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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꽉 찬 쪽박 할머니 탈출 프로젝트①] '섹스 앤 더 시티' 2.0을 꿈꾼 ‘에밀리, 파리에 가다’가 외면받은 이유

이런 여자 캐릭터 이제 그만.

섹스 앤더 시티 포스터/'에밀리, 파리에 가다' 스틸컷
섹스 앤더 시티 포스터/'에밀리, 파리에 가다' 스틸컷 ⓒHBO/넷플릭스

[옷장 꽉 찬 쪽박 할머니 탈출 프로젝트]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20세기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가 한 말이다. 보부아르는 여자들이 평생 살아가며 추구하는 ‘여성스러움’이 여성을 수동적인 틀에 가둬놓고, 눈요기에 좋은 이등시민으로 머물게 하기 위해 남성들이 사회적으로 만든 허상일 뿐임을 지적했다.

 

그러니까, 여자는 ‘물건‘이기 때문에 어떻게 치장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지며, 그들이 어떻게 꾸미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는 그 사회적 관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여자로 ”만들어지기” 위해 숨을 옥죌 만큼 조이는 불편한 옷과 신발, 화장품에 돈을 써가며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노년의 삶은? ‘여성스러움’도, 경제력도 잃은 채 쓸쓸하게 눈 감게 되겠지.

 

더 이상 허상만 좇다가 ‘옷장 꽉 찬 쪽박 할머니’로 생을 마감하기는 싫어 ‘허프포스트’가 기획했다. 한 번 사는 인생, 인형처럼 사는 대신 멋지고 끝내주게 살고 싶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넷플릭스

섹스 앤 더 시티 2.0을 꿈꿨으나, 보기 좋게 외면 받은 ‘에밀리, 파리에 가다’

 

화려한 대도시 속 파티 라이프, 일도 인간관계도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삶. 1998년부터 방영되며 전세계적 인기를 끈 ‘섹스 앤 더 시티’ 캐리 브래드쇼 이야기다. 각기 다른 삶을 산 캐리와 세 친구들은 현대 여성들의 욕망을 대리만족시켜주며 멋지고 당당한 여성의 표본이자 ‘워너비’ 삶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탄생시킨 제작자 대런 스타는 2020년, 넷플릭스를 통해 다시 한번 시청자를 사로잡기 위한 야심작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공개했다. 

안타깝게도 시즌 2까지 공개된 2022년 현재 ‘에밀리, 파리에 가다‘는 ‘섹스 앤 더 시티’만큼 센세이셔널한 대작이 되진 못할 듯하다. 일도, 사랑도 사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에밀리의 모습은 철부지로만 보인다. 제작진의 감이 떨어졌냐고? 그럴 지도. 하지만 더 큰 원인은 주 타겟층인 여성 시청자들의 가치관 변화에 있다. 여성들은 더 이상 20년 전처럼 아름다움과 사랑의 허상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다.

여성의 삶에서 우선순위는 그동안 참 많이 바뀌었다. 인생에서의 최종 정착지는 더 이상 진실한 사랑과의 만남이 아니다. 여성들은 이제 사랑만이 전부인 것처럼 연인과의 관계에 목매지 않고, 생계를 책임져줄 남성 부양자를 찾는 대신 스스로를 책임진다. 직업적 능력 향상에 아무 도움 되지 않는 치렁치렁한 옷과 뷰티 제품에 돈을 쓰는 대신, 더 전문적으로 보이기를 택했다. 여성들은 이제 캐리처럼 옷, 신발 등의 사치품에 과한 돈을 쓰지도, 지갑 사정을 생각 안 한 채 시도 때도 없이 택시를 타지도, 단순히 클라이언트 남성이 귀엽다는 이유로 성관계를 가지지도 않는다.

제작자 대런 스타는 남성이고,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철저히 남성 중심 시각이 판치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스타의 방식이 통했다. 당시엔 남성은 물론, 여성들까지 남성 중심 시각에 물들어 본인 삶의 방향을 정했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2020년대인 지금, 그의 남성 중심 시각은 더 이상 문화적으로도, 연출적으로도 세련되지 못한 구시대적 접근법에 불과하다. 주 시청자가 여성층인 이 시리즈의 경우엔 그의 단점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관철하고, 에밀리가 말도 안 되는 마케팅으로 성공했다는 등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관한 논란은 공개 직후부터 끊이지 않았지만 오늘 다룰 주제는 단 하나다. 주체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며 ‘우먼 임파워먼트(woman empowerment)‘를 다루고 싶었던 ‘에밀리, 파리에 가다’는 사실 그 정반대의 상황을 연출하며 메시지의 본질을 흐렸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넷플릭스

섹시인가, 섹시스트인가?

 

″여성의 꿈은 모든 남자가 선망하고 탐내는 대상이 되는 것.”

마케팅 회사에 다니는 에밀리의 클라이언트이자 파리 동료들이 한 주장이다. 그들은 이를 근거로 나체의 여성 모델이 남성들의 시선을 받으며 거리를 걷는 향수 광고를 기획한다. 물론 미국의 ‘당찬 걸 보스’ 에밀리는 해당 광고가 ”섹시가 아닌 섹시스트(sexist-성차별적)”이며, ”이게 여자의 꿈인지 남자의 꿈인지” 여부를 되물으며 광고를 반대한다.

바로 직전 화(시즌 1의 2화)에서는 에밀리가 여성 제품 마케팅에 성공하는 일화를 다룬다. 프랑스어로 여성의 생식기를 뜻하는 ‘vagine’ 앞에 쓰이는 관사 ‘le’를 문제삼은 것이다. ‘Le’는 남성형 명사에 붙는 정관사로, 에밀리는 곧바로 ”질은 남성형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트윗을 작성하며 대통령 부인의 리트윗까지 받게 된다(프랑스 단어는 모두 남성형, 여성형으로 나뉘며 둘을 나누는 특별한 기준은 없다). 

이런 사소한 점까지 지나치지 못한 에밀리지만 정작 직장 내 성희롱에 대응하는 그의 태도는 아쉽기만 하다. 광고가 ”섹시가 아닌 섹시스트”라고 주장한 에밀리에게 중년의 남성 클라이언트는 동일 문구를 작성한 쪽지와 함께 란제리 세트를 선물한다. 거절하고 화내야 마땅한 선물을 받은 에밀리는 상사에게 선물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숨기는 쪽을 택한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넷플릭스

남직원들이 에밀리의 문서에 남성 성기 그림을 그렸을 때도 마찬가지다. 에밀리는 불쾌함을 표하는 대신 남성 성기 모양 케이크를 특별 주문해서 그들에게 건네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케이크를 받은 남직원들은 그런 에밀리가 흥미로운지 웃으며 해프닝은 마무리된다. 명백한 성희롱에 대한 통쾌함은 물론, 웃음 포인트도 찾아볼 수 없는 지점이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제작진은 결국 실생활에서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는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회피하고(혹은 이게 성희롱이라는 인지조차 못했던 것일까?) 시즌의 막을 내린다. 성차별적 광고에 ”현시대의 정서를 반영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에밀리인 만큼, 남성 동료들의 성희롱을 그저 장난으로만 포장하고(이것이야말로 구시대적 발상이자 성범죄 가해자들의 흔한 변명이다), 성범죄 피해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미투 물결이 부는 ”현시대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한 제작진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넷플릭스

능력보다 외모 덕에 성공한 것처럼 그려진 에밀리

 

철없는 에밀리가 파리에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 발령이 예정된 여자 상사의 임신 때문이다. 그렇게 능력 있는 상사는 시리즈가 시작된 지 5분 만에 ‘커리어우먼의 삶’을 다룬 여성 서사에서 지워진다. 여성의 흔한 경력 단절 이유인 임신·출산으로 말이다. 

그의 대체자로 선정된 에밀리는 기본적인 프랑스어조차 구사하지 못하고, 패션/뷰티 마케팅 경력 또한 전무한 ‘자격 요건 불충분자’다. 이 무능한 에밀리에게 닥친 시련이라고는 프랑스인 동료들의 무시뿐이다. 업계에 오래 몸담은 경력자이자 업무 능력 또한 훨씬 뛰어난 ‘무심한’ 프랑스인들은 ‘우당탕탕 에밀리의 프랑스 적응기’에서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이자 역경으로 그려진다.

불륜 같은 사생활을 차치하고 보면(에밀리 또한 친구의 남자친구를 탐한다), 오히려 진짜 ‘걸 보스’이자 리더는 중년의 나이에도 업계에 남아 남성 직원들을 부하로 둔 또 다른 여성 캐릭터 실비다. 하지만 업계 내 성공적 입지를 다진 실비는 불쌍한 에밀리를 무시하는 악덕 상사로 그려질 뿐이다. 미숙한 일처리와 말실수로 큰 프로젝트를 망칠 뻔한 에밀리를 꾸짖는 실비의 프로페셔널함조차 에밀리에겐 극복해야 할 난관으로 묘사된다.

회사 내 규율과 관행에 따르면 절대 하면 안 될 일들을 하며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에밀리지만, 결과는 항상 동화처럼 너무도 좋게 풀린다. 문제는 이마저 에밀리의 능력이 아닌 외모 덕에 가능한 일이라는 점이다.

모델만큼이나 마른 릴리 콜린스가 연기하는 에밀리는 파리지앵에 비해 ‘촌스럽다’고 놀림받지만, 극을 나와 대중에게 전시되는 순간 영향력은 유해하기 그지없다. 각종 패션 매체가 주목하는 아이템은 결국 릴리 콜린스가 극중 입은 옷과 이를 믹스매치한 방식이고, 대중이 소비하는 것 또한 위와 같다. 

이게 더 문제인 이유는 에밀리가 인플루언서가 된다는 극중 설정에 있다. SNS의 발달과 함께 지나치게 마른 몸을 추구하게 된 미의식은 여러 국가에서 이미 경계하는 사항이다. 그런데 에밀리는 이 마른 몸과 옷차림을 통해 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인플루언서가 된다. 다양한 신체 사이즈 및 개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의 지향점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에밀리는 추후 (아무런 체계 없이) 진행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며 업계 내 입지를 다진다. 유감스럽게도 해당 프로젝트마저 앞서 속옷을 선물한 클라이언트 앙투안이 에밀리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작업을 제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전체적인 드라마는 ‘똑똑하고 유능한’ 여자 에밀리가 아니라 똑똑하고 유능한 ‘여자’ 에밀리에 중점을 두고 진행된다. 능력 대신 외모로 여자를 평가하는 남성적 시선에서, 에밀리를 동등한 위치의 동료 대신 ‘이성’으로 보는 왜곡된 여성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넷플릭스

성공한 밀레니얼 여성은 자유로운 성생활을 한다?

 

캐리가 그러했든 에밀리 또한 자유로운 성관계를 추구하며 사회적 구속과 시선에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이 또한 ‘현대 여성이라면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성생활을 즐긴다’는 관념에 갇힌 구시대적인 발상일 뿐이다. 올해 2월, 영국의 가디언은 ”자유분방한 성관계를 지향하는 섹스 포지티브 페미니즘은 오히려 감소하는 추세”라고 짚어 넘어간 바 있다. BBC 또한 이런 성관계가 ”여성을 해방시키지 않고 오히려 억압한다”고 분석했다. 

일하는 동안에는 성차별과 여성 성상품화를 지적하며 소비자 마케팅에 적극 활용한 에밀리가 사생활에서는 술집에서 만난 사람, 친구의 남동생 및 연인과의 잠자리를 서슴지 않으며 그 누구보다도 ‘미소지니’를 적극적으로 실행한다. 

에밀리의 또 다른 문제는 지나치게 해맑은 성격에 있다. 눈치 없고 밝기만 한 여성 캐릭터가 ‘스윗하트’로 통하던 시대는 오래전 지났다. 대중은 더 이상 백치미로 포장한 캐릭터들의 무능함을 보고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에밀리의 러블리함을 포장하는 방식은 언제나 그랬듯, 화려한 비주얼과 옷차림이다. 매일 걷기 힘들 정도로 높은 하이힐을 신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출근하는 에밀리의 모습은 프로페셔널한 직장인과는 다소 거리가 먼 설정이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넷플릭스

과도한 사치는 여성의 전형이 아니다

 

에밀리의 화려한 비주얼은 과도한 사치와도 떼려야 뗄 수 없다. 기껏해야 사회초년생인 에밀리는 명품 옷을 입고, 비싼 가방을 매일 바꿔 들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한다. 에밀리의 궁상맞은 모습은 사실상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에밀리가 한 에피소드당 사용한 금액을 추적한 해외 매체 더 딥에 따르면 에밀리는 25분짜리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만 약 3만3천 달러(약 4천만원)를 썼다고.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에밀리의 파리 발령이 상사의 임신으로 갑작스럽게 결정되었던 만큼, 준비되지 않았던 해외생활에 사용할 정착금 또한 미리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란 사실이다. 

물론 시청자들은 미디어를 통해 현실 탈피를 꿈꾸며 대리만족을 느끼곤 하지만, 사회 초년생이 매일 2만 달러(약 2천 4백만원)에 달하는 옷을 바꿔가면서 입을 정도의 여유가 있다는 배경은 직장에서 잘릴까 연연하고, ‘고생’해가며 일하는 에밀리의 캐릭터와는 너무 상충된다.

극중 중국 재벌 2세로 나오는 민디와 비슷한 수준으로 돈을 쓰는 에밀리를 통해 제작진은 불필요한 소비를 전시하고, 대부분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이 현실인 직장인 여성의 삶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심어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에밀리는 뛰어난 직업적 역량을 갖추지도(어느 마케팅 담당 직원이 고객사의 컨펌을 거치지도 않고 게시물을 포스팅하겠는가?) 않았고, 민디처럼 재벌가의 자제도 아니며, 그가 다니는 회사는 일반 마케팅 회사 중 하나일 뿐이다.

어느 정도 현실을 아는 똑똑한 시청자들은 에밀리의 삶이 판타지라는 것을 알지만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를 통해 여과 없이 전파되는 글로벌 시리즈이다. 일반 직장인 여성을 소재로 삼으면서 경제관념 없는 에밀리의 불필요한 사치를 주로 보여주는 것이 ‘에밀리, 파리에 가다’ 제작진의 ‘우먼 임파워먼트’ 방식이라면 그들은 ‘우먼 임파워먼트’의 기초부터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에밀리, 파리에 가다' 캡처 ⓒ넷플릭스

한 손에는 명품 가방을 들고, 반대쪽 손으로는 남자의 손을 잡는 삶에 정체성을 두고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는 이제 설득력이 없다. 20년 전 ‘섹스 앤 더 시티’조차 커리어를 이어가며 서로 지지하고 연대하는 네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지만, 지금까지 에밀리는 그보다도 후퇴한 여성 캐릭터를 내세우며 그 누구의 워너비도 되지 못했다.

당시 터부시 되던 여성의 개방적인 성생활과 낙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극찬받았던 ‘섹스 앤 더 시티’ 제작진이 과거의 영광에 너무 오래 심취한 것이 아닐까. 2020년대의 제작진은 당시처럼 진취적인 길을 택하는 대신, 철 지난 페미니즘 이슈들을 가져오며 지나치게 똑똑해진 여성 시청자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대런 스타의 남성적 시선에서 풀어낸 에밀리는 예쁜 옷을 입고, 항상 밝으며, 무례한 성적 농담에 ‘귀엽게’ 반응하고, 남성의 커리어에 위협되지 않는 ‘아이 캔디’이자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예시일 뿐이다.

 

 

문혜준 기자: huffkore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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