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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물품을 필요한 이에게 보내는 ‘책임 의식’ : 좋은 마음으로 기부할 때 꼭 고려해야할 것이 있다

서로 얼굴 붉히지 않는 기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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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게티

경남의 한 사회복지관에서 근무하는 김아무개 사회복지사(부장)는 지난 9월 독거노인들에게 백팩을 전달해 달라는 한 가방 업체의 기부에 마음이 상했다. 백팩은 누가봐도 10대 청소년들 취향의 디자인으로 어르신들이 쓰기에 불편한 모양새였다. 해당 업체는 사업총괄광역기관을 통해 몇몇 지역기관에 백팩 150~200개씩을 기부했다. 김 부장은 “어르신들은 받아도 잘 쓰지 않을 것 같으니 복지관에 방문하는 선생님들께 드리는 건 어떻겠냐”고도 건의했지만 업체로부터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결국 김 부장은 가방을 받아 어르신들에게 나눠줄 수밖에 없었다.

찬바람이 불면 기부의 계절이 돌아온다. ‘따뜻한 온정’, ‘통큰 기부’ 등의 수식어가 붙은 소식이 들려온다. 기부자들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관이나 장애인시설 등에 근무하는 이들은 기부를 받고도 난감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기부는 무조건 좋다”는 인식을 넘어 실제 필요한 물품을, 필요한 이들에게 보내는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부를 받고도 얼굴 붉히게 되는 사례 

28일 <한겨레>가 접촉한 사회복지관·장애인시설 근무자들은 기부를 받고도 얼굴을 붉히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품을 ‘먹어도 괜찮은데 버려지는 게 아깝다’며 기부하려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대부분 어르신이나 아이들이 먹어야 하다 보니 복지관 담당자들은 기부를 받을 때 고민에 빠진다. 2019년 김 부장은 ‘멀쩡한 데 버리기 아깝다’며 유통기한이 1~2일 남은 토마토를 보내겠다는 기부자에게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김 부장은 “사장님 입장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최우선으로 삼는 건 어르신과 아이들의 건강과 복지라고 말씀드렸다”며 “당장 거절이 어렵지만 저희 기관을 더 신뢰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식품에 문제가 생겨 속상해 하는 일도 발생한다. 서울의 한 사회복지관에서 일하는 정아무개 과장은 멸균우유를 후원받았다가 모두 버린 적이 있다. 정 과장은 “우유 대리점 쪽에선 멸균우유가 비에 젖어 판매를 못 하게 됐지만 제품엔 이상이 없다고 해서 받았더니, 나중에 구더기가 생겨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물건을 받은 뒤 기부금 영수증 처리를 두고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연말에 기업들의 기부가 몰리는 데는 일부 기업들이 ‘재고 처리’를 염두에 두고 물품을 보내는 ‘불편한 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업체 입장에선 별도의 재고 폐기 비용을 들이지 않고 기부하면 법인세 감면 혜택까지 받을 수 있다. 아예 일부 업체는 세제 혜택을 더 받으려고 기부 규모를 부풀리려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2년 전 목걸이 수입업체로부터 ‘은 도금 목걸이’ 400개를 기부받았던 정 과장은 업체에서 개당 8만원으로 가격을 책정하길래 석연치 않아 인터넷으로 제품 가격을 찾아봤다. 비슷한 제품들의 시가를 고려해 3만원이 적절하다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업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 과장이 “나중에 복지관이 구청 지도점검을 받았을 때 기부금을 높게 책정했다고 판단하면 후원자님에게도 불이익이 갈 수 있다”고 말을 한 뒤에야 업체 대표는 뜻을 꺾었다.

기관에서 필요한 물품과 실제로 기부받는 물품의 간극도 큰 편이다. 아름다운재단이 2019년 장애인시설 157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현물기부 이슈와 해결방안 모색’)를 보면, 필요보다 기부가 많은 품목으로 쌀 등 식료품, 생활용품, 의류가 꼽혔다. 사무기기나 가전제품 등에 대한 수요는 커졌으나 상대적으로 기부는 적었다.

기부를 받는 기관도 ‘정중하게 거절하기’

기부를 받는 입장에서는 후원자들의 선의를 쉽게 거부하기 힘들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기부를 받는 쪽도 ‘정중하게 거절하기’를 잘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20여년간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책 <모금가 노트>를 쓰기도 한 모금활동 전문가 정현경씨는 “거절할 경우 ‘배부른 기관’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관계가 깨질까 봐 받지 말아야 할 물건을 받게 되면, 결국 다른 기관에도 ‘왜 너희는 받지 않느냐’는 식으로 피해가 갈 수밖에 없다”며 “관련 매뉴얼을 마련하고 정중하게 거절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시 푸드뱅크, 장애인복지시설협의회 등은 각각 유통기한 및 구체적인 식품 검수 관련 매뉴얼과 현물기부 가이드를 마련해 기부를 받을 때 참고한다.

 

한겨레 박수지 고병찬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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