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2021년 04월 06일 10시 32분 KST

아파트 택배 차량 금지에 택배 기사들은 "손수레 끌다 퇴근마저 3시간 늦어졌다"고 고충을 호소한다

"왜 굳이 아파트가 ‘갑질’을 하는지 모르겠다." - 한 아파트 주민이 한 말

한겨레
서울 강동구 고덕동 한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택배기사 ㄱ씨가 배송 뒤 빈 손수레를 들고 택배 차량으로 복귀하고 있다. 

 

40대 택배 기사 ㄱ씨는 화요일(6일)이 걱정이다. 지난주 화요일보다 3시간 늦은 밤 10시 퇴근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보통 화요일은 주말 동안 쌓인 택배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날이다. ㄱ씨의 퇴근 시간이 늦어지게 된 이유는 약 5000세대가 사는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한 아파트 단지가 지난 3일부터 입주민 안전, 아파트 시설물 훼손 등을 이유로 택배 차량의 지상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며칠동안 아파트 입구에 수천개의 택배 상자가 쌓이는 풍경이 연출됐다.

그러나 5일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아파트 택배 물량 쌓아두기 불가’ 방침을 추가했다. 이날 오후 아파트에서 만난 ㄱ씨는 택배 상자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있었다. ㄱ씨는 101동부터 139동까지 돌아야 한다. 다른 택배 기사들도 ㄱ씨처럼 손수레를 끌고 수십개 동을 돌 수 밖에 없다. ㄱ씨는 “나도 애 키우는 사람이라 단지 내 저속운행에 신경 썼는데 왜 택배차만 진입 금지인지 모르겠다. 아파트에서 요구하는 대로 저상차를 개조하려면 추가 비용만 백만원 넘게 부담해야 한다”며 “특수고용직이다 보니 회사도 ‘알아서 하라’는 입장이다”라고 말했다.

2018년 수도권 아파트 단지에서 택배차량의 지상출입을 금지하면서 벌어진 ‘택배 대란’이 서울에서 다시 벌어졌다. 택배 대란으로 당장 노동강도가 높아진 택배 기사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일부 입주민들도 “소통이 부족했다”며 아파트 관리사무소 결정에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러나 아파트 쪽은 “입주민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날 만난 택배 기사 ㄴ씨도 “월요일은 물량이 없어 원래 이 시간(오후 2시)에 퇴근한다. 근데 손수레를 끌어 배송하다 보니 일을 반도 못 끝냈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파트 쪽의 ‘형평성’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안전을 이유로 택배 차량 진입을 금지한다는데 이삿짐 차나 가구 배송 차는 왜 진입을 허용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실제 이날 이삿짐 차량이나 시설 정비 차량이 아파트 단지 안을 운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겨레
서울 강동구 고덕동 한 아파트 단지에 놓인 손수레에 택배가 쌓여있다.


<한겨레>가 만난 입주민들은 아파트의 결정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9년 아파트에 입주한 김아무개(45)씨는 “오늘도 택배를 들고 뛰는 기사 모습을 보고 너무 안쓰러웠다. 왜 굳이 아파트가 ‘갑질’을 하는지 모르겠다. 직접 관리사무소에 항의 전화도 했다”며 “애초에 주민들 의견을 수렴하거나 소통하는 절차도 없었다. ‘진입 불가’ 결정도 ‘진입이 어렵다’는 택배기사 문자를 보고 알았다. 다만 진입 불가 방침을 반기는 입주민들도 있다”고 말했다. 80대인 박아무개씨도 “물건이 쌓인 곳까지 가 택배를 가져오느라 불편했다. 주민 편의를 위해 택배 차량이 들어오는 게 나은데 이유를 모르겠다”며 “저속운행 등 안전을 담보하며 주민 편의도 살릴 수 있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택배 차량 지상출입 통제가 택배 대란으로 이어진 것은 해당 아파트 지하 출입구 높이가 2.3m라 일반 택배 차량으론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2019년 1월, 택배 차량 출입을 위해 지상공원형 아파트 지하주차장 입구를 2.7m로 정했지만 해당 아파트는 정부 지침이 나오기 전에 건축 승인을 받은 곳이다.

아파트 쪽은 택배기사들에게 저상차량으로 개조하라고 권고했지만, 사실상 ‘개인 사업자’(특수고용직) 신분인 택배기사들은 차량 개조 비용을 떠안는 것에 난색을 보인다. 강민욱 택배노조 교육선전국장은 “택배 기사는 특수고용노동자라 회사도 ‘나 몰라라’한다. 아파트 요구대로 저상차를 구매하거나 개조하려면 모두 개인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지금 있는 트럭도 5~6년 할부 내서 기사들이 구입해 빚 갚으며 일하는데 추가 비용을 감당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당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입주민 안전을 위해 택배 차량 지상출입 금지 입장을 고수 중이다. 관리사무소 한 관계자는 “지난해 초부터 계속 택배사에 공문을 보내 입주민 안전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 그럼에도 일부 택배차량은 속도를 높이거나 적재함 문을 열고 다녀 위협을 느낀다는 입주민 민원이 많았다. 한 어린이는 다칠 뻔하기도 했다”며 “5천 세대 택배가 들어갈 수 있는 택배보관소를 만들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택배 기사들의 ‘생존권’도 중요하겠지만 우리로선 입주민 안전을 더 중요시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파악하기론 이미 택배 기사 60%가 저상차를 사용하고 있다. 입주자대표회의 등에서 의견 수렴 절차가 있던 거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아파트도 택배 회사들과의 소통을 통해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민욱 국장은 “‘안전 문제’라는 아파트 쪽 의견에도 일부 동감한다. 그러면 저속 운행을 더 지키는 방안을 논의하면 된다. 또한 택배 기사에게만 책임을 떠넘길 게 아니라 입구 쪽 택배보관소를 만드는 등 아파트 쪽도 적극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파트가 택배 회사들과 협의해 대안을 마련한 경우도 있다. 앞서 2018년 10월, ‘택배 대란‘이 일어난 경기도 남양주 다산신도시 한 아파트에서는 입주자대표회의와 택배사협의회가 합의해 아파트 내부 특정 거점에 택배를 전달하는 ‘거점 배송’ 방식이 시행됐다.

한겨레
서울 강동구 고덕동 한 아파트 단지 내 이삿짐 트럭이 세워져있다. 택배기사들은 ‘왜 택배 트럭만 출입이 안 되냐’ë©° 형평성에 의문을 표했다. 

 

한겨레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