지’ 같은 게임을 많이 해본 사람은 나중에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사뭇 다르지 않을까.” 게임과 게이머가 세상을 인식하고 구성하는 방식을 모르고서는 새로운 세상과 문화를 읽기 어려운 시대라는 얘기다.

*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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