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우리의 분노와 연대는 식지 않아야 한다 : n번방 취재 기자가 돌아본 지난 1년

n번방 보도 1년을 맞아 디지털성범죄 아카이브를 열었다.

 

박사방과 n(엔)번방 등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 세계(<한겨레> 2019년 11월25일치)를 들춰낸 지 1년, 〈한겨레21〉은 11월23일 그동안 밝혀진 디지털성범죄 세계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기록을 저장할 ‘디지털성범죄 끝장 프로젝트 너머n’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연다. ‘n개의 범죄’(가해자 조직도), ‘n번의 오판’(디지털성범죄 판결문 분석), ‘n명의 추적’(연대의 역사), ‘n번방 너머n’(성교육 자료), 그리고 기록(기사 모음)을 담았다. ‘가해자의 n’이 ‘연대의 n’으로 바뀌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0월22일 1심 구형을 앞두고 법정에 선 ‘박사’ 조주빈은 말했다. “악인의 삶에 마침표를 찍겠다.” 삭제 버튼 한 번 누르는 것으로 접속 기록까지 지울 수 있는 텔레그램 세계처럼 단번에 모든 걸 마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그 반대편, 조주빈 그리고 ‘박사방 사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피해자 곁에서 1년을 보냈다. 그들은 여전히 쉽게 마침표 찍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다.

2019년 11월 기획보도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에서 취재하고 기사 쓰며 처음 피해자들과 만났다. 기사를 보고 또 몇몇 피해자가 연락해왔다. 경찰 신고를 돕고, 텔레그램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같은 피해자 지원 단체를 소개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었다. ㄱ도 그런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이다.

조주빈이 법정에서 ‘마침표를 찍겠다’고 말하기 며칠 전 ㄱ한테서 전화가 왔다. 불안을 담은 의문을 쏟아냈다. “왜 조주빈에게 사형을 구형할 수 없는 건가요? 만약 모범수로 풀려나면 어떻게 하죠?” ㄱ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잇는다.

“아직 신고도 못 하고, 엄벌 탄원서를 내는 것도 무서워하는 피해자가 많다고 들었어요. 당연해요. 그래서 내가 먼저 목소리를 내고 싶어요.” ㄱ은 어느덧 자기 고통을 쥐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지니게 됐다. “많은 피해자가 아직 고통 속에 있다는 걸 세상이 모른 채로 사건이 끝나면 안 되니까요.”

한겨레
한겨레 ⓒ한겨레

 

1년 전 취재를 시작했을 무렵 느꼈던 충격이 떠올랐다. 피해자와 통화한 그날 밤, 박사방에 그 피해자의 성착취물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걸 봤다. 피해자의 주소, 연락처 같은 개인정보가 수많은 가해자에게 공개됐다. 대화창을 넘기던 손가락이 멈췄다. 메스꺼움이 느껴지고 죄책감이 몰려왔다. 이것이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의 100분의 1이라도 될까. 기획보도가 나갔지만 ‘박사’가 잡히지 않았다. 쉽게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국외 공조가 잘 안되고,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디지털성범죄 수사가 잘 되지 않는 일이 많았다. 어렵게 가해자가 잡혀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무엇보다 ‘박사’는 그 어떤 가해자보다 악랄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혹시나 피해자들이 “인터뷰를 괜히 했다”고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가해자는 여전히 활개 치고 있었다. <한겨레> 텔레그램 제보 계정으로는 “제 방도 소개해달라”는 또 다른 가해자의 메시지, 심지어 “대화 좀 하자”는 박사의 조롱 섞인 메시지가 왔다. <한겨레>가 텔레그램 성착취방을 홍보한 꼴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 고통스러웠다. 취재를 이어가면서 몇번이나 박사가 붙잡히는 꿈을 꿨다. 주변 권유로 심리상담을 받았다. “취재에서 빠져나오라”는 상담사의 말에 성착취방 모니터링을 멈췄다.

기사를 쓴 지 넉 달이 지난 2020년 3월 박사가 붙잡혔다. 조주빈이란 이름의 24살 남성. 체포 소식을 듣고 피해자에게 전화했다. ㄱ의 반응은 의외였다. “‘차라리 잡히지 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ㄱ은 조주빈을 다룬 뉴스를 볼 때마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뛴다고 했다. 다시 그때 일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다시 시간은 흘렀다. 조주빈을 붙잡고 세상은 조금씩 변했다. 성범죄자로는 처음으로 수사 단계에서 조주빈을 비롯한 6명의 신상이 공개됐다. 디지털성범죄의 법정형을 높이는 내용을 담은 ‘n번방 방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런 소식을 피해자들한테 알리며 “모두 용기 있게 나서준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여전히 소셜미디어에서 재유포되는 성착취물을 일일이 직접 삭제하러 다니고 있었다. 삭제 속도가 유포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지난여름 또 다른 피해자 ㄴ과 저녁을 먹었다. 헤어지자마자 ㄴ은 대뜸 “내가 없어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 잘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절망스러워 같이 엉엉 울었다. ㄴ은 자해했다가 “다시 잘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을 반복했다. 영원히 이 끔찍했던 시간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듯한 불안, 조주빈이 혹시 사회로 나와 자신을 해할 수 있다는 공포가 그를 괴롭혔다. ㄴ에게는 경제적 문제도 있었다. 박사방에 주소가 공개되고, 오프라인 협박 위협까지 당한 피해자들에게 가장 긴급한 지원은 안전한 집이었지만 ㄴ에게는 집을 구할 보증금이 없었다. ㄴ은 고시원과 친구 집을 전전했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이 사건을 ‘특별하고 엽기적인 괴담’ 정도로 생각하는 시선으로부터도 상처받는다. 피해자 직업을 앞세운 언론 보도, 피해자 나이나 자극적인 범죄 사실을 구체적으로 늘어놓은 기사나 소셜미디어 글을 보며 피해자들은 “마치 또 다른 조주빈들이 옥죄는 것 같다”고 했다.

마치는 일은 조주빈의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가해자에 대한 무거운 처벌이 있어야 하고, 피해자가 두려움 없이 피해를 말하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세상의 인식이 변해야 한다.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지난 1년. 피해자는 삶의 의지를 놓기 직전까지 갔다가,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를 다지다가,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다가 또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지 않았는가.

이 글을 읽는 피해자들이 지금 당장 힘듦으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든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고, 절망스러운 오늘과 다른 내일이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피해자의 고통이 멎고 마치는 순간 비로소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끝날 수 있다. 우리의 분노와 연대는 그때까지 식지 않아야 한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여성 #성범죄 #n번방 #디지털 성범죄 #조주빈 #텔레그램 n번방 #텔레그램 성착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