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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6월 30일 18시 03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6월 30일 18시 03분 KST

분위기 깨는 자의 선언

stockvisual via Getty Images
huffpost

스마트폰에 카메라 앱을 깔았다. 셀카를 찍어보니 소문대로 신통했다. 주름 제거, 미백은 기본에 눈동자가 크고 또렷해졌다. 메이크업 기능이 내장된 듯 칙칙한 얼굴이 지중해 햇살 받은 해사한 분위기로 변모했다. 흡족함도 잠시, 곧 도덕 감정이 올라왔다. 이건 속임수이며 나 아닌 거 같다고 했더니 누군가 말했다. 오렌지 과즙 3%만 들어가도 오렌지주스라고 하는데 본래 얼굴 3%만 있으면 자기 얼굴 맞는다고.

나의 죄책감은 더 근원적인 부분에 닿아 있다. 일회용컵 사용을 줄이듯 외모에 대한 언급을 자중하고 싶었다.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일주일 살아보기’가 오랜 목표다. 이 슬로건은 2016년도에 여성민우회에서 진행한 캠페인으로 꾸밈 노동을 강요하고 외모중심주의를 부추기는 세태에 맞서는 실천으로 제시됐다.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기는 단 하루도 성공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인사말부터 시작이다. “어쩜 그대로냐~” “살 빠졌다!” 외출을 안 하는 날엔 거울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배가 나왔네, 잡티가 생겼네, 라며 제 몸의 감시자를 자처했다. 내 몸은 세월과 경험이 만든 고유한 신체 표현인데도 일단 못마땅하게 본다. 무의식 중에 마른 몸, 희고 갸름한 얼굴이라는 미의 획일적 기준을 잣대 삼아 남을 보고, 남을 보는 눈으로 나도 보는 것이다.

이런 시선의 관습적 경로가 만들어진 역사는 길다. 인간생활의 기본조건을 의식주라고 하는데, 집도 밥도 아닌 옷이 왜 일순위인지 늘 궁금했다. 입성을 중시하는 체면 문화의 반영 같다. 그리고 외모지상주의의 피해는 여성,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쏠린다. 딸들은 연중 다이어트다. 살만 빼면 예쁠 거란 말을 엄마에게서부터 듣고 자란다. 항공사에는 여자 승무원이 못생겼다는 민원도 들어온다고 한다.

일전에는 버스에서 결혼식장 근처 정류장 안내 방송에 이비인후과 광고가 나왔다. “결혼식에서 콧물 흘리는 신부 본 적 있나요? 어서 비염을 치료하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콧물까지 성별로 간섭하는 게 몹시 거슬렸다. 여성의 질병은 개별적 고통에 사회적 비난까지 이중 처벌이 내려진다. 그뿐인가. 뚱뚱한 몸, 뒤틀린 몸, 노쇠한 몸은 곧 추한 몸으로 간주돼 모욕, 배제, 차별에 쉬이 노출된다.

외모 평가는 걱정도 덕담도 아니다. 무비판적 습관이다. 보여지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읽어내고 표현하는 능력이 인간 종 전체적으로 감퇴하고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는 ‘카메라 앱’도 바람직하지 않은 장난감이다. 셀카 놀이가 ‘기분 전환’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미의 표준화된 각본에 유희하는 사소한 행동이 외모 위계의 ‘의식 고착’에 기여하는지도 모른다.

젊은 여성들 중심의 탈코르셋 운동이 반가운 이유다. 하이힐, 브래지어, 풀 메이크업, 긴 머리가 꾸밈의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외모 품평이 아닌 품평 행위 자체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 게 훨씬 성숙한 풍경이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저자 사라 아메드는 “모욕을 유발하는 농담에 웃지 않을 작정”이라며 “하지 않고 되지 않으려는 자의 선언문”을 썼다. 일명 ‘분위기 깨는 자의 선언’이다. 제목이 딱이다. 개성 있는 몸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하려면, 지금의 획일적 분위기가 깨져야 한다. 극소수가 외모-매력 자본을 독점하고, 대다수는 자기 자신을 미달된 몸으로 보는 현상, 순도 97% 얼굴을 왠지 떳떳하지 못하게 여기는 문화는 이상하고 불행하니까.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