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20년 11월 10일 19시 50분 KST | 업데이트됨 2020년 11월 10일 19시 59분 KST

대선 불복의 기술 : 트럼프는 자신이 '루저'가 됐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다

트럼프는 항상 스스로 "승리자" 이미지로 포장해왔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는 법을 평생 배우지 못했다.

Tom Gates via Getty Images
1990년, 부동산 개발업자 시절의 도널드 트럼프. 

″제 부친은 항상 저를 칭찬했어요. 언제나 저를 (자녀들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도널드 트럼프는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시 트럼프는 2016년 대선에 도전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뉴욕 트럼프타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WP는 이번 대선 결과가 발표된 7일(현지시각)에 이 인터뷰 녹취를 소개했다. 여기에는 트럼프가 두려움에 대해 얘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패자, ‘루저(loser)’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인터뷰 녹취는 트럼프가 1990년 US오픈 골프에서 있었던 일을 길게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승자”에 대한 트럼프의 감각

골프광인 트럼프는 무명에 가까운 프로골퍼 마이크 도널드가 생애 첫 US오픈 우승 문턱까지 갔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 아무도 몰랐던” 이 골퍼는 당시 뜻밖에도 대회 선두를 달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 전성기를 달리며 세계 최고의 골퍼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던 헤일 어원이 곧 ”미친 기세”로 추격을 시작했고, 다음날 플레이오프까지 승부를 끌고갔다.

″당연히 헤일 어윈이 이겼죠. 다른 양반(마이크 도널드)은 우승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원래 챔피언이 항상 이기는 겁니다.” 트럼프가 말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트럼프는 이 가엾은 선수가 ”인생을 바꿀 수도 있었던” 경기에서 끝내 패배한 이후 쓸쓸하게 퇴장하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페어웨이를 걸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없고, 돈(상금)도 없고, 그의 아내가 가방을 들고가는” 모습을. 그 쓸쓸한 모습을.

Getty Images via Getty Images
1990년 US오픈 골프에서 프로골퍼 마이크 도널드는 선두를 달리다가 추격을 허용했고, 결국 우승에 실패했다. 메디나컨트리클럽, 일리노이주. 1990년. 

 

″그런 게 두려우십니까? 언젠가 그렇게 혼자 페어웨이를 걸어가는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그런 날을?” 기자가 트럼프에게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패자가 될까봐 두렵냐는 질문이었다.

트럼프는 답을 피했다. 대답 대신 그는 ”홍보에 한 10분이나 썼을까?” 싶을 만큼 홍보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책이 ”역대 가장 많이 팔린 경영서적”에 올랐다고 자랑했고, 자신이 진행했던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가 대단한 성공을 거둔 “1위 쇼”가 됐다고 자랑했다.

기자가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고, 트럼프가 마지못해 짧게 답했다.

”그 (패배라는) 개념 자체가 싫어요. 두렵지는 않지만 그 개념이 정말 싫어요.”

트럼프는 이어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어떻게 늘 ”성공”을 거뒀지에 대해 장황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항상 그래왔습니다. 학교에서 저는 항상 성공했어요. 삶에서도 저는 늘 성공했고요. 제 아버님은 성공한 부동산 개발업자였습니다. 무척 터프하지만 좋은 분이셨습니다. 제 부친은 항상 저를 칭찬했어요. 언제나 저를 (자녀들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어느 유명한 잡지에 말하기를 제가 손을 대는 것마다 금으로 변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무척 어린 나이였을 때의 일입니다.”

 

트럼프는 패배를 인정하는 법을 모른다

트럼프는 패배자가 된다는 건 ”미지의” 세계처럼 여겨진다고 했다. ”평생 해왔던 일”이므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은 크지 않지만 ”두려운 게 있다면, 그건 (패배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일 거라고 했다. ”저는 그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ASSOCIATED PRESS
도널드 트럼프가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뉴욕. 1991년 4월9일.

 

트럼프는 패배를 모르는 게 아니라 패배를 인정하는 법을 모른다.

부동산 개발업자와 인기 리얼리티 TV쇼 진행자로 커리어를 쌓아오는 동안 트럼프는 스스로를 ‘항상 승리하는 사람’으로 포장해왔다. 자신이 만든 그 가상의 이미지 속에서 그는 늘 상대방을 압도하는 협상의 달인이고, 어떤 일에서든 항상 승리하는 사람이다. 총명한 자수성가 재벌이고, 세계 경제의 중심 뉴욕에서 성공을 일군 비즈니스맨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뉴욕의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부친 프레드 트럼프에게 물려받은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실패했고, 그 때마다 부친의 도움을 받아 겨우 위기를 넘기고는 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적이 없다. ”저는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실패를 항상 성공으로 바꿔내기 때문이죠.” 2016년 대선을 앞두고 뉴욕타임스(NYT)가 입수해 보도한 인터뷰 녹취에서 트럼프가 말했다. 

당시 NYT는 트럼프의 성격과 심리를 분석하며 트럼프를 지배하는 건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덧붙였다. 이런 그의 기질을 트럼프가 대통령선거 출마를 결심하게 된 계기와 연결짓는 사람도 있다. 훗날 ‘트럼프 굴욕 사건’으로 재조명 됐던 2011년 백악관 출입기자 만찬 사건에 관한 얘기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이 행사의 오랜 관례에 따라 여러 주제로 농담을 던졌다. 오바마는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았던 트럼프를 농담 소재로 활용했다. 그의 능수능란한 ‘조크’에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고, 트럼프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트럼프는 당시 자신이 ”대단히 즐거운” 저녁을 보냈다며 이런 세간의 의혹을 일축했다.)

 

 

트럼프, 루저   

2016년 공화당 대선후보직을 수락하면서 ”나약한” 힐러리 클린턴을 공격한 트럼프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승리와 성공, ‘강함(strength)’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틈만 나면 2016년 대선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말했고,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말했고, 코로나19를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가 보기에 패자는 약하고(weak) 존경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그의 이런 가치관은 부친에게서 물려받았다는 게 정설이다.

자수성가한 사업가인 프레드는 자식들을 엄하게 대했고, 세상에는 승자와 패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가르쳤다. ”프레드 트럼프의 세계에서, 슬픔이나 상처 받은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약함(weakness)의 신호다.” 뉴욕타임스가 지난 여름 ‘그 아빠에 그 아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적었다. 

약하다”와 함께 트럼프가 타인을 비난하거나 공격할 때 자주 쓰는 또 다른 표현도 바로 ”루저”다. 힐러리 클린턴도, 조 바이든도,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공화당 의원도, 내부고발자도, 사회주의자도, CNN도, 심지어는 테러범도 그에게는 ”루저”일 뿐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자신이 루저가 되고 말았다.

″그는 계속해서 ‘나는 승자다, 나는 위대한 딜메이커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저런 사람이다’라고 늘 말해왔다. 이번 선거는 그걸 증명할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증명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트럼프의 홍보담당자를 지냈던 앨런 마커스가 폴리티코에 말했다. ”(그런데) 그걸 해내지 못한 거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첫 해인 2017년 첫 방송을 시작한 코미디쇼 ‘프레지던트쇼’는 패배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트럼프에게서 철부지 어린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난 4년 동안 꾸준히 그를 지켜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랬던 것처럼.

트럼프로 분장한 코미디언 겸 배우 앤서니 아타마뉴익은 트위터에 방송 영상을 공유하며 ‘#TrumpTantrum’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tantrum [tæntrəm] :

(특히 아이가 발끈) 성질을 부림[짜증을 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