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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성착취물이 '빛보다 빠르게' 2차 유포되는 동안 피해자가 겪어야 하는 일들

전문가들은 피해자의 신고에 기반한 ‘사후 삭제’가 아니라, ‘피해 촬영물 선차단’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자료사진 
자료사진  ⓒLincoln Beddoe via Getty Images

‘박사’ 조주빈, ‘갓갓’ 문형욱 등 텔레그램 ‘박사방’ ‘엔(n)번방’ 운영자들이 잡혀 재판을 받는다는 뉴스가 쏟아지지만 ㄱ씨에겐 남의 일이다. 텔레그램 성착취 피해자인 ㄱ씨의 고통은 주범이 잡혔다고 끝나지 않았다.

채팅방에서 그의 영상을 받은 유료회원들로부터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도와줄까?” “내가 아는 변호사나 기자를 소개해줄까?” 아예 노골적으로 만남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데 나랑 만나볼래?” 연락하지 말라고 답하면, 요구는 협박으로 돌변했다.

“네 영상을 내가 가지고 있는데도 이렇게 불친절하게 말해?” ㄱ씨는 자신의 영상을 소지하고 있는 인원이 몇명인지, 그들이 언제 다시 자신의 영상을 유포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피해자 ㄴ씨는 검색어와 싸웠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자신의 이름이 ‘연관 검색어’가 됐기 때문이다. “○○ 사는 누구인데 얘도 피해자”라며 이름, 나이, 직업 정보를 담은 글이 트위터, 블로그, 각종 온라인 게시판에 돌아다녔다.

자신의 영상과 사진이 보이는 대로 주소를 수집했고, 지원기관을 통해 삭제 요청을 했지만 이미지와 달리 신상정보를 삭제하기까진 시간이 3주 이상 걸렸다. 그사이 연관 검색어인 자신의 이름은 성착취물 링크로 연결되는 ‘미끼’가 됐다. 트위터 등에 번진 이 링크를 클릭하면 이미 유포된 영상물을 갈무리해 제작한 ‘움짤’(움직이는 사진)이나 이미지가 드러났다. 돈을 내고 다른 영상물을 구입하게 만들기 위한 홍보물처럼 제작·유포돼 2차 피해를 입은 것이다.

텔레그램 성착취 피해자 현황
텔레그램 성착취 피해자 현황 ⓒ한겨레


■ 빛보다 빠른 2차 유포, ‘피해 증명’에 발목잡힌 삭제

범인이 잡혀도 피해는 계속된다. 피해 촬영물이 일단 공개되면 클라우드, 다크웹, 국외 메신저 및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2, 3차 유포는 손쉽게 이뤄지지만, 이를 ‘완전히’ 삭제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디지털 성폭력을 “끝나지 않는 싸움”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현재 피해 촬영물 삭제 지원 업무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지원센터)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경찰청 등과 협업해 사실상 총괄하고 있다. 지원센터가 신고를 받거나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피해 촬영물을 찾아내 해당 플랫폼 운영자에게 삭제를 요청하고, 방심위에 음란·선정성 정보 차단을 요청한다. 경찰청은 피해자가 요청할 경우 증거를 수집해 법적 대응의 자료를 만든다.

그 전까지 피해 촬영물 삭제는 소수 시민단체의 활동에만 의존했지만, 2018년 지원센터 개소 이후엔 정부기관이 이 업무를 맡아 책임성을 높였다. 문제는 △피해자가 직접 신고한 영상을 △사후 삭제하는 것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자체 모니터링 과정에서 피해 촬영물을 발견해도, 해당 영상의 피해자가 실제로 나타나지 않으면 삭제 요청을 하는 것도 어렵다. 플랫폼 사업자 쪽이 ‘검열’ 논란 등을 우려해 불법촬영과 관련 없는 콘텐츠 삭제를 최소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해당 영상이 피해 촬영물임을 증명하려면 대리삭제 동의서와 피해자의 신분증을 함께 제출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행 성폭력방지법은 삭제 지원 요청 이후 실제 삭제가 이뤄지기까지의 절차를 규정해두지 않아, 지원센터와 피해자는 ‘삭제 권한’을 가진 플랫폼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의 경우엔 일일이 자신의 영상을 찾아서 확인한 뒤 해당 영상의 유아르엘(URL), 주요 키워드, 영상 갈무리(캡처) 화면 등을 수집해서 직접 신고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악화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지원센터의 박성혜 팀장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처럼 위법이 명백한 영상의 경우 신고 없이도 삭제 요청이 가능하도록 좀 더 명확한 절차를 마련하고 인력을 증원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피해 촬영물이 국외 사이트에 유포될 경우 상황은 더 열악하다. 네이버, 다음 등에 견줘 ‘삭제의 신속성’과 ‘피해자의 접근성’이 모두 떨어지기 때문이다.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의 안지희 변호사는 “구글은 피해 촬영물 신고를 받는 고객센터도 없고, 구글 코리아는 ‘온라인 광고상품·서비스의 판매 및 마케팅 회사’로 등록돼 있어 피해 촬영물과 관련한 직접적인 조처를 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결국 구글 본사에 삭제 요청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피해 당사자는 소명 자료를 최대한 모아 제출해야 한다. 안 변호사는 “구글이 피해 촬영물을 유통하면서 트래픽을 유치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얻는 구조에 대해 가처분신청을 하고 싶어도, 관련 서류 송달에만 몇달이 걸리니 사실상 무용지물”이라고 비판했다.


■ ‘사후 삭제’→‘사전 차단’ 전환 필요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전문가들은 피해자의 신고에 기반한 ‘사후 삭제’가 아니라, ‘피해 촬영물 선차단’으로 패러다임을 바꿔 제도 전반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방심위는 지난 4월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겠다며 피해 촬영물의 ‘선 삭제, 후 심의’ 절차를 도입한다고 발표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후속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방심위 관계자는 “삭제에 불응하는 국외 사이트의 경우 심의 후 접속차단을 하는 등 기존 조처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접속이 차단된 사이트라도 가상사설망(VPN)을 통해 우회접속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텔레그램 성착취를 공론화해온 단체 ‘리셋’은 “유튜브 등 온라인엔 접속차단을 우회하는 정보가 범람한다. 심지어 우회접속을 하면 성인인증은커녕 본인인증도 할 필요가 없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차단’이란 표현이 무색한 조처”라고 지적했다.

피해자의 요청이 없어도 촬영물을 삭제할 수 있도록 삭제 권한과 범위를 확장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금은 혼인·혈연으로 이어진 친족만 피해자를 대리해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데, 피해 사례를 가족한테 알리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며 “성폭력방지법을 개정해 ‘명백한 불법촬영물’의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충족할 경우 바로 삭제할 수 있도록 하면 선제적인 대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국외 사이트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정보통신망법상 ‘국내대리인 제도’의 업무 범위에 ‘불법촬영물 유통·삭제’를 추가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국내대리인 제도는 국외사업자가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개인정보 침해사고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개선조치를 하고 국내에서도 법적 대응이 가능하도록 책임자를 두는 제도다. 안 변호사는 “국내대리인 제도를 통해 불법촬영물 유통 방지 관련 업무도 적용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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