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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5월 18일 12시 10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5월 18일 12시 10분 KST

빼앗긴 자유, 버림받은 자유

huffpost

폴 엘뤼아르는 ‘자유’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 자유여”라고. 그에게 가슴 벅차게 다가온 자유, 그것이 우리 내면에서도 공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유를 빼앗겼다. 우리의 비극은 자유를 오랜 동안 빼앗겼는데 그 의미가 훼손된 탓에 우리 또한 자유를 외면한 채 되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자유가 우리를 배반했다면 우리 또한 자유를 버린 것이다. 최근 사회 각계에서 고발되고 있는 성폭행을 비롯하여 힘센 자들, 가진 자들의 ‘갑질’ 행태는 지금 드러나고 있긴 하지만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자유’가 그 찬란한 의미와 함께 사라졌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를 지향하고 자기형성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게 인간이라면, 우리는 먼저 각자 몸이 거하는 곳, 집과 배움터, 일터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나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에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자유가 ‘몸의 자유’, 즉 “당신의 몸은 당신이 지배한다”(habeas corpus)에서 출발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1679년 영국에서 법제화된 인신보호령이 오늘날까지 구속당한 사람이 그 강제행위가 정당한지 여부에 대해 법원이 판단해줄 것을 요청하는 구속적부심의 전거가 되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이 땅은 이 기본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동토였다.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라고 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몸의 자유는커녕 속절없이 죽임을 당했고 수십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 그런데 기막힌 역설은 그렇게 반세기 동안 자유를 잔혹하게 짓밟은 명분이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데 있었다는 점이다.

지난 5월2일 남북정상회담을 ‘위장평화쇼’로 규정한 자신을 규탄하는 민중당 당원들의 피켓시위를 보고 “창원에 여기 빨갱이들이 많다”고 발언한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는 더 일찍 태어나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8월13일치 <동아일보>는 당시 남한을 지배했던 미 군정청의 여론국이 38선 이남 주민 84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는데, 문항 중 “귀하는 어느 것을 찬성합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분포는 다음과 같았다. ㈎ 자본주의 1189인(14%) ㈏ 사회주의 6037인(70%) ㈐ 공산주의 574인(7%) ㈑ 모릅니다 653인(8%).(김기협, <해방일기> 4권, 435쪽)

당시 38선 이남의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주의에 관해 잘 알고 있어서 70%가 찬성한다고 응답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막연하게나마 평등의 가치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사회주의에서 찾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났고 아직 새로운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교육과 언론을 통해 관철되기 이전이기에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가 온전히 적용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그 의식들은 용납될 수 없었고 ‘킬링 필드’는 예정되어 있었다. 국가의 물리력을 장악한 지배세력은 ‘공산세계’의 대립물로 절대 긍정화한 ‘자유세계’라는 ‘상상의 공동체’의 허구 위에서 비판세력을 친북좌경, 빨갱이로 몰아 제거하면서 기득권을 유지 강화해왔다. 그리하여 이승만의 자유당에 담겼고 박정희, 전두환을 거쳐 오늘의 자유한국당에 계속 남아 있는 자유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세 슬로건 중 하나인 “자유는 예속”보다 더 심한 반어에 속했다. ‘예속’이 당하는 자의 수동적 표현이라면, 그들의 자유는 ‘억압’을 위한 능동적 기제였다.

그렇게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빼앗긴 우리는 우리를 배반한 자유를 말하기조차 기피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위에 소개한 엘뤼아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한국의 한 시인이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를 외치는 대신 ‘민주주의’를 호명했던 것은.

우리가 자유를 외면한 것은 산업화 과정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자유세계’의 학살하고 고문하는 자유가 노동을 탄압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자유방임주의, 신자유주의의 자유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가령 박근혜에게 모든 규제가 ‘암덩어리’이고 ‘쳐부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가진 자들에게 사유재산의 무한 자유, 이윤추구의 무한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었으니, 우리는 다시 공공성, 공익, 공개념과 충돌하는 그 자유와 맞서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속 민주화를 말할 뿐 자유를 말하지 않게 되었다. 민주화 담론을 경시하자는 게 아니라 자유의 가치를 지나치게 등한시하고 있다는 점을, 자유로운 주체로 구성되지 않는 사회 민주화란 빈 허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멀리하게 되면서 사회 민주화를 통해 자유로운 시민을 형성한다는, 에둘러 가는 길을 택한 것인지 모른다.

시민사회운동에서도 자유는 민주, 정의나 평등에 비해 가장 먼 언어였고 운동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주체화조차 조직 보위에 비해 후순위로 밀려났다. 그 어디에서도 “싸우는 과정 자체가 그 싸움을 통해 획득하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나오미 울프의 말은 적용되지 않았다. 노동조합조차 대부분의 조합원은 주체이기보다는 동원 대상이었고 조직의 우산 아래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는 수혜자에 머물렀다.

그러나 강조하건대 자유의 가치는 우리가 계속 외면해도 될 만큼 하찮은 게 아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남북관계 반전의 전망 앞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자유의 참뜻을 되새기고 되찾아야 한다. 근대 공화국의 보편적 개념 규정이 “자유로운 시민들이(주체), 공익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로서(목표),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수단) 국가”라고 할 때, ‘자유로운 시민들’이 대한민국의 주체로 서 있느냐는 질문이 가장 먼저 제기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나의 자유가 존중될 때 남의 자유도 존중하게 된다고 할 때, 우선 “당신의 몸은 당신이 지배한다”는 명제가 우리 몸이 거하는 모든 곳에서 살아 꿈틀대도록 해야 한다.

‘미투 운동’이 더욱 확산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배움터인 각급 학교에서 시민교육과 노동인권교육을 강화해야 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삼성반도체에서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황유미씨들, 서지현 검사들, 오늘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시위에 나선 대한항공 노동자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아닌 힘센 자, 가진 자가 그들의 몸을 지배했고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멈춰야 한다. 배움터에서는 무한경쟁에 시달리고, 일터에서 당한 ‘갑질’을 자신보다 약한 ‘병’이나 ‘정’에게 ‘을질’을 하거나 가족에게 푸는 걸 멈춰야 한다. 모든 구성원들이 파편화되어 차별에 찬성하면서 가슴속에 화를 품고 살아가는 사회, 가진 자, 힘센 자의 폭력에 맞서기보다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회에 우리가 오랜 동안 빼앗겼고 버렸던 자유의 깃발로 맞서야 하는 것이다.

각 개인의 자유로운 주체화와 사회 민주화는 ‘줄탁동시’의 ‘줄탁’의 관계라 할 수 있다. 병아리가 알 밖으로 나오기 위해 부리로 껍데기 안쪽을 쪼는 것이 ‘줄’이고, 어미 닭이 바깥에서 알을 쪼아 새끼의 부화를 도와주는 것이 ‘탁’이라고 할 때, 개인의 주체화는 ‘줄’, 사회 민주화는 ‘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병아리가 껍데기 안쪽을 쪼는 ‘줄’이 어미 닭의 ‘탁’에 우선한다는 점을 구태여 덧붙인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