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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운이 좋은 편이에요" 라디오 방송 작가에서 페미니즘 전문 번역가로, '경력단절 여성' 노지양의 이야기

'나쁜 페미니스트' '처음 만나는 페미니즘' '헝거' 등을 번역했다.

노지양 번역가.
노지양 번역가. ⓒ한겨레/이미경 자유기고가

노지양 번역가는 말맛을 잘 살리는 영어 번역으로 이름이 높다. ‘번역가를 찾아서’ 지면을 빌려 그를 꼭 한번 만나보라고 권한 한 중견 번역가는 “노지양 번역가가 옮긴 문장은 간결하고 리듬감이 있어 술술 읽히고 특히 저자의 위트가 잘 살아 있다”고 했다. 올해로 18년차 번역가인 그가 어른책과 어린이책 번역을 꾸준히 함께해온 비결이기도 하다. 랩인 듯 노래인 듯 ‘라임’을 맞추고 적절하고 실감나는 의성어와 의태어를 한껏 동원해야 하는 어린이책 번역은 어른책과는 또 다른 전문영역이라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

말맛 글맛 남다른 그의 번역 실력은 타고난 재능과 남다른 독서량 덕분이겠으나, 첫 생업이 ‘말’을 다루는 일이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연세대 영문과 재학시절 ‘영어’에 관심 있는 대부분의 학과 동기들과 달리 ‘영문학’의 세계에 매료됐던 그는 졸업 뒤 외환위기 속 유례없는 취업난을 뚫고 라디오 방송 작가가 되었다. 오랜 꿈인 ‘글쓰기’를 향한 야심찬 행보였다. 그러나 출산·육아휴직이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직이었던 만큼 아이를 낳고 작가로 복귀할 길이 요원했고, 결국 한국 고학력 기혼여성의 흔한 이력인 ‘경단녀(경력단절여성)’의 길로 꺾어들었다. 다행히 오랜 단절은 아니었다. 아이가 좀 크자 기저귀를 떨치고 분연히 일어난 그가 번역가 양성과정을 이수하고 전업 번역가로 나선 것이다!

“시어머니께 아이를 맡기고 작업실에 나가 아침부터 밤까지 번역에 매달렸어요. 그렇게 2년쯤 지나니 번역의뢰가 꾸준히 들어오고 어린이책을 포함해 연평균 10권가량을 안정적으로 작업할 수 있게 됐지요. 아이 어릴 때 육아를 도와주신 시어머니가 계셨으니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에요. 제 또래 번역가 중에는 ‘경단녀’였다가 전업한 분들이 꽤 많은데, 일하고 아이 키우면서 살림까지…, 어휴.”

2015년, 노지양 번역가는 록산 게이의 책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를 만나 번역 인생의 대전환기를 맞았다. 강남역 10번 출구 성폭력 반대집회를 시작으로 국내에 페미니즘 열풍이 불고 출판계가 앞다퉈 관련 책을 펴내기 시작했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초반 이런 흐름을 선도하며 큰 관심을 받았고, 그는 이후 <여자라는 문제>(책세상, 2017), <여자들의 사회>(알마, 2017), <처음 만나는 페미니즘>(교양인, 2018), <헝거>(사이행성, 2018), <트릭 미러>(생각의힘, 2021) 등 관련 책 10여 권을 잇따라 내놓으며 ‘페미니즘 책 전문 번역가’로 알려지기에 이른다.

“살면서 계속 뭔가 이상하다, 잘못됐다고 느끼긴 했죠. 그런데 록산 게이나 지아 톨렌티노, 리베카 솔닛과 같은 세계적인 페미니스트들의 책을 읽고 번역하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알게 됐고,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어요.(웃음) 당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놓고 각기 다른 세대와 입장을 가진 페미니스트들이 모인 토론의 장 한가운데,또는 세상을 바꿀 칼날 같은 논쟁의 최전선에 선 느낌이랄까요.”

번역 인생의 대전환기는 작가 인생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페미니스트들의 솔직한 글쓰기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고, “주류에서 소외됐던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한 노지양 번역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에세이 <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북라이프, 2018)를 쓴 것이다. 2021년에는 두 번째 에세이 <오늘의 리듬>(현암사)을 펴냈다.

“제겐 늘 두 가지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지적 욕구와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창작 욕구. 그런데 책을 한 권 번역하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과 같고, 번역은 ‘방어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으니 번역가는 그 두 가지를 절묘하게 충족시켜주는 직업이었고 그래서 이 일이 좋았고요. 다만, 너무 대단한 분들의 좋은 글을 번역하다 보니, ‘내가 감히 무슨 글을 써’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페미니즘 책을 번역하면서 스스로 그런 벽을 부술 수 있게 됐죠. 저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좀 창피해져도 괜찮다는 배짱이 생긴 거죠. 홍대에서 고양이 기르는 20대 비혼 여성들의 목소리도 중요하고, 과천에서 딸 키우는 중년 기혼 여성의 목소리도 중요하다, 그런 마음으로 썼어요.”

이 참에 번역가로서도 목소리 한번 내달라고 하니 “10여 년째 번역료가 제자리걸음이고 신규 인력도 유입되지 않아 중견 번역가들이 ‘번아웃’ 상태”라며 “번역가 처우개선이 시급하다”고 했다. 노지양 번역가는 절친이자 동료인 홍한별 번역가와 함께 쓴 에세이 출간을 앞두고 있고, 영어에 관한 에세이도 기획 중이다. 그의 말맛 나는 번역과 진심 어린 글이 벌써 궁금하다.

과천/글·사진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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