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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 휘발유] '스타트업', 나라면 수지네 회사 절대 안 간다

로코라기엔 감정선을 이해할 수 없고, 창업 드라마라기엔 개연성이 없다.

tvN '스타트업'
tvN '스타트업' ⓒtvN

아버지는 될성 부른 창업 떡잎이었지만, 오래도록 회사를 다니며 악덕 상사 밑에서 고생만 했다. 그가 ‘좋은 아이템이 있다‘며 사업을 해보겠다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어머니는 이혼 서류를 들이 밀었다. 언니는 어머니를 따라갔고, 아버지는 성공의 문턱에서 가족 재결합을 꿈꾸다 교통사고로 죽었다. 어머니는 그 사이 부자와 재혼했고, ‘나’는 가족을 져버린 어머니와 언니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았다. 할머니는 친구가 없는 ‘나’를 위해 한 소년에게 정체를 숨기고 편지를 써 줄 것을 요구한다. 그 소년은 ‘나’의 첫사랑이고, 성인이 된 지금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단 한 번도 본 적도, 얘기를 나눈 적도 없지만. 여기까지가 tvN ‘스타트업’의 주인공 서달미(수지)의 전사(前史)다.

두 회차를 할애해 구구절절 풀어 놓았지만, 현재의 서달미라는 인물을 만든 뒷이야기들은 그야말로 구멍투성이다. 편지를 대필한 소년 한지평(김선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멀쩡한 얼굴로 이상한 행동들을 한다. 먼저 ‘스타트업’의 근본 서사인 서달미와 언니 원인재(강한나)의 대립이 그렇다. 성장과정에서 딱히 원수질 일도 없던 자매가 돌연 서로를 흰눈으로 본다.

어머니 차아현(송선미)을 택한 후 원인재는 뜻 모를 적개심을 내비치더니 서달미에게 절연 아닌 절연을 선언한다. 아버지와 자신을 떠난 어머니와 언니를 원망하는 서달미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을 지배한 복수심으로 번지는 대목도 순순히 받아들이긴 어렵다.

이뿐만이 아니다. 왜 할머니 최원덕(김해숙)은 서달미에게 펜팔이라는 방식으로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했나? 한지평을 소개해주면 안 되나? 펜팔은 그렇다치고, 왜 직접 편지를 쓴 한지평이 아닌 남도산(남주혁)의 이름을 도용했나? 그리고 편지가 끊긴 지금까지 그 거짓말을 왜 계속 이어가고 있나? 서달미는 왜 소식도 없는 남도산 타령을 십년 넘게 하고 있나? 그 오랜 시간을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다가 원인재 앞에서 허세를 부리려고 남도산을 찾기 시작한 심경 변화는 과연 무엇인가? 여태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어머니 차아현은 왜 갑자기 파티장에서 만난 서달미에게 애틋하게 ”화이팅”을 하는가?

 

억지 설정 끝에 현실을 내팽개친 드라마

 

답은 간단하다. 서달미가 ‘창업‘을 해야하고, ‘진짜’ 남도산과 사랑에 빠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명제를 성립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가 쌓여 가며 ‘스타트업’의 서사는 현실과 유리돼 버렸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던 서달미가 돌연 창업에 도전하는 이유도 황당하다. ‘남도산이 창업을 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싫어서일 수도 있고, 창업을 하려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드라마는 이야기를 그렇게 풀어가지 않을 모양새다. 심지어 창업은 서달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혼시킨, 이 드라마에서 그가 겪은 유일한 고난이다. ‘남도산이 서달미의 전부’라는 핵심 설정을 납득시키지 못했는데, 여기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보니 이런 전개가 펼쳐진다. 아무리 ‘K-드라마’에서는 변호사도 연애하고, 경찰도 연애하고, 의사도 연애한다는 우스개소리가 나온다 한들 현실을 아예 내팽개쳐서야 되겠는가.

tvN '스타트업'
tvN '스타트업' ⓒtvN

우여곡절 끝에 서달미는 진짜 남도산도 만나고, 창업 전선에도 뛰어든다. 그는 아이디어도, 창업 관련 지식도 없이 맨몸으로 스타트업 기업들을 육성하는 샌드박스에 들어가겠다고 나선다. 샌드박스는 서달미와 원인재의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은 곳으로, 로고는 이들 중 한명을 상징하는 ‘그네 타는 소녀‘다. 전국의 내로라 하는 창업 꿈나무들이 모이는 이 기업이 입주자를 뽑는 방식은 ‘도전 골든벨’을 연상케 한다. 창업 성공의 자질을 그해의 키워드 맞히기로 가늠하는 탓이다.

서달미는 친구 두 명과 삼산텍이란 소기업을 운영하는 남도산과 손 잡고 그 회사의 대표로 등극한다. 여태까지의 흐름대로 서달미는 ‘삼산텍의 대표가 돼야 하기 때문에’ 삼산텍 직원들은 만난 지 한 달도 안된 그를 기꺼이 CEO로 받아들인다. 서달미 CEO는 팀원을 보강하겠다며 디자이너 정사하(스테파니 리) 앞에 갑자기 무릎을 꿇는다. 2020년의 CEO가 인재를 영입하는 방식이다. 이 냉혹한 시대에 무릎 꿇기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모르겠으나 ‘스타트업’의 등장인물들은 이후로도 쭉 무릎을 꿇는다.

 

능력이 우선인 세상에서 꽃노래만 부르는 안일함

 

‘세계적인 포털 사이트 투스토의 글로벌 파트너쉽 디렉터’라는 알렉스(조태관)이 남도산에게 관심을 보이는 대목에서는 이 드라마가 창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세계적 코딩대회에서 우승한 남도산을 눈여겨 보던 알렉스는 그가 대학에 조기 입학했다가 자신과 비교당하는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며 일부러 문제를 틀리고 다시 나이대로 학교를 다닌 스토리를 듣고 설마했던 감동을 받는다. 이는 원인재가 억대의 대기업 수주를 따낸 것을 두고 샌드박스 대표 윤선학(서이숙)이 하는 말과 궤를 같이 한다.

″(샌드박스 로고의 그네 타는 소녀를 보며) 근데 이 꼬마는 좀 다를 줄 알았어요. 돈 말고 다른 이유를 찾을까 했는데...”

이에 한지평은 서달미와 원인재가 자매 지간임을 언급하며 원인재로 알려졌던 ‘그네 타는 소녀‘가 사실은 서달미였을지도 모름을 암시한다. 그 소녀가 서달미라는 합리적 이유를 만들려면 서달미가 어릴 적부터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잘 냈다거나 선행 마니아라는 등의 서사가 필요하다. 이런 사전 정보 없이 ‘그 소녀는 원래 서달미’라는 설정을 가미하는 건 자매의 아버지가 그저 편애를 했다는 방증에 불과하다.

삼산텍은 원인재의 계약 소식에 ‘그 회사 대표가 원인재 아버지 중학교 동창이더라‘는 TMI를 남발하고, 서달미는 원인재를 찾아가 이 루머를 언급하며 ”진정성은 없고 운이나 빽은 있어 보인다”고 비아냥댄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 창출일진대, 이 드라마는 그 목표를 달성한 원인재를 악마화한다. 원인재의 성공은 ‘스타트업’에서 서달미의 복수심을 불태우게 하는 땔감으로만 사용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성공해야만 하는 이유들을 부연하고 부연해 봐도, 서달미의 회사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절대 지원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여태까지 서달미가 보여 준 능력은 카페 최고 매출 달성 밖에 없는데 무모하리만치 허세를 부려서만은 아니다. 모든 위기의 순간에 한지평의 조력을 받는 것도 모자라 ‘코리안 특급’ 박찬호까지 소환해 ‘대박’을 쟁취하는 것도 인복이라면 인복이겠다. 심지어는 서달미가 녹취 협박으로 투자를 따내는 장면에서까지 한지평의 입김이 작용한다.

tvN '스타트업'
tvN '스타트업' ⓒtvN

문제는 삼산텍 CEO로서 서달미가 성장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남도산도 마찬가지다. 삼산텍의 리더 두 사람은 ‘난 꿈이 있으니까, 당신들은 날 도와야해’ 식의 막무가내 태도를 이어간다. 창립 멤버를 전부 갖춘 삼산텍이 지분 분배를 하는 대목이 단적인 예다. 삼산텍의 주주명부 초안을 보고 멘토 한지평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장담하는데 이 주주명부를 보고 투자하는 멍청이는 전 세계에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남도산에게 19%, 서달미 이하 직원과 남도산 아버지가 16%씩, 남도산 사촌형이 1%를 보유한다고 돼 있는 주주명부가 탄식을 자아낸다. 그러나 원인재 회사의 주주명부와 한지평의 친절한 설명은 스타트업 회사의 지분이 CEO에게 집중돼야 하는 이유를 잘 알려줬다. ‘대표의 힘은 지분에서 나온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특히나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은 창업 초기 각종 분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대표의 지분율은 흔들리지 않는 결정권을 유지할 만큼 있어야 한다는 게 상식이다.

드라마도 이를 모르지 않는지 설명을 자세히 넣어 두었지만 서달미는 남도산에게 지분을 몰았다. ‘남도산과 서달미의 의견이 갈리면 어떻게 할 거냐’는 한지평의 지적도 당연한 상황이다. 여기에 남도산은 ”그럴 일 없다”라고 잘라 말한다. 바로 직전까지 ”의견 틀어지지 않으면 된다. 저희 우정 평생 갈 거다”라고 말하고 나서 지분율로 친구들과 머리채를 잡고 싸운 다음인데도 말이다.

이를 두고 최종적으로 삼산텍 지분 7%를 보유하게 된 서달미는 자신의 지분이 71%라고 우긴다. 이유는 자신의 지분은 완벽한 자신의 편 남도산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답은 정해져 있으니 한지평은 분량상 설명만 하면 됐던 수준이다. 15년전 얼굴도 모른 채 잠깐 편지를 주고 받았던 사이에 어떻게 하면 이러한 무한 신뢰가 생겨나는지 의문이다.

가족 회사도 부부 회사도 아닌데 CEO와 CTO가 ”우리 달미”, ”우리 도산이”를 운운하며 일처리를 한다. 둘이 그러고 있노라면 철산(유수빈)과 용산(김도완)이 ”지금 이 상황 나만 못 알아듣나”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대학 팀플을 그렇게 해도 욕을 먹을 판에, 삼산텍의 잡플래닛 평점이 처참할 것은 자명하다.

tvN '스타트업'
tvN '스타트업' ⓒtvN

‘서브 닥빙’ 유발하는 스토리에 피해 보는 건 주인공

 

“15년 전 편지가 무슨 힘이 있다고 끝을 장담합니까?”

그렇다. 15년 전, 그것도 그 세월 내내 주고 받았던 것도 아닌 편지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진 걸까. 보는 이들의 심정을 시원하게 대변해 주는 이 대사는 다름 아닌 남도산의 입에서 나왔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자신이 쓰지도 않은 15년 전 편지 덕에 서달미를 곁에 둔 남도산이 한 말이다.

제목이 ‘스타트업’이지만 창업 현실을 내팽개쳤다면 적어도 로맨스는 잡았어야 했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더라도 다시 돌릴 방도는 얼마든지 있었다. 허나 서달미와 남도산의 실제 첫 만남이 성사된 후 두 사람은 ‘그냥’ 사랑에 빠졌다. 미지근하고 김 빠진 콜라를 마신 것 같은 로맨스다. 언제부터 사귀었는지 모르겠지만 둘은 ”내가 왜 좋아?” 류의 연인용 질문들을 당연히 주고 받고 스킨십을 한다.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라던 웨딩피치처럼 둘만의 세계관으로 현실을 살아낸다. ‘스타트업’은 이들의 앞길을 막는 자들을 전부 악당으로 그리지만, 그 악당들의 목소리가 정상적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수지와 남주혁이라는 선남선녀가 붙어 있다보니 그림은 예쁘지만 시청자들이 로맨스 드라마에서 원하는 건 그것 뿐만이 아님을 모르는 이는 없다. 이들이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을 수용하더라도 세상에 둘도 없이 절절한 사이가 되는 과정이 없는 한 ‘스타트업‘의 로맨스는 단순히 ‘예쁜 그림’으로 남을 터다.

처음부터 이 드라마에서 거의 유일하게 납득 가능한 서사를 지닌 한지평의 주가가 상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부모 없이 자라 무시당한 설움을 품고 세상을 적대시하지만 최원덕의 보살핌을 내내 잊지 않고 보답하려는 따뜻함도 지녔다. 능력자에 이성적이고 냉철하지만 약간의 허술함도 보여준다. 처음에는 은인인 최원덕을 위해 그의 손녀에게 편지를 쓰고, 15년 동안 이어진 거짓말에 동참하지만 어느덧 서달미에 스며들었다는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갖췄다. 거기에 멸종된 줄 알았던 문학소년 감성까지 보유했다면 시청자들의 마음은 한지평에게 기울지 않을 수 없다.

tvN '스타트업'
tvN '스타트업' ⓒtvN

여기서 차라리 tvN ‘응답하라’ 시리즈 식으로 ‘서달미의 남편 찾기’가 시작됐으면 싸움은 났어도 재미는 보장됐을 것이다. 그러나 서달미는 애매한 친절로 한지평을 들었다놨다 하면서도 그가 좋아질 가능성은 절대 내비치지 않는다. 서달미가 보여주는 애정의 밸런스도, 한지평과 남도산 캐릭터에 들인 정성의 밸런스도 무너진 모습이다. 1화부터 한지평과 서달미의 이야기를 그려 놓고는 아무 상관없는 남도산이 나타나 갑자기 서달미와 인생의 사랑을 하고 있으니, 보는 이들은 한지평의 ‘이미 슬픈 사랑’으로 감정 이입을 하기 마련이다.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 드라마는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놓쳤다. 서달미와 남도산은 7화에서 눈물의 키스를 했지만, 너무나도 예쁜데 왜 하는지 의문이 남는 키스신이 아닐 수 없었다. 

드라마 팬들 사이에는 이전부터 ‘서브 닥빙(서브 주인공에 닥치고 빙의)‘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통상적으로 로맨스 드라마에서 결국 맺어진다는 사실을 의심하기 힘든 남자 주인공 A와 여자 주인공 사이에 매력적인 또 한 명의 남자 주인공 B가 등장할 때, B를 응원하게 되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한지평을 두고 ‘서브 닥빙’ 증상을 호소하는 ‘스타트업’ 시청자들이 늘어난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벌써 반환점을 돈 ‘스타트업’은 죄가 없는 배우들을 이 상황에서 구출할 수 있을까.

 

라효진 에디터 hyojin.ra@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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