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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7월 11일 15시 14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7월 11일 15시 14분 KST

'GLOW SEOUL' 대표 이든님을 만나다

익선동의 오늘 #1

▲ 2018.6.11. @더섬머, 익선동
huffpost

터울 :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소식지팀장을 맡고 있는 터울이고요. 이쪽은 작년부터 소식지팀원을 하고 있는,

이든 : 전에 한 번 본 것 같아요.

제니 : 네, 작년에 제가 한번 인터뷰차 뵈었었어요. 익동정육점에서. 그 때도 한창 오픈 때문에 바쁘셨었는데, (웃음)

이든 : 그 때 혹시 젠트리피케이션 관련해서 물어봤던 친구인가요?

제니 : 네. 그 이후로 저도 소식지 안에 들어가게 되어서요. 

터울 : 익선동과 도시계획 관련해서 많은 글을 연재하고 있는 친구예요. 그럼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주시죠. 

이든 : 저는 GLOW SEOUL 대표를 맡고 있는 류정수, Ryu Ethan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1. 연세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컴투게더’ 활동과 데뷔 당시의 종태원 문화

터울 : 제가 찾아보니까 참 많은 일과 활동을 하셨더라고요. (웃음) 연세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컴투게더’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학번이 어떻게 되세요? 

이든 : 98학번입니다. (웃음) 

터울 : 그 때만 하더라도 학내에서 성소수자로 커밍아웃하는 사람이 적었을 거라 추측되는데요.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이든 : 그 때는 컴투게더에서는 오히려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초기에는. 최근에는 저도 교류가 없어서 후배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잘 모르는데, 저희 때는 초창기에 서동진씨로 시작한 멤버들이, 저희 컴투게더가 최초의 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다 보니까, 인권에 방점을 둔 사회운동적인 분위기가 훨씬 강했죠. 그리고 저희 세대가 아무래도 아직 운동권이 학교에도 많이 살아있었고, 그런 의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모임이 결성됐고 활동을 했기 때문에, 가령 대자보 붙이는 것도 낮에 그냥 당당하게 붙이고, 분위기가 좀 그랬어요. 

터울 : 90년대의 문화운동의 수혜를 듬뿍 받으셨던 상황이었군요. 그래도 어쨌든 들어가셔서 활동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거든요. 일찌감치 게이로 정체화하셨던 것 같고요. 

이든 : 호기심이 많은 편이어서, 여기저기 그 당시에 이쪽 나와서, 여기는 물이 어떤가, 저긴 물이 어떤가-하면서 기웃기웃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자연스레 우리 학교에 그런 동아리가 있으니까 들어가보게 됐고, 물은 폭망이었죠. (일동 웃음) 연고대 서울대가 거의 몇 달의 차이를 두고 비슷한 해에 성소수자 동아리가 생겼어요. 세 학교 중에서 물이 제일 안 좋았죠. (웃음) 

터울 :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때는 그랬군요. (웃음) 

이든 : 그게 오래갈 수 있었던 비결인 것 같아요. (웃음) 거기서 식 만나서, 저희 선배 한 명도 저랑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는데, 들어오자마자 연애를 한 거예요. 한 명이랑 눈이 맞아서. 그래서 모임에 3명밖에 안되는 탑 중의 한 명을 만났는데, 한 달 사귀고 헤어지고 나선 3년간 고난의 시기를 겪으셨죠. (웃음) 버티기 힘들었다는 후일담이 있어요. 아무튼 저는 학교 내에서는 연애를 한번도 한 적이 없어서, 그게 학교 내에서 오래 갈 수 있었던 비결인 것 같고. 

그리고 종태원에 처음 나온 건 대학 들어가기 전이에요. 데뷔는 이태원으로 하고, 종로·이태원 다 한번 휩쓸고, 그러고선 좀 다른 곳도 한번, 의식있는 곳도 가보고 싶다고 해서 학교 모임을 가게 됐죠. 

터울 : 그럼 종태원에 나온 건 몇 살 때였어요? 

이든 : 처음 나온 건 18살, 고2 때?

터울 : 이태원에 지하철이 없었을 때군요. 

이든 : 얼리버드였죠. 그 때 나왔을 때, 여기에 지하철이 곧 들어설 거라는 얘기를 상인들이 하면서, 걱정을 하시던 기억이 나요. 

터울 : 왜 걱정을 하셨어요?

이든 : 그러니까 이태원에 지하철역이 생겨서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쪽 게이업소가 계속 있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얘기를 하셨던 기억이 나요. 

터울 : 그 때부터 그런 걱정이 있었군요. 

이든 :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용어를 모를 때도 그런 비슷한 얘기가 있었어요. 자연발생적인 일이다보니까, 그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아요.

터울 : 그 때는 지금보다 더 음지에서 쉬쉬거리며 영업하는 곳이 더 많았을 때인데요. 90년대에는 심야영업이 원칙적으로 안되던 때였기도 했고, 

이든 : 모르겠어요, 그래도 다들 자정 넘어서도 영업했던 것 같아요.

터울 : 네, 불법으로 많이 했었고 그게 풀린 게 99년이거든요. 그럼 청소년 때 이태원에 나오신 거군요.

▲ 이태원 게이클럽 ZIPPER 광고 (『BUDDY』 19, 2001.5.9., 107쪽.)

이든 : 지퍼가 먼저였어요, 스파르타쿠스가 먼저 생겼어요? 둘다 가긴 했었는데, 시기상으로 어디가 먼저 생겼는지는 헷갈리네요. 20년이 넘다보니까. 

터울 : 당시를 주름잡던 게이클럽들의 이름이 나오는군요. 

제니 : 저는 전해듣기만 했었던 이름이네요. 

터울 : 저도 잡지 광고로만 접했죠.

이든 : 그 때는 클럽들 분위기가, 가면 다 인사를 했어요.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안녕하세요-” 하면서, ”어 형 오셨어요-” 이러면서 되게 예의바른, 동방예의지국의 ‘보갈’클럽다운, (일동 웃음) 

터울 : 게이커뮤니티가 너무 좁아서 그랬을까요? 

이든 : 그렇기도 하고, 다 아는 분위기도 있었고, 선배에 대한 어떤 예의? ”이 바닥은 먼저 남자맛을 본 년이 선배”라며, 그런 게 있었죠.

터울 : 소위 ‘언니 문화’라는 게 그 때도 있었군요. 

이든 : 네. 그래서 생각해보면, 학교도 그랬고, 이쪽 문화가 변한 게 아니고 그냥 일반 문화 안에 이쪽 문화도 있잖아요. 사실 우리가 완전히 독립되어있을 수가 없으니까. 그 당시에는 선후배나 어떤 연장자에 대한 우대, 장유유서가 강하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좀 그런 것도 있었고, 나오던 사람의 숫자도 지금처럼 광범위하지 않았겠죠. 그래서 뉴페라는 게 훨씬 더 희소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오프라인을 통해서만 뉴페라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처음 이태원이나 종로를 나오게 된 사람에 대한 관심, 그리고 누군가가 나오게 됐다는 것에 대해서 특정한 관심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터울 : 당시 이태원이 그랬다면, 종로는 어땠나요, 처음 나오셨을 땐?

이든 : 초창기에 저는 종로는 잘 안 다녔어요. 왜냐하면 그냥 제 의식 속에 있었던 느낌이었는지 모르겠는데, 그 느낌상으로 종로는 나이든 사람들이 간다는 이미지가 있었어요. 실제로 나이 드신 분들이 가는 바들이 되게 많았었고, 소주방 문화가 없었어요, 그 때. 종태원에 소주방이 하나도 없었어요. 

터울 : 그럼 가라오케나, 

이든 : 가라오케랑 원샷바만 있었죠. 프렌즈가 언제 생겼죠? 

터울 : 프렌즈도 2000년대에 생겼죠. 

이든 : 발렌티노도 있었나?

터울 : 발렌티노는 1980년에 생겼죠. 

이든 : 네, 지금 발렌티노 느낌의 가게들이 그 당시엔 더 많았던 걸로 기억하고, 젊은 사람들이 가는 바들이 있었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어린 애들은 주로 ‘2번가‘라든가, 피맛골에 있는 되게 낡은 호프집, ‘황제호프’같은 그런 집들이 있었어요. 이모들이 이쪽 사람들 가면 싸게 주고, 단체번개하고 이런 데. 

터울 : 네, 예전에 거기서 술번개 많이 했죠. 

이든 : 지금도 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아무튼 그런 가게들을 주로 많이 갔었어서, 종로는 약간 내 스타일이 아냐, 난 우아한 이태원~ (웃음) 이러면서 다녔죠. 

터울 : 그래서 종로와 이태원의 게이 문화가 다르다는 인식이 있으신 거군요. 그렇게 필드를 뛰시다가, (웃음) 컴투게더로 들어가셔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하거든요. 

이든 : 저는 들어간 다음 해부터 졸업할 때까지 신입회원 관리부장을 맡았어요. 

터울 : 뉴페를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일이죠. (웃음)

이든 : 네, 선배들이 그래도 그나마 네가 우리 중에서 얼굴이 나으니, (일동 웃음) 누굴 내보냈더니 신입회원들이, 그 때는 동아리에 바로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고 학내에서 보호를 해야 되니까, 신입회원이 있을 때는 먼저 따로 만나서 학생증 검사도 하고, 간단한 인터뷰 절차를 걸치고 나서야 들어올 수 있었어요. 그랬는데 그 당시에 다른 분이 하셨는데 신입회원이 이상하게 인터뷰만 나오고 그 다음부터 연락이 안되더라고, (웃음) 그래서 저를 내보냈었죠. 그 역할을 5년 했죠.

터울 : 이게 참 커밍아웃과 아우팅의 딜레마가 있죠. 커밍아웃이 필요하지만 아우팅이 되면 안된다는 게 지금도 유효한 것인데, 그런 딜레마의 한가운데에 계셨던 셈이네요.

이든 : 그런데 워낙 선배들이, 저도 학교 모임 나가기 전에는 커밍아웃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학교 모임을 나가서 선배들이 당당하게 활동하는 걸 보면서, 되게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이렇게 움츠려서 나를 숨기려고 하는 게 너무 부끄럽다?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동성애자인권연대(현 행성인)에 ‘까르띠에’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CD(크로스드레서)예요. 그래서 되게 체격도 건장하고 남자답게 잘생긴 친구였는데, 진짜 생머리를 허리까지 기르고 여성 정장을 항상 입고 다녔었어요. 그 친구가 우리 학교 학생은 아니었는데 신촌에 자주 놀러와서 다른 형들이랑도 밥먹고 그랬어요. 그래서 만났는데, 그 친구랑 아는 척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커밍아웃이 되는 거예요. 그 친구랑 함께 다니는 게. 그래서 나는 처음에 그 친구를 멀리했는데, 그게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걸 알게 해준 게 학교 선배들이었던 것 같아요. 

터울 : 지금도 커뮤니티에서는 그런 ‘까마’(여장)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일정한 반감들이 여전히 존재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그때 깨지셨던 계기가 됐군요. 커밍아웃을 운동적인 개념으로 접했다고 하셨는데, 90년대 학번 분들 중에 오히려 00년대 이후보다 커밍아웃에 대한 의식이 강하신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제니 : 지금 세대보다도 더 강한 것 같아요.

이든 : 인생 내놓고, (일동 웃음) 

터울 : 혹시 과가 어떻게 되세요?

이든 : 저는 천문우주학과였어요. 

터울 : 이과대를 나오셨군요.

이든 : 네, 전혀 상관없는 일을 계속 해왔지만.

터울 : 그러면 궁금한 것이, 졸업하시고 난 다음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 

이든 : 졸업하고 나서 인생의 굴곡이 많았었는데, 사실 학부 전공이 잘 안맞았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제가 수학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을 가니까 난 수학을 못하는 거더라고요. 그걸 고등미적분, 공업수학을 배우면서 절실히 깨닫고, 그리고 저는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전혀 없었어요. 컴퓨터 언어를 배우는데, 우리 과의 경우 인공위성 같은 데 들어가는 언어들은 기계어에 가까운 순수언어를 써요. 대부분 FORTRAN을 썼었는데, 정말 못하겠는 거야. 이게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내 영역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알고리즘에 대한 사고방식이 없구나-라는 걸 깨닫고, 난 딴 길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원래 사실은 전 대학 가기 전에 미술 전공을 하고 싶었거든요.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부 활동을 계속했는데, 미술이나 건축, 조각, 이런 데에 관심이 많았었어요. 그러다 전시나 박람회와 관련된 회사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 친한 선배가 일을 하고 있어서 도와달라고 해서 갔는데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서 일을 하다가 군대를 갔는데, 제대하고 나서도 그 쪽에서 계속 일을 돕고, 졸업하고 나서도 3년 정도는 거기에서 일을 했었죠. 서울에서 일하다가, 부산도 잠깐 내려가 있었고. 그리고 다시 서울 올라왔다가, 사정이 있어서 학교로 가게 됐죠. 그래서 아이들 가르치다가, 또 다른 회사를 가게 됐어요. 

교사를 했던 시기와 회사를 다녔던 시기는 살짝 겹쳐요. 저의 특징은 모든 일이 그 다음 일로 넘어갈 때 그 전의 일이 겹쳐요. 그러고보면 과감한 성격은 아니에요. 그리고 어떤 일을 완전히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맺고 끊는 게 깔끔하니까 좋은 것 같은데, 일을 그만둘 때 새로운 일에 대해서 내가 정말로 잘할 수 있는지는 원래 확신이 없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일을 벌일 때 사람이 오히려 움츠러들더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아직 돌아갈 것이 있다는 여지가 남아있는 게 저한텐 사실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항상 일들이 좀 약간 겹치게 돼요. 겹치다가 여기 그만둬도 되겠구나 할 때 넘어가는 식이죠. 

▲ SPIKE (2015) ©Ryu Ethan
▲ SPIKE (2017) ©Ryu Ethan

2. 고고보이 활동과 퍼포먼스 크루 SPIKE 

터울 : 그럼 회사 다니시다가, SPIKE 활동을 하시게 된 건데요. 저는 지금 기준으로도 신기한 그룹 같아요. 그런 ‘퍼포먼스 크루’를 본 적이 없어요, 한국에서. 한 크루 안에 드랙퀸도 있고, 고고보이도 있고, 이런 형태가 드문데, 이걸 어떻게 하시게 됐는지 궁금해요. 

이든 : 저도 모르겠어요. (일동 웃음) 그냥 섹날두 님께서 술먹고 밤에 전화해서, ”형, 저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어요, 멋있지 않아요?” 그랬는데, 다음날 자기가 그런 말 했는지 기억도 못하더라고요. (웃음) 어 그래 재밌겠다 해보자-그랬는데, 그렇게 기정사실화되어서 모이게 됐죠. 

터울 : 섹날두님은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이든 : 전 그 때 고고보이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SPIKE 시작하기 1년 반 정도부터. 당시 게이 클럽 CIRCUIT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퍼포먼스를 하려고 해도 아무도 무대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던 때였어서, 지금이랑은 퍽 다르죠. 다른 건 몰라도 고고보이에 대한 평가는 지금이랑 그 때는 정말 달라진 것 같아요. 그 때는 약간 마사지사와 동급으로 취급받는 분위기가 있었고, 

터울 : 네, 성매매를 한다는 의혹도 있었고, 실제로 하는 사람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이든 : 그렇죠. 그리고 실제로 정 올릴 사람이 없으면 호스트바나 마사지하는 업소에서 돈주고 데려다가 가면 씌워서 올리고 그런 상황이었죠. 

터울 : 한국인 고고보이를 쓰고 싶었는데 지원자가 많이 없는 상황에서, 

이든 : 물론 외국인 고고 쓰고 싶은데 비싸서 안 쓴 것도 있겠죠. (일동 웃음) 그래서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는데, 저 춤 더럽게 못추는 거 알면서, (웃음) 얼마나 궁했는지 ”형이라도 좀 올라가볼래?” 그래서 ”정말?” (웃음) 그러고서 올라갔었죠. 그렇게 저는 고고를 하고 있었고, 날두는 CIRCUIT에서 VJ를 하고 있었어요. 

터울 : 아 VJ 출신이셨군요. 

이든 : 네, 알던 사이여서, 본인이 영상도 잘 만지고 하니까, 뭔가 우리나라에서도 외국과 같이 뭔가 완성된 퍼포먼스의 쇼를 만드는데 영상을 결합하는 계획을 세운 거죠. 그 때 그런 게 있었어요, 비욘세가 그래미 어워드에서 너무 멋있는, 영상과 몸이 하나가 되어서 퍼포먼스를 한 게 있었어요. 

터울 : <Run the World> 무대였죠. (웃음)

이든 : 맞아, 그 영상을 보고 얘가 감동을 받아서 이걸 해보고 싶다, 그래서 앤쵸비랑 다섯 명이 나와서 같이 춤을 추고 이런 구상을 한 거죠. 그렇게 해서 공연을 하게 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악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데 또 나름 한 공연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돈을 쓴 적도 없었던 것 같고, 되게 재밌었어요. 

처음에는 1회성 프로젝트였어요. 그 때 새로 오픈하는 클럽이 있었는데 그 클럽 사장이 저랑 친한 분이셔서, 그 형이 멋있는 걸 해보고 싶다고 해서 오픈하는 날 기념으로 우리가 이런 걸 해보자고 해서 그 날 하루 와서 공연하는 걸로 생각하고 준비를 했는데, 공연도 막 잘 되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모르겠어요, 왜 그 다음을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전 그 때 앤쵸비도 잘 몰랐었고, 

터울 : 아 그 때만 해도?

이든 : 전 약간 정신이 어떻게 된 애인 줄 알았어요. (웃음) 맨날 술 꽐라돼서, 펄스에서 춤추다가 뒤로 넘어져서 병원에 실려간 적이 있는데, 그 다음주에 깁스를 하고 또 올라가는 거야. (일동 웃음) 

터울 : 이 얘기는 처음 들어요. (웃음) 

제니 : 저도요. (웃음) 

이든 : 쟤 뭐야-그래서, 저런 애랑은 절대 엮이지 말아야지 그랬고, (웃음) 날두도 항상 밤에 전화를 하는데, 아침에 보면 항상 기억을 못하는 거예요. 밤에 너무 멀쩡하게 한 시간씩 통화를 하면서 진지한 얘기를 했는데, 다음날 ‘저랑 통화했었어요?’ 이러니까, 얘네들 다 왜 이래?-그랬는데. 공연 준비하면서 가까이 보니까, 사실은 서로 살아온 환경이나 배경이나, 나이 차이도 꽤 있었고 전혀 다른데, 되게 맞는 코드가 있었어요. 우선 셋 다 마음이, 저는 모르겠지만 (웃음) 좀 마음이 순수한 친구들이었어요. 꾸밈이 없고, 되게 솔직하고, 표리부동하지 않은 그런 게 좀 있었어요. 그래서 같이 있는 게 되게 즐거웠었고. 

▲ SPIKE (2017) ©Ryu Ethan
▲ SPIKE 공연 : 제1회 RED PARTY, 2013.11.30. @Action, 이태원

터울 : 그리고 SPIKE 크루들이 2014년 서울시민인권헌장 관련 시청농성 때도 오셨었고, ”인권 고고보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죠. 그 때 쵸비씨랑 섹날두씨가 찍힌 사진이 있거든요. 그런 퍼포먼스 크루들이 시위 현장에서 뭔가를 한다는 건 그 전까지는 본 적이 없었거든요.

이든 : 그런 게 되게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때 고고를 저랑 같이 하던 친구들이, 한국의 1대 고고들이 몇 분 계셨는데, 진짜 이런 것에 1도 관심없어요. 그러니까 인권이라든가 좋은 의미로 하는 행사에 자기가 무료로 가서 공연을 해주겠다거나 이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주로 국제적인 파티나, 자기가 셀럽이 되는 방향으로만 관심이 있었는데, 저희는 그런 게 별로 없고 그냥 공연 잘하고 뿌듯한 게 중요했거든요. 그런 게 좀 맞아서 저희가 계속 같이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터울 : 네, 되게 독특하고 재밌는 문화가 탄생한 순간 같아요. 아까 잠깐 말씀 나눴는데, 퀴어문화축제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외국에 나가서 서킷 파티를 경험하셨던 기억이 있으실 것 같아요. 

이든 : 네, 많죠. 

터울 : 언제부터 나가셨고 어떤 점이 제일 인상깊었는지 궁금해요.

이든 : 처음 외국 서킷 파티를 경험한 건 2001년에 대만에 가서, 그 당시에 ‘점프’라는 대만 클럽이 있었어요. 뭔가 지금 기억이 과장되었을 수 있는데, 그 당시엔 어마어마한 거죠. 너무 큰 거예요. 엄청 크고, 그 때 고고보이도 태어나서 처음 봤거든요. 그 때는 동영상도 없었던 시절이에요. 동영상을 다운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어서, 일본에서 온 고고보이 네 명이, 몸이 좋은 훈남 청년들이 옷을 벗고 쇼를 하는데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뭐라 그럴까, 일반 사회에서의 문화는 옷을 벗고 뭔가를 하는 게 여성의 성상품화고 그걸 남성이 소비하는 구도잖아요. 그런 것만 익숙했는데, 그걸 반대로 경험할 일이 잘 없었고, 그걸 보고 있으니 너무 행복한 거예요. (웃음) 그래서 야 이런 거구나, 그래서 그 때부터 매해 대만에 가기 시작했죠.

터울 : 이성애자의 스트립쇼 문화랑 게이의 고고보이 문화는 정말 너무 다르니까요. 정말 같이 묶을 수가 없을 정도로 다르죠.

이든 : 네, 그래서 외국 파티를 매해 놀러 나갔었고, 고고보이 하면서 외국에 초청받아서 파티를 간 적도 꽤 되고. 그 때는 뭔가 되게 좋았어요. 고고보이가 제 인생에서 되게 큰 전환점이 됐는데, 어렸을 때, 저는 대학교 때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하고 이런 게 특별한 거라고 생각되시겠지만, 오히려 저한텐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니었어요. 뭐라 그럴까, 항상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는, (웃음) 삶이 좀 FM스러웠기 때문에, 집안도 교육자 집안이고 되게 엄한 가정교육을 받고 살아서, 내가 게이라면 나는 당당하게 게이로서 인권운동을 해야 돼-이건 약간 되게 당연한 것처럼 저는 받아들였어요. 

터울 : FM이 그런 식으로도 트일 수 있군요. (웃음) 

이든 : 네, 그 FM이라는 게, 일반처럼 속이고 사는 게 FM은 아닌 거죠, 저한테는. 그러니까 대학교 때 원래 전 PD계열이었는데, 학생운동하던 그 느낌 그대로 그냥 여기로 건너갔을 뿐인 거니까, 약간 그런 느낌은 그대로 가져갔는데, 또 제 안에 있는 다른 자아가 약간 먹물에 대한 혐오 같은 게 있어요. 저는 어쩔 수 없이 제 주변이 다 먹물들로 시커멓게 둘러싸여있는데, 항상 여기서 염증같은 게 있는 거예요. 약간 답답하고 재미없고, 노는 것도 너무 그렇고, 항상 하는 얘기도 그렇고. 

터울 : 의외로 뻔하고. 

이든 : 네, 그래서 이걸 완전히 벗어난 다른 부류의 자유로움을 느꼈으면 했었고, 그런 제 두 가지 분열된 자아가 있었는데, 고고보이를 하면서 후자를 채워줬죠. 그런데 이것 사이의 간극은 큰 거예요. 후자는 외국 파티 다니면서 노는 문화가 너무 음지로 가는 경향이 있었고, 전자는 당당하게 나서서 뭔가 인권활동하고 커밍아웃하며 살아가는 모습이랑, 그렇게 양자가 분리되어 있었는데, SPIKE가 이걸 중간에서 합쳐줬던 것 같아요. ‘인권 고고보이’라는 이름으로. (웃음) 

▲ SPIKE 크루 앤쵸비님, 섹날두님 : 서울시민인권헌장 서울시청 연좌농성장, 2014.12.7. @서울시청 로비

이든 : 처음에 저도 가면 쓰면서 고고보이를 했었거든요. 누구에게 내가 이런 걸 하는 걸 들킬까봐 조심했었어요. 처음에는 제가 이런 걸 한다는 걸 안 학교 선배들이 맨날 전화해서, 너 미쳤냐고, 정신 차리라고, 학교 얼굴에 먹칠을 한다느니, 

터울 : 먹물들이 다 그렇죠 뭐. (웃음) 

제니 : 그러게요. 어딜 가나 똑같네요. 

이든 : 그래서 ”니년 얼굴이 더 먹칠이다!” 이러면서 막 싸우고, (일동 웃음) 

터울 : 그런데 2000년대부터 이태원에 다니셨던 분들은 보통 그런 감각이 있는 것 같아요. 일단 외국에 나가서 외국의 게이 문화를 보는 게 첫번째고, 그 다음에 90년대의 운동으로서의 커밍아웃과는 사뭇 다른 맥락으로 ‘그냥 내가 놀겠다는데 내가 왜 얼굴을 못 까?’ 이런 마인드가 있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런 요소들이 하나로 되셨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든 : 두 가지가 합쳐진 다음에 비로소,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걸 더 발견할 수 있었던 계기였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아까 생소하다고 했었던 제 활동이나 제가 하는 영역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냥 저런 사람도 있는구나-라는 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 그런 것도 저는 좋고. 그리고 고고보이에 대해서도 좋은 인식이 박히게 된 데에 조금은 일조하지 않았나, 그런 걸 하는 사람들이 멀쩡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회에 좋은 일도 하고 그럴 수도 있구나-라는 인식에 조금은 기여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터울 : 어쨌든 SPIKE는 해체한 게 아니라 계속 활동하시는 거잖아요. 앞으로도 기대할 수 있는 거죠?

이든 : 전 마흔이 넘었잖아요. 그래서 토토가 느낌으로 뭐 언젠가 한번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몸도 예전같지 않고 얼굴에 주름도 자글자글하지만, 기억해주시는 분이 있다면 또 한번 공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터울 : 저는 먹물들이 싫었다는 말이 너무 동감돼요. 왜냐하면 저도 먹물이긴 한데, (웃음) 

이든 : 그러니까 같은 쪽 먹물이잖아요. (웃음) 

터울 : 맞아요. 그러니까 커뮤니티에서 호흡하고 발견하는 지혜들이 가슴을 뛰게 할 때가 있거든요. 그런 걸 비슷하게 느끼셨던 것 같아요.

이든 : 놀고 그 안에서 자유를 펼치더라도, 망가지면 안된다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절대 내뱉지 않는 말들이 있어요. 끼를 부린다고 해도 되게 절제된 끼인 거죠. 정말 세상 내놓고 자기를 다 내놓는 그런 끼가 아니고, 아무튼 말하기 힘든 그런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욕망과 욕구를 다 그 사람들 앞에서 펼쳐놓으면, 내가 너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곳에서는 나랑 똑같은 욕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여기도 있고, 그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곳이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거죠. 가령 그 정도의 간극은 아니지만, 게이로서의 내가 일반 사회에서 일반인 척하고 있을 때 느끼는 갑갑함 같은 게 그들 사이에서도 있었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태생이 먹물인지라, 또 여기 가서 있으면 그런 점은 좋은데 또 뭔가 만족되지 않는 지점들이 있어요. 저는 되게 정치적인 사람이어서, 정치적인 이슈에 되게 민감한데, 그런 것에 민감해하는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선거날 내일 휴일이니까 어디 놀러가자” 할 때 ”투표해야지 우리”, 그러면 ”투표를 해?” 뭐 이런 분위기. (웃음) 그런데 지금은 그게 하나로 모이고 있는 것 같아요. 

터울 : 맞아요, 그게 개인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도 있지만, 실제로 사회가 이렇게 중간으로 모이는 느낌도 있었던 것 같아요. 

▲ 2013 퀴어문화축제 포스터 ©Ryu Ethan

3. 퀴어문화축제 공식 파티 PRIVATE BEACH (2014~2017)

터울 : 퀴어문화축제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파티기획단이나 조직위원회에 언제부터 관여하게 되셨어요?

이든 : PRIVATE BEACH 하기 전에, 2013년 홍대 퀴어문화축제부터 참여하게 되었어요. 표지모델도 하고, 공연도 하고 그랬는데, 그러면서 그 때 이반시티의 성준님이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에서 파티를 담당하고 계셨어요. 제가 CIRCUIT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준님이 부탁해서 그런 걸 하게 됐었어요. 저는 사실 그 전까지는 퍼레이드에 관심도 없었고, 가본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홍대 때 처음 가보고, 너무 좋은 거예요.

터울 : 그 때 질적으로 많이 바뀌기도 했었죠. 그 전까지는 청계천에서 했었으니까. 

이든 : 네, 홍대-신촌-시청광장으로 넘어오는 3단 점프를 시작한 때였는데, 홍대 때만 하더라도 지금 규모는 아니었고, 훨씬 더 작았죠. 제가 대학교 때는 그런 활동도 열심히 하고 동인련 캠프도 매일 참여하고 하다가, 사회 나가서 제 생활 하느라고 정신없는 사이에 그런 인권활동에 대한 끈을 아예 놓아버린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다시 예전 대학생이 된 듯한 느낌이 들면서, 되게 좋더라고요. 

그래서 되게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고 집에 와서 이반시티에 들어가서 게시물을 보고 있는데, 그 때 어떤 분이 몇 년 연속 그런 글을 올리시는 분이 있었어요. 퀴어문화축제가 끝나면, 외국 퍼레이드랑 비교하는 사진을 이반시티 갤러리에 항상 올려서, 이게 ‘조선의 수준’이다, (일동 웃음) 그리고 여기는 샌프란시스코, 천조국의 수준, 약간 이런 느낌으로 해서 비교하는 이미지였어요. 당연히 우리는 그 때 예산 2000만원 가지고 하던 시절이니, 그런 차이나는 규모를 너무 초라하게 만드는 그런 사진이었는데, 되게 화가 나더라고요. 그런데 화가 나서 그런 사람을 비판하기 보다는, 우리나라의 퍼레이드도 외국처럼 당당하고 멋있고 규모가 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퀴어문화축제에 SPIKE 팀을 이끌고, 퀴어문화축제에서 뭔가 도움이 되어보자는 마음으로 합류하게 됐죠. 

터울 : PRIVATE BEACH를 하셨을 때 인상이 깊었던 건, 그 전의 파티가 물론 있었지만 게이들이 대거 합류해서 뭔가 스탭으로 일했던 적이 처음이었던 것 같고, 그런 면에서 그 전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그 한가운데에 계셨던 셈인데, 어떻게 그런 그림이 만들어지게 됐는지 궁금해요.

이든 : 제가 들어간다고 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이왕 하는 거, 저는 항상 모 아니면 도이거든요. 그래서 할 거면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대만 프라이드를 저는 계속 갔었으니까, 대만 프라이드를 보면 항상 부러웠거든요. 같은 아시아권인데, 미국까진 갈 것도 없고 대만은 시청광장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퍼레이드도 하고 공연도 하는 게 너무 부러웠었어요. 그런데 대만에 제가 항상 가게 됐던 이유는 프라이드가 아니고, 프라이드 끝나면 서킷 파티를 해요. 제사보다 젯밥이라고, 그게 더 관심이 있어서 가는 거죠. 그런 김에 퍼레이드도 보는 게 일거양득인 셈인데, 그래서 파티가 좀 강화되어야 외국에서 관광객도 많이 오고, 수익적으로도 퀴어문화축제가 항상 기부금만으로 운영됐었기 때문에, 수익적인 구조 개선도 해서 적자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파티를 좀더 제대로 키워보자는 생각이 첫번째였고요. 

두번째로는 막상 퀴어문화축제에 들어갔는데 조직위원이 다 해서 50명인데, 남자가 4-5명밖에 안되는 거예요. 그것도 대부분 성준형이랑 현구형같이 1세대부터 활동하신 분이신 거죠. 제일 어린 게 강명진 위원장이고, 젊은 게이 친구들이 정말 한두 명밖에 없고 다 여성들인 거예요. 커뮤니티에서 게이의 인구 비중이 결코 적지 않은데, 종로·이태원에 돌아다니는 저 수많은 게이들이 있음에도 퀴어문화축제 하는데 아무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람이 없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물리적인 성비를 여기서 좀 맞춰야 되겠다, 

터울 : 남녀동수가 거꾸로 적용된 셈이군요. (일동 웃음)

이든 : 게이들은 매일 끝나고 ‘어 우리나라 프라이드 미국이나 대만에 비해서 너무 허섭해’-이러면서 비판만 하지, 와서 참여해서 바꿀 생각은 안하고, 약간 이런 생각이 좀 들었어요. 그리고 조직위원 중에 레즈비언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레즈비언 여성분들한테 좀 부끄럽기도 했고. 게이들 뭐하냐, 정신차리자, 가서 우리가 뭔가를 하자. 그리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그 전까지 퀴어문화축제에서 사람들이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구석도 있었고, 그런 걸 감성터지는 게이들이 가서 좀 바꿔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고요. 

터울 : 그 때 그 많았던 인력들과 다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이든 : ‘언니 이거 하는데 너 와서 좀 도와’, 이러다가 인연이 여럿 끊겼습니다. (일동 웃음)

터울 : 남은 인연은 더 굳건해진 걸로, (웃음)

이든 : Jay Lee님이 이든형이 내 인생 망쳤다고, (웃음) Jay Lee는 사실 인연이 깊어요. 그 친구가 게이로 정체화하기 전부터 학교 후배로 알고 있었어요. 왜 일반이 이태원 ‘보갈’클럽에서 놀고 토요일 새벽 6시에 신촌 가는 기차를 나랑 같이 기다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동 웃음) 그러던 시절부터 알던 동생이었어요. 그리고 앤쵸비도 워낙 절친이고, 항상 일할 때마다 와서 일꾼으로 고생을 많이 해줬거든요. Jay Lee가 들어오면서 또 친한 동생들이나 온갖 사람들을 다 모아서 거의 한 30명 가까이를 모았죠. 그래서 해보자 하고 시작하게 됐죠. 

▲ SPIKE, 차세빈님 : 퀴어문화축제, 2015.6.28. @서울시청광장

터울 : 게이커뮤니티에서 퀴어문화축제의 위상이 확 바뀌게 되었던 계기였던 것 같아요, 2014년 즈음부터. 시청광장도 물론 있었지만, 인적 구성 자체가 안에서 들어가서 활동하는 게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이든 : 작년에 PRIVATE BEACH 파티팀 해체되고 나서, 올해 거의 저만 명목상 남아있거든요. 작년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올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명목상 남아있는데, 저도 그 효과에 대해서 잘 체감이 안되다가, 올해 게이스북에서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포스팅이 거의 안 보이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역시 내부 인권이 참여를 해야지 그쪽 관련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지는구나 생각했어요. 

원래 저는 약간, 퀴어문화축제에서 포스터 사진을 하나 찍어도 남자 여자 둘만 나오면 LG만 나오고 BT는 어딨냐, Q는 어딨냐, I는 어딨냐, 그런 것에 되게 민감해하는데, 약간 저는 이해가 좀 안 갔었어요. 그러니까 4명인데 어떻게 할 때마다 다 세워? 약간 이런 입장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런 지적도 일리가 있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이 전면에 나서는 모습을 자꾸 보여줘야지 관련된 사람들이 좀 계속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터울 : 저는 PRIVATE BEACH에서 단연 기억에 남았던 게 그 세빛섬에서 했던 2016년의 파티였던 것 같아요. 이게 어떻게 무료봉사로 굴러가는 파티였는지 궁금했고, 

제니 : 네, 저도 그 때 놀랐어요. 

이든 : 악몽같은 선택이었어요. (웃음) 저희가 그 때 파티 장소 섭외를 위해서 저희가 여러 군데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세빛섬도 파티날 빈다는 걸 알았고, 장소 예약에 콜을 외친 거죠. 그래서 그냥 우선 계약부터 하고 나서 모든 일이 시작됐는데, 말했듯이 인원이 부족한 건 아니었어요. 예산이, 파티 장소만 덩그러니 있고 아무런 파티 장비가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파티를 하려니, 그 때 저희가 썼던 예산이 7000만원이었을 거예요. 엄청 큰 돈인데, 실제로 거기서 파티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힘들었죠. 가령 기술인력들도 돈을 주고 세트로 데려오는 건데, 우리가 다 배워갖고 하고 이러니까 사람도 계속 더 늘고, 그들을 다 자원봉사로 돌려야 하니까, 개인적으로 나가는 밥값이 엄청나게 들었죠. 힘들었어요.

터울 : 그래도 어쨌든 그 파티가 기념비적이었던 게, 그거 하고 나서 같은 자리에 서킷 파티 I:M을 하기도 했었고, 여기서 파티가 가능하다는 걸 알려준 것만 해도 굉장히 컸던 것 같아요.

이든 : 그 전에, 지금은 없어졌는데 이태원에 있었던 큰 클럽인 S-cube가 있었어요. 거기서 했었을 때가 저는 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웃음) 많은 시도를 했었는데, 그래서 처음 고고보이를 해보는 친구들을 발굴해서, 이왕이면 퀴어문화축제의 정신에 맞는, 고고를 세우더라도 한국 고고보이를 우리가 발굴해서 세우는 그런 것도 했었고, 재밌는 시도도 많이 하고 사람들도 즐거워하고 많이 왔었어요. 그 때 시청광장의 퍼레이드 날짜가 계속 변경돼 뒤로 밀려서, 파티가 애프터 파티니까 퍼레이드 끝나고 해야 하는데, 생뚱맞게 퍼레이드 전주에 하게 됐었어요. 그래서 이게 될까 싶었는데, 역대 파티 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오고, 되게 기분좋게 했던 기억이 나네요. 

▲ 2016년 퀴어문화축제 공식 파티 PRIVATE BEACH, 2016.6.12. @세빛섬

터울 : 퀴어문화축제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퀴어·LGBT란 개념에는 다양한 성정체성들이 다 있고, 그들이 모두를 의식한다는 상태에서 어떤 활동을 한다는 게 중요한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는데요. 축제 측은 사실 그걸 선제적으로 신경쓸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고, 한두 해 정도 빼고는 공식파티가 게이·레즈비언 크루들이 다 같이 무대에 섰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이 공식파티가 축제의 수익을 담당하다보니, 분리하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하는 의견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파티가 하나 정도 있는 게 의미가 있다는 의견도 있죠. 파티를 진행하시면서 이에 대해 어떤 고충이 있으셨는지 궁금해요.

이든 : 게이들이 확실히 여혐 단어를 정말 많이 쓰거든요. 문제 되는 단어. 그런데 더 문제인 건, 그런 단어들이 여성을 지칭하는 걸로 여혐 단어를 쓰면 누구나 쉽게 문제라는 걸 스스로 인지하기 쉬운데, 내 스스로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다보니까, 자아와 타자가 혼재되어서,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지 모르는 약간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 (웃음) 이게 왜 여성혐오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도 있고. 

그리고 예전에 메르스갤러리 활동을 열심히 하는 여성분과 대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이 왜 게이들이 특정 여성 커뮤니티에서 공격의 대상이 됐는지에 대해서, ”게이가 최상위 포식자”라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이유인즉슨, 게이는 여성이 필요없는 사람들인 거야. 엄마 말고는 세상의 모든 여성이 없어져도 상관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말 여성에 대해서, 일반 남성이 가지는 조금의 관심이나 배려조차도 없기 때문에 더 무서운 존재일 수 있다는 얘기였는데, 일견 맞는 말인 것 같긴 해요. 그래서 저 자신도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까, 게이들로만 둘러싸여서 모든 인간관계를 쌓아오다 보니까, 제가 가지고 있던 자연스런 태도에 있어서 여성에 대해서 배려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고, 그런 것들을 퀴어문화축제에 들어와서 많이 깨닫고 배우는 계기가 됐죠. 

터울 : 게이들끼리 서로 ‘년’이라고 부르는 건 그 나름의 여성성의 맥락으로 소화될 수 있는 것인데, 그 말이 여성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완전히 다른 맥락이 되는 거니까요. 

이든 : 처음에 저도 가서 많이 배우고, 고치려고 노력했는데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고, 저희 게이 친구들을 축제에 많이 데리고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당연히 안에서 분란이 엄청나게 많았었어요. 분란이 일어나면 편이 갈려서 싸우는데, 되게 힘들었어요. (웃음) 저보고 왜 항상, 형은 왜 여성들의 편만 드냐, 우리 편이 안되어주느냐-그랬는데, 원래 용의주도하게 행동하려면 여기 가서는 저쪽 사람들 욕하고 저기 가서는 이쪽 사람들 욕해야 되는데, 진짜 그럴 수가 없었어요, 이 문제가. 

정말 별의별 문제가 많았어요, 너무 사소한 것에서부터 갈리는 거예요. 가령 무대가 끝나고 커튼콜에 다같이 인사를 하는데, 고고보이들은 옷을 벗고 있을 거 아녜요. 그런데 고고보이들과 여성 댄서들이 같이 올라갈 경우에, 안된다, 고고들에게 옷을 입혀라-라는 의견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말도 안된다, 이런 식인 거죠. 이럴 때 저는 사실 어떤 게 옳고 그른지 모르겠어요. 저 역시도 판단하기 힘들고, 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힘든데 중재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이게 표현의 자유의 문제인 건지, 아니면 여성들이 느낄 수 있는 위압감에 대해서 배려를 해줘야 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 모르겠었는데, 

터울 : 거기서 결국은 어떤 선택을 하셨어요?

이든 : 사실 그런 선택에서 저는 나름 대부분 여성 커뮤니티의 손을 들어줬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파티팀 전체가 두 명인가 빼고 다 남성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전체 퀴어문화축제에서는 남성이 소수지만, 파티 안에서는 남성이 절대적인 다수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성들의 민원은 더 우리가 민감하게 받아들여주고 배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제가 파티팀 팀장이 아니었고 파티팀 인원의 성비가 그렇게 구성되지 않았으면 다른 판단을 할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 순간은 그렇게 했어야 했고, 그게 옳았다고는 생각하는데, 저희 쪽 친구들한테는 엄청 섭섭했겠죠. 그래서 아직도 섭섭해하는 친구들이 있을 거예요.

터울 : 저는 이게 선도적인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고충이라고 생각되는데, 퀴어문화축제의 부스 같은 경우는 LGBT가 모두 함께 한다는 게 상대적으로 용이한데, 파티는 유흥문화잖아요. LGBT의 유흥문화가 정말 판이하게 달라서, 이것들을 한꺼번에 한 장소에 집어넣는 것 자체가 매우 큰 모험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조금씩 경험하게 만든다는 것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운동적인 어떤 목표와, 실질적으로 커뮤니티 현장에서 만들어지는 감각이 너무 달라지는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에, 사실은 좀 안타깝기도 했거든요. 이건 사실 누구도 답을 모르는 건데, 결국은 그 미지의 답을 감당하는 역할이셨던 것 같아서요.

이든 : LGBT를 모두 아우르는 파티를 해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아요. 해봤던 사람으로서는, 솔직히 꼭 같이 해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웃음) 약간 이건 정치적인 강박 같아요. 모든 그림에, 모두가 함께 해서, 너희는 항상 모두가 손잡고 사이좋게 지내야 돼, 그래서 마치 손을 떼면 죽는 것처럼 교육시킬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나와 맞는 사람들끼리 재밌게 놀 권리도 있는 거예요. 하지만 타인을 배격해서는 안되고, 그러면서 각자의 자유도 존중되어야 하고. 

퀴어문화축제라는 틀 안에서 다같이 하는 행사들이 있지만, 가령 영화제에서 영화를 선정할 때도 LGBT가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사는 영화만 선정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게이들을 위한 영화도 있고 레즈비언을 초점에 둔 영화도 있고. 다만 그것만 되면 돼요. 게이들이 테마인 영화이기 때문에 레즈비언은 관람이 안된다고만 하지 않으면 돼요. 게이의 삶에 대해서도 함께 하고 싶고 보고 싶은 사람들은 레즈비언도 와서 볼 수 있고, 레즈비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게이들이 함께 와서 손잡고 볼 수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파티가, 모두의 유흥문화가 말씀하셨다시피 워낙 다르고, 함께 하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이걸 모두가 용인할 수 있는 범위로 축소시키면 결국 아무도 안 오는 재미없는 파티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느니 사실은 각자의 영역에서, 감성의 코드가 좀더 어느 쪽에 맞춰지느냐에 따라 파티의 종류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고, 이들 종류 중에 자신의 감성에 맞는 파티를 찾아갈 수 있게끔 분화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죠. 

가령 청소년들이 들어올 수 있는 파티도 한다거나. 사실 LGBT가 모두 함께 하는 것보다 더 우리가 고민되었던 부분은 청소년들은 왜 파티에 못 오게 하느냐는 문제제기였어요. 그럼 술없는 파티를 해야 하느냐, 거기서 더 나가서 청소년에게 술을 팔지 않는 것도 청소년 차별이라고 항상 주장했었어요. 그건 현행법상 불법이기 때문에, 수용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죠.

▲ SPIKE 공연 : 2016년 퀴어문화축제 공식 파티 PRIVATE BEACH, 2016.6.12. @세빛섬

4. PRIVATE BEACH 기획팀 퇴진과 성소수자 유흥문화의 미래

터울 : 저도 나름대로는 그날만큼은 성별 입장을 제한하지 않되 게이 파티와 레즈비언 파티가 다 여는 게 가장 이상적인 것 같긴 하거든요. 그런데 어쨌든 한데 모아서 했던 파티들의 시도가 귀중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아요. 길이 남겨지고 곱씹어져야 할 어떤 것인 것 같고요.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유흥문화가 다른 부분이, 결정적으로 게이 클럽의 여성 입장료 차등과 레즈비언 클럽의 남성 입장불가 정책과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게이가 입장 가능한 ‘핑크’라는 레즈비언 클럽이 지난 달까지 운영되었는데 지금은 닫은 상태라고 들었어요. 어쩄든 현실이 그러한 부분이 있는데, 작년 PRIVATE BEACH 파티팀의 불명예 퇴진 사태도 게이 클럽 PULSE 측에서 기존의 입장료 차등 정책을 잠시 고수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잖아요. 

이든 : 내 입으로 이걸 다시 얘기하기가 참 괴롭네요. (웃음) 

터울 : 제가 듣기로 처음부터 기획방침에 오류가 있었다기보다는, 클럽과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라고 들었거든요.

이든 : 네, 항상 운영하고 있는 클럽을 대관해서 진행할 때는, 12시까지의 입장에 대해서만, 왜냐하면 보통 클럽은 12시부터 오픈이고, 퀴어문화축제는 7-8시면 끝나니까 파티를 일찍 시작해서 입장 진행을 하고, 12시부터는 원래 클럽이 운영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방식으로 운영되거든요. 그래서 저번에서 그렇게 됐었던 상황에서, 입장 부스에 있었던 저희 쪽 인원이 빠지고 클럽측 직원이 왔는데, 그날 축제에 대해 전혀 전달받지 못한 직원이 카운터를 잠깐 봤었나봐요. 그 직원이 머물렀던 기간이 40분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그 시간 동안 여성에게 5만원을 받던 기존의 입장료 정책을 그대로 통보한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저희가 파티 시간에 대한 공지를 따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12시 넘어서도 파티를 계속 한다고 생각하고 오신 분들이, PULSE에 오셨다가 입장료를 보고 PRIVATE BEACH에서 5만원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셔서 일어난 일이었죠.

터울 : 이게 실수인데, 물론 하면 안되는 실수이긴 하지만, 그게 기획의 근본적인 문제로 비화되는 과정이 안타깝기도 했고, 그 일이 풀리는 과정에서 많은 게이들이 댓글을 보고 상처받기도 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이든 : 마음 아프지만, LGBT를 모두 하나로 아우르는 그런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노력했었고, 몇 년 간 그런 행사를 만들어 왔는데, 양쪽의 감정의 골을 훨씬 깊게 만든 결과를 초래한 건 아닌가 걱정되기는 해요.

터울 : 그게 그 행사 때문에 그렇게 됐다기보다는 원래부터 잠복해있었던 것들이 타이밍 나쁘게 터져나왔던 거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이런 경험이나 그 속에서의 이상들이 계승으로든 반면교사로든 남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너무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든 : 감사합니다. 파티팀 불명예 퇴진에 대해서 한 마디만 더 말씀드리면, 4년을 퀴어문화축제에 있으면서 의욕적으로 여러 시도를 많이 했었어요. 퀴어문화축제 조직위 내 오래 활동하신 분들은 거의 1회서부터 십몇 년간 퀴어문화축제를 만들고 함께 해온 사람들인데, 저는 굴러온 돌이잖아요. 그런 굴러들어온 돌이 갑자기 퀴어문화축제에 대해서 이런 걸 해보겠다고 하는데, ‘넌 뭐야?’ 이런 반응이 아니고 정말로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서 저렇게 새로운 시도를 해보겠다니 우리 모두 밀어줘보자, 이런 생각이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제가 어떤 위치에 있든 저는 평생 퀴어문화축제를 돕기 위해 어떤 분야에서든 노력을 할 건데, 

퇴진 당시에는 사실은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퇴진이라도 하지 않으면, 왜냐하면 제가 그 때 사과문을 세번을 올렸는데, 두번째 사과문이 너무 짧다, 사과를 이 따위로 할 거냐-라는 댓글이, 퀴어문화축제 페이스북을 만든 이래 모든 댓글의 개수를 합친 것보다 그 때 댓글이 더 많이 달렸었거든요. 그래서 뭔가 이걸 수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책임을 지고, 비겁한 것 같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파티팀 기획단장직을 사퇴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때 제가 좀 안타까웠던 건, 제가 개인적으로 썼던 글에도 남기긴 했는데, 기획단장직을 사퇴한다고 하니까 놀랍게도 갑자기 모든 악플이 사라졌었어요. 적어도 그 글에 대고 악플을 다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어요. 이렇게 되어서 안타깝다, 그래도 마무리는 잘 하자, 이런 분위기였는데, 

이런 일이 있을 때... LGBT 커뮤니티에서 게이와 레즈비언 간의 반목 같은 것도 되게 많았었고, 그런데 제가 게이들한테는 네가 공부가 부족해서 그렇다, 네 습관이 일정하게 잘못된 거다, 이러면서 야단치는 쪽이었지만, 반대쪽 진영, 주로 여성·레즈비언 쪽 진영에서는 게이들의 행태에 대해 이해 못하겠다고 하면서 사과하라고, 성명문 내시던 분들이 계셨어요. 제가 이쪽 진영을 설득하는 논리는 뭐였냐면, 몰라서 그런다, 시간을 좀 주고 가르쳐주면 된다-는 거였어요. 비난하고 성명서 발표하고 대자보 붙이고 강제 사과시키고 이렇게 해서 해결을 하려면, 이 사람들이 아예 적이면 모르겠는데, 아예 보는 방향이 반대인, 적어도 박사모에서 나온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왜 싸우게 되나면, 같은 곳을 가다보니까 좁은 길에서 부딪치니까 싸우는 거예요. 아예 다른 길을 가고 있으면, 반대쪽 방향 가는 사람은 사실 어딜 가든지 관심도 없어요. 그러니까 정의당이랑 자유한국당 당원이랑은 오히려 안 싸워요. 민주당과 정의당 당원이 싸우는 거죠. 같은 길을 가다보니까 길도 좁고, 여기서 가야 할 바가 여기다, 저기다, 이것 가지고 싸우는 건데, 

가령 굳이 내가 게이들을 축제에 안 데리고 들어왔으면 그들이 서로 싸울 일이 없었겠죠. 그런데 그나마 게이씬에서 가장 인권에 대해 관심이 있고, LGBT가 모두 함께 해서 뭔가를 이뤄본다는 것에 대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는데, 이 사람들이 어떤 여성인권이나 젠더감수성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는 사람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인권감수성이 엄청 뛰어나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 되게 예민한 어휘를 가지고, 무슨 말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고 태어나는 건 아니거든요. 그건 후에 학습되어야지 아는 건데, 

그 당시에 제가 들었던 가슴아픈 비난들은, 그렇게 학습되지도 않은, 준비되지도 않은 사람들을 퀴어문화축제에 끌고 들어온 이든이 문제다-라는 거였어요. 그럼 퀴어문화축제에 그렇게 꼭 모든 게 준비된 사람만 합류해야 마땅한 건가-라는 의문이 드는 거예요. 지금 올해도 일할 사람들이 없어서 있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판인데, 너무 까다로운 자격을 요구하는 거죠. 진짜 관심이 있고 도울 마음이 있다면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데, 이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더니 이런 부분에 있어서 교육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축제의 일원으로 데리고 왔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었어요. 저는 제가 잘했다는 게 아니라, 기다려줄 수도 있고, 잘못된 건 가르쳐줄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만 더 애정어린 시선으로, 아직 어설프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줄 수는 없을까.

그건 나이랑도 상관없어요. 우리 그런 말 있잖아요. 이쪽 사회에서도, 나이가 40이어도 그 때 데뷔하면 그 때의 1년차는, 20살 때 데뷔한 1년차랑 똑같은 짓을 반복하게 돼요. 처음에 나오자마자 인맥 늘리고 싶어서 이 사람 저 사람 번호 따고, 페북 친구 맺고 해서, 제일 부러운 건 이태원 나갔는데 여기저기 다 아는 사람들이 있으면 너무 부럽고 한 거죠. 제 주변에 40살에 나온 형이 있는데, 그 형이 그러고 다니거든요, 요새. 그러니까 인권 관련된 쪽에서 좀 아쉬웠던 건, 그쪽 관련돼서 일을 하는 사람들만 계속 일하게 돼요. 왜냐하면 처음 굴러들어온 돌한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좋은 뜻을 갖고 들어왔어도, 일반 게이커뮤니티에서 하던 언어 습관이나 행동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바로 비난이 뒤따르게 되니까, 그런 게 많이 아쉬웠어요. 

이 사태도, 그 당시에 제가 사퇴를 했지만, 저는 이게 제가 궁극적으로 책임을 진 거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결국 책임을 진 게 됐어요. 사퇴로서 사태를 마무리했는데, 기획단장을 사퇴한다는 건 저한테 너무나 즐거운 일이거든요. 정말 하기 싫었거든요, 너무 힘들었고,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사실은 저를 가장 괴롭게 만든 일이었는데, 이런 일을 통해서 이 사람 내보내고, 파티팀을 다 퇴출시켰으니까, 이제 문제 일으킨 사람을 깨끗이 정리했으니까 퀴어문화축제가 훨씬 건전하고 올바르게 됐느냐, 아닌 거예요. 다시 조직위에 게이가 거의 없는 예전 상황으로 돌아갔고, 인력은 훨씬 더 부족해졌고, 파티팀이 없어짐으로써 퀴어문화축제는 훨씬 더 힘들어졌죠. 그런데 그 힘들어진 부분은 누가 과연 대신 채워줄 것인가. 

그 때 충분히 제가 이 상황에 대해 설명했었기 때문에, 의도적인 게 아니었다는 해명에 사람들이 좀더 기다려주고, 좀더 건설적인 비판이 오갔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비판을 하더라도 거의 뒤가 없는 언변으로 비판이 나오다보니까, 입지가 많이 좀 힘들었죠. 

터울 : 말씀하시면서 퀴어문화축제와 성소수자와 게이커뮤니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저도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젠더 감수성 되게 중요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 되게 중요한데, 온라인으로 오갈 수 있는 비판과, 오프라인에서 실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일은, 조금 질적으로 차등이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 사건에 대한 호불호나 평가를 제하고, 파티팀을 하시면서 창조하고 만들어오셨던 사회의 영역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고, 그게 어디로 가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록으로 후세에 남길 필요도 있고요.

이든 : 제가 안하더라도 누군가가 또 다른 그런 영역의 일을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랬을 때 0에서 시작하지는 않지 않을까요, 그래도. 해봤던 경험이 있으니까. 제가 데리고 와서 3년간 고생만 시켰던 Jay Lee를 비롯한 그 당시 파티팀 식구들에게 그냥 되게 미안해요. 좋은 기억이 되었으면, 뿌듯하고 가슴벅찬 기억이 되었으면 해서 그 친구들을 데리고 온 건데, 마음 속에 하나의 상처를 남겨준 게 되어서. 

터울 : 그러니까 그 사과문보다, 그 파티에서 촬영되었던 사진과 거기에 담긴 경험과 성취의 부피가 훨씬 큰 것 같아요. 참여하셨던 분들이 그렇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네요.

▲ SPIKE 공연 : 제3회 RED PARTY, 2015.12.6. @S-cube, 이태원
▲ SPIKE 공연 : 2015년 퀴어문화축제 공식 파티 PRIVATE BEACH, 2015.6.14. @S-cube, 이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