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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그의 시비곡직을 가리자

ⓒhuffpost

한 시대를 주름잡던 김종필씨가 9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일부 언론 보도는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조명하면서 긍정적인 데 방점을 찍는다.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엄정하지 못하면 어두운 역사는 되풀이된다. 고인이 되면 악행은 덮고 선행은 추기는 것이 동양적인 미덕처럼 돼 있지만, 그것은 공정한 역사 서술도 정확한 언론의 책무도 아니다. 사필은 정사곡직을 가리고 언론은 시비선악을 판별해야 역사가 바로 간다. 김종필씨의 죽음을 맞아 쿠데타 후예 측은 산업화에, 그의 지원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측은 민주화에 기여한 것처럼 인식한다. 둘 다 정치공학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누가 뭐래도 고인의 죄상은 박정희와 함께 5·16 쿠데타를 주동한 반란행위다. 민주공화제를 군사력으로 뒤엎은 것은 엄연한 반란이다. 5·16으로 인해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30여년의 군사통치와 이명박·박근혜로 계승되는 9년의 폭압통치가 지속되었다. 우리 현대사를 온통 질곡에 빠뜨린 원초적 지점이 바로 5·16이다. 고인은 5·16 후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정보정치의 원부를 만들었다. 일제의 악질경찰·헌병·밀정 수백명을 중정 요원으로 채용해 고문과 4대 의혹사건 등 부패의 온상으로 삼았다.

미국이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을 때 박정희와 김종필은 엄청난 인명 살상을 준비했다고 한다. 쿠데타 주역의 하나인 유원식의 증언이다. “박정희 부의장실에 들어갔을 때 마침 김종필이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박 부의장에게 ’어젯밤에 모두 잡아넣었습니다. 약 2만8000명가량 되는데 수송에 필요한 열차도 준비했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들을 거제도로 데려가서 한데 모아놓고 기관총으로 한꺼번에 사살해버리는 것뿐입니다.”(유원식, <5·16 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

유원식이 그 후에 알아보니 김종필씨가 당시 정보과장으로 있던 방아무개 대령에게 극비 지시해 전국에서 요시찰인 명부에 실려 있는 인사들을 모조리 검거했는데, 그의 아침 보고는 사후 대책까지 마련했다는 일종의 결과 보고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쿠데타 승인을 받으려는 목적이었다. 이 음모는 실행되지 않았으나 계획 자체가 용납하기 어렵다. 진상규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고인은 3선개헌을 반대하다가 돌아섰고, 유신 쿠데타를 지지하는 등 민주공화제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부적격한 행로를 걸었다. 6월항쟁 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민주개혁이 시도될 때 노태우·김영삼과 손잡고 다시 반개혁 민자당 창당에 참여하여 역사의 퇴행에 공조하였다. 고인의 역할이 그나마 민주화에 기여했다면 김대중과 손잡고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대목일 것이다. 놀라운 변신이었다. 이마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의 몫이 줄어들자 거침없이 박차고 나갔다. 국민의 정부는 휘청거렸고 민주화와 햇볕정책은 동력을 잃었다.

고인은 정치적으로 풍운아의 삶을 살고, 시·서·화에 아코디언을 즐기는 등 대단히 다재다능한 소양을 보였다. 때로는 권력의 2인자로, 해외를 떠도는 낭인으로, 원내 최다선 원로로, 지역당의 맹주로, 보수세력의 대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박정희에게 버림받고 새까만 후배 전두환에게 구속되는 수모를 당하는 등 핍박의 기간도 있었지만, 30대 중반에 쿠데타를 일으켜 반세기 동안 온갖 권부를 누렸다.
역사가 바뀔 뻔한 순간도 있었다. 하극상 사건으로 군에서 예편된 김종필은 장준하를 찾아 진보적 잡지사인 ‘사상계’를 방문했다. 사장 장준하가 부재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둘이 만나 사상계사 직원이 되었다면 5·16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고인은 얼마 후 쿠데타를 비판한 함석헌을 ‘정신분열증 노인’이라 비난하고 장준하를 불러 권총을 꺼내들고 호통쳤다.

이제 김종필씨는 고인이 되었다. 싫든 좋든 우리 현대사에 굵은 족적을 남겼다. 평가는 공정해야 한다. 지엽말절을 보고 전체를 무시하거나 한두 가지 미담을 두고 악행을 덮어서는 안 된다. 저승에서는 평안하시길, 고인의 명복을 빈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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