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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에 대한 이해'는 당신 자신을 위한 투자다

  • 안승준
  • 입력 2018.05.14 17:29
  • 수정 2018.05.14 17:30
ⓒhuffpost

어린 아이들은 길을 가다 넘어지면 십중팔구 눈물을 터뜨린다.

어린 아이가 통증을 어른보다 훨씬 더 크게 느낀다는 의학적 논문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아이들은 작은 고통에도 커다란 두려움의 반응을 보인다.

처음으로 주사를 맞을 때도 그리 깊지 않은 물에들어갈 때도 공중목욕탕의 탕에 들어갈 때도 미용실의 바리깡 소리에도 꼬마들은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난 그것을 겪지 않은 것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원인을 찾는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낯선 감정은 그 감정의 실체와는 관련 없이 두려움을 동반한다.

어두운 공간이나 안개가 뿌옇게 낀 곳이 주는 으스스한 느낌도 스스로의 눈으로 또렷하게 확인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나이 어린 아이들에겐 예상치 못한 대부분의 경험들은 그러한 이유로 공포의 감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Melinda Podor via Getty Images

수십 번 수백 번 넘어져 본 어른들에게 한 번 더 넘어지는 것은 그다지 놀랄 것 없는 작은 사건일 것이다.

운이 나빠서 조금 더러운 곳에 넘어졌다면 깨끗이 소독을 하면 될 것이고 피가 난다고 하더라도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는 과정을 거치면 며칠 지나지 않아 원상태로 돌아올것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그런 류의 경험은 약간 기분 나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내 몸에서 흐르는 빨간 피를 보는 아이는 그 작은 변화가 스스로에게 어떠한 결과로 다가올지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주사바늘이 몸을 뚫고 들어올 때에도 윙윙거리는 바리깡이 머리카락 가까이 닿을 때에도 그 이후의 결과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들은 극도의 두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이들의 울음을 조금 더 크고 오래 가게 만드는 요인도 있는데 그것은 주변 어른들의 반응이다.

넘어진 아이의 곁에서서 큰일이라도 벌어진듯 걱정하는 염려의 말들과 주사맞는 꼬마들에게 괜찮을 거라고 토닥이는 주변의 위로는 오히려 상황 인식을 과장하는 효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어설프게 알고 있는  정보는 아이의 뇌가 별것 아닌 상황을 극도의 위 험 상황으로 인지하게 한다.

미디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접한 피 또는 주사기에 대한 무서움은 아이가 처한 상황들과 절묘하게 오버랩되고, 아이들은 정상적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아이들은 몇 방울의 피와 주사기를 보면서 그리고 걱정하는 주변의 표정을 보면서 어쩌면 죽음의 공포와 맞먹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묘지를 무섭게 상상하는 것 역시 귀신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 없이 겪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각인된 허구적 선입견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얼마 전 산업재해로 실명을 하게 된 분들에 대해 상담을 요청 받았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당연히 좋은 일은 아니다.

그것을 원하는 사람도 없고 그것을 반길 이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상황이 분명히 나으리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겠지만 할 수 있는것은 너무도 많다.

잃은 것만 생각나겠지만 새로 얻을 것들도 그에 비길만큼 충분히 많다.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넘어졌을 때 느끼던 두려움과 공포처럼 그분들도 겪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계신 것이다.

주변의 걱정과 울음들은 어린아이를 울린 것처럼 그들의 좌절의 감정을 확신으로 바꾸는 촉진제 역할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눈이 보일 때 가지고 있던 시각장애에 대한 왜곡된 감정들은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분들이 왜곡된 감정의 대상이 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혼돈의 근거가 될 것이다.

물론 그 왜곡된 감정들은 미디어에서 보고 느낀 간접 경험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면서 그 작은 고통과 상처가 가지는 작은 본질에 대해 정확히 알게되고 이해하게 된다.

큰소리로 울만큼 슬픈 상황이 아닌 것도 알게 되고 인생에 있어 그리 크지 않은 상처인 것도 알게 된다.

목욕탕의 뜨거운 물도 병원의 주사기도 순간의 뜨거움이나 따가움을 견디면 그 뒤에 어떤 이로움이 찾아올 것을 알기에 큰 두려움 없이 견딜 수 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원치 않는 불편한 상황을 겪게 된다.

몸이 다치기도 하고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아픈 사랑의 상처를 경험하기도 하고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잃기도 한다.

너무 힘들고 아픈 일이긴 하지만 그런 것들마저도 인생을 다 걸고 슬퍼할 만큼 큰 일은 아니다.

넘어지는 것처럼 주사 맞는 것처럼 여러 번 겪고 무뎌지는 일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다.

다행인 것은 인간이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공감하고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가졌다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의 친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혹시 모를 가난이 나를 좌절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쓰린 헤어짐의 아픔도 그런 슬픔을 겪는 이를 진심으로 위로해 본 적이 있다면 조금은 덜 어렵게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장애에 대한 인식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길을 다니다 보면 큰 소리로 ”봉사 지나간다”며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다.

난 이제 그런 사람들의 조롱에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지만 오히려 그 사람들의 미래를 걱정한다.

그들이 무시하고 비하하는 존재들은 그들의 머릿 속에 너무도 비참한 존재들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작은 사고와 약간의 부정적 변화로도 크게 쓰러질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누구나 매일매일을 10%의 확률로 예비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작은 경제적 손실에도 분명 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가난 역시도 언제 어떤 요인으로 우리를 찾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느끼는 장애와 가난도 실제로 겪는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왜곡된 인식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부족함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큰 손실에도 편히 대처하고 약함을 공감하는 사람들은 큰 상처도 빠르게 이겨낼 힘을 가졌다고 나는 확신한다.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변화에 대처하는 준비자세이다.

장애의 진실과 본질을 알아야 하는 것은 장애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는 나의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다.

넘어져서 우는 것은 작은 아이들이나 어울리는 일이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담담하게 남은 인생을 준비할 수 있는 지 여부는 지금의 건강한 당신이 어떻게 장애를 정의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주변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 그것은 결국 당신을 위한 투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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