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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 그렇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됐다

  • 민용준
  • 입력 2018.08.03 11:49
  • 수정 2018.08.03 12:01
ⓒhuffpost

2009년에 열린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공기인형>으로 영화제에 초청된 상황이었다. 30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 주어졌고 통역까지 거쳐야 하는 인터뷰였던 탓에 많은 질문을 할 수는 없었지만 영화를 연출한 감독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얻는 시간은 언제나 귀하고 중한 법이다. 자기 철학이 명확하고 자신만의 세계가 흐른다는 인상을 주는 감독과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더더욱 그렇다. 그와 나눈 대화 중에서 그의 시선을 대변하는 언어일 것이라고 기억하는 문장이 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의 시간이나 공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보여주고 싶다”고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끝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일상의 빛나는 순간’이라고도 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어느 가족>을 보고 나서 그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이 작품이야말로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일상의 빛나는 순간’ 가운데서도 절정으로 기억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자 관계로 추정되는 중년 남자와 어린 소년이 마트에 들어선다.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와 소년은 무언가를 다짐하듯 서로의 주먹을 맞부딪치고 각자의 길로 돌아선다. 그리고 곧 남자가 수신호를 보내자 소년은 양 손가락을 맞붙인 채 검지손가락만 떼어 허공에 몇 바퀴 돌린 뒤 손등을 들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 물건을 집어 들어 자연스럽게 가방에 넣는다. 자연스럽고 능숙하며 대범하다. 능청스럽게 손님인 척 위장하며 직원의 시선을 가려 소년이 손쉽게 물건을 훔치도록 돕는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목적을 달성한 남자와 소년이 사라진 마트의 풍경 위로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이 떠오른다. <어느 가족>의 일본어 원제는 ‘만비키 가족(万引き家族)’이다. ‘만비키’는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는 척하면서 도둑질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단어다. <어느 가족>은 좀도둑질을 하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가족’의 구성원은 할머니와 두 여자 그리고 한 남자와 소년이다. 그들에게 도둑질이란 마트에서 물건을 사 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훔쳐 온 식료품을 함께 나눠 먹고, 간혹 필요한 생필품을 훔쳐달라 주문하기도 한다. 언제부터 그런 삶의 방식을 공유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오늘 일은 아닌 것 같다. 가족들은 어린 소년에게 도둑질을 주문하면서도 딱히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소년에게도 된특별히 불편한 일이 아니다. 간혹 도둑질이라는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긴 하지만 가족을 향한 책망으로 번지지 않는다. 어차피 나머지 가족들도 각자의 일을 하고 있다. 남자는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고, 여자는 세탁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그보다 어린 여자는 유사 성행위 업소로 출근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는다. 낡고 비좁지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도 할머니 소유다. 다들 나름대로 경제활동을 하거나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있다. 소년은 도둑질을 한다. 소년에게도 자신의 역할이 필요하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소년이 이해하는 가족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소년에게 가족이란 혈연으로 이어진 운명이 아니라 우연한 선택을 통해 결속된 집단에 가깝다. 

흥미로운 건 <어느 가족>이 플래시백을 동원하지 않고도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과거를 유추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외도한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자식과 왕래가 끊어진 지 오래인 노인과 폭력을 부리는 남편에게 시달리다 끝내 살해하게 된 여자, 그런 여자의 살인을 돕고 연인이 돼서 함께 살아가는 남자, 두 달 동안 실종된 딸을 찾지 않는 부모, 윤택한 가정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위장한 채 살아가는 여자, 그리고 자신을 낳은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관심이 없는 아이 등, 가족으로 위장한 채 살아가는 여섯 식구의 심연에 봉인된 과거의 상흔들이 언뜻언뜻 대화를 통해 구술되거나 정황을 통해 유추하게 만든다. 직접적인 이미지로 제시하지 않아 선명하진 않지만 저마다의 심연 속에 박제된 불운한 과거가 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작은 공동체가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이 선택한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함께 살게 된 이유를.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다. 자신들이 함께 살게 된 이유를. 결국 타인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사연. 관객 역시 그들의 타인이다. 영화가 그들의 사연을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건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어느 가족>은 가족이 아니었던 타인들이 유사 가족 형태로 모여 살아가는 일상을 주시함으로써 우리가 상식적이라 믿어온 가족이라는 신앙을 해체시킨다. 그들이 어쩌다 함께 모여 살게 됐는지 정확한 연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가족이 서로의 삶을 지탱해주는 마음의 기둥 노릇을 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가난하지만 불행해 보이지 않고, 거창한 꿈이 없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갈등과 불안이 없는 현재를 사는 그들의 웃음 사이로 그들이 견뎌야 했을 어떤 시간들이 무심하게 머리를 들 때, 그들에게 지금의 가족이란 전에 없이 안온하고 평화로운 순간임을 알게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말하는 ‘일상의 빛나는 순간’을 공감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에서 행복과 거리가 먼 풍경 속에 자리한 듯 보이는 인물들의 일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는 순간이 된다는 아이러니. 애초에 가족이 아니었기에 서로에게 마음의 빚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역설. 의무도 없고 책임도 없기 때문에 가족보다 편하게 기댈 수 있는 관계. <어느 가족>은 손쉽게 어긋나는 진심으로 좀처럼 예측할 수 없게 멀어지는 가족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온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끊임없이 전진해 나아간 덕분에 다가설 수 있었던 진실일지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TV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연출 경력을 시작했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사회적 문제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고 찬찬히 지켜보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 특성은 극영화 연출을 시작한 초기작들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극영화 연출 데뷔작인 <환상의 빛>은 미국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의 엄마인 수 클리볼드가 쓴 자전적 고백을 담은 저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디스턴스>에서는 옴 진리교의 테러 사건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기도 했다. <아무도 모른다>는 도쿄에서 벌어진 유아 방치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이다. <하나>는 미국 9·11 테러 이후 증오로 점철되는 시대상에 대한 근심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 이를 통해 단편적인 뉴스로 사건의 결과로만 접하게 되는 사건 속의 사람들과 주변 풍경까지 목격하게 만들고, 이 세계의 이면을 살펴보게 만든다. 사건이 아니라 사건 속에 자리했던 사람의 존재를 인식시킨다. 

<어느 가족> 또한 부모님의 사망진단서를 제출하지 않고 연금을 부정 수급해오다 체포된 어느 가족의 실화를 모티프로 한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이 뉴스를 접한 건 10여 년 전이었다. 당시 그는 <걸어도 걸어도>를 찍고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상실감을 느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사적인 경험이 투영된 작품이다. <걸어도 걸어도> 이전까지의 작품들이 영화 밖 세상에 초점을 맞춰 영화적 소재를 발굴해내는 사회파 감독으로서의 시선이 반영된 작업이었다면 그 이후의 영화들은 사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확장하는 작가적 역량이 본격화된 결과물이었다. 특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사회적인 시선과 개인적인 경험을 충돌시켜 빚어낸 첫 번째 역작이었다. 그는 어린 딸에게서 모성과 부성을 받아들이는 현격한 격차를 느꼈다. 그리고 1970년대 도쿄에서 유아가 뒤바뀐 사건을 접한 뒤 부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만들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연출한 경험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어느 가족>을 연출하는 데 씨앗이 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찍기 전에는 모성은 태생적이고 부성은 후천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영화를 찍고 나서는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다 하여 꼭 모성이 생기는 것은 아닐 거라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결국 모성애에 대한 신화적인 믿음이 여성 입장에서는 압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를 직접 낳지 않고도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상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결국 이러한 사적인 의문이나 깨달음은 10여 년 전에 알게 된 공적인 사건 속으로 이식됐다. <어느 가족>에서 안도 사쿠라가 연기하는 여성이 바로 그런 깨달음에서 추출해낸 캐릭터다. 그는 남편이 데려온 소녀를 친딸처럼 아끼고 돌본다. 소녀에게 진짜 엄마가 될 순 없겠지만 소녀에게 친엄마가 주지 못한 사랑을 주고, 친엄마에게서 받은 상처를 대신 치유해주고자 한다. 모성애라는 관성을 멈춰 세운다. 

<아무도 모른다>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네 아이가 모여 사는 이야기이지만 아이를 버린 부모나 버려진 아이를 방치하는 사회를 악의 축으로 내몰지 않는다. 그저 버려진 아이들을 바라볼 뿐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다운 관찰자 시점의 영화라는 특성으로 이 영화를 설명해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누군가를 악당으로 내모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현상을 주목하되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그 상황에 직면하도록 이끌 뿐이다. 생각해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데뷔작 <환상의 빛> 역시 갑자기 남편이 사라진 아내의 상실감을 살피는 영화였다. 애초에 그는 남겨진 자이 상실감을 안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이야기에 깊 이 감화되는 감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상실감을 관찰하는 데에서 그치던 그의 영화가 치유와 회복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진짜로 일어날 거야 기적>에서는 이혼한 부모로 인해 헤어지게 된 형제가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며 천진난만하게 여행을 떠나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의 세 자매들은 기별이 없는 아버지가 낳은 배다른 동생을 받아들이며 씩씩하게 살아간다. <어느 가족>에서는 가족이라는 집단에서 파편처럼 떨어져나간 이들끼리 함께 연대해 살아가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의 저서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영화감독이 작가인지 장인인지는 아마 감독 스스로도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겠지만, 저는 적어도 영화는 제 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그 사이에서 태어난다고 인식해왔습니다.” 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세계와 소통해왔으며 그 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인식을 통해 새로운 영화를 발견해나갔다는 의미처럼 읽힌다. 실제로 그의 영화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감독의 성장과 성숙을 보여주는 나이테와 같다. 다큐멘터리 관점으로 사건을 목격하듯 극영화를 찍어왔던 그는 점점 사건 속에 자리한 사람들의 내면을 살피기 시작했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주변부에 자리한 이들의 경험과 내면을 사유하며 영화적 세계를 확장해나갔다. 이는 결국 사회적 시선과 개인적 사유가 총합된 인상의 영화로 진화하는 결과에 다다랐다.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지금까지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과 경험한 것을 통해 성장해왔음을 알려주는 최신의 역사이자 최고의 성취인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쩌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질문에 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일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곧잘 잊히는 사람의 존재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관계와 사회와 세계의 내면을 살피는 이야기로 확장된다.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풍경을, 표정을, 마음을 보여주고 살피고 읽는다. 고도화된 문명 속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채 삶을 살아가지만 정작 마음과 마음이 멀어지고 있는 세태의 내면을 되짚게 만든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에 대한 물음을 남기고, 기이하게 방치되는 것을 향해 초점을 맞춘다. 너무 가까워서 서로를 밀어내는 가족의 풍경 앞에 카메라를 두고, 남겨진 자들의 상실감을 누구도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바라보는 시선의 정수이자 그가 지녀온 관심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역작이다. 그는 올해 열린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그렇게 거장이 됐다.  그렇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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