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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존엄사 기계'를 개발한 이유

기계 안에 들어간 사람은 1분 내에 의식을 잃고 사망한다.

  • 김태우
  • 입력 2018.04.10 09:32
  • 수정 2018.04.11 10:47
ⓒVIA PHILIP NITSCHKE

‘존엄한 죽음(dying with dignity)’에 대한 논의는 최근 몇 년 사이 엄청난 화두로 떠올랐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지지하는 단체들은 죽음을 덜 모멸적으로 경험하고 죽음의 섬뜩함보다 필요성을 부각할 수 있는 게 어떤 단체일지 경쟁에 나섰다.

죽음을 재정의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죽음에 대한 언급을 피해왔다. 아이들에게도 죽음을 숨겨왔던 우리다. 그에 비하면 존엄성에 초점을 맞추는 현재 우리의 대화는 칭찬할 만하지만, 우리가 어떤 죽음을 원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어설프고 두루뭉술하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의 의도와 의미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직 우리의 논의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뿐이다. 

20여 년 전, 나는 위독한 환자의 동의에 따라 합법적인 치사 주사를 놓은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이는 호주가 잠시 도입했던 말기 환자 인권법에 따른 것으로, 네 명의 환자에게 시행했다. 당시 나는 자신감, 아니, 오만함을 가지고 죽음에 접근했다. 나는 50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었고, 죽음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의료계에서 경력을 쌓으면서 나는 죽음에 있어 의학보다는 인권에 초점을 두도록 시각의 변화를 거쳤다.

세계 최초의 자발적인 안락사 법이 폐지된 뒤에는 비영리단체인 엑시트 인터내셔널(Exit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우리는 50세 이상의 성인이라면 존엄한 죽음(안락사)을 맞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 덕에 나는 ‘죽을 권리’에 대한 토론에서 한쪽 끝에 서게 되었다. 

‘안락사(euthanasia)‘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됐으며, ‘좋은 죽음‘을 뜻한다. 우리는 왜 ‘좋은 죽음’을 목표로 삼지 않을까? 왜 말기 환자가 되어야만 존엄을 지키고 죽을 수 있을까?

존엄한 죽음이 불평등한 특권으로 여겨지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특히 현대 의학이 발전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살 수 있게 됐다.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하나 더 등장한다.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서구 사람들은 더 오래 살지만, 덜 건강한 삶을 산다. 나는 이 현실을 매일 목격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 놀랄 수도 있지만, 엑시트 인터내셔널의 회원 중 대다수는 건강한 고령자다. 최소한 지금은 말이다.

그들이 늘 건강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들이 존엄한 죽음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마치 보험과도 같다. 건강과 삶의 질이 어느 날 나빠질 수도 있으니 안전망을 두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계획을 미리 세워두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이들도 있다. 이게 소름 끼치는가? 자기 죽음을 미리 계획하는 게 우울한 일인가?

엑시트 인터내셔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출구 전략’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얻는 경우를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봤다. 통제권을 쥐는 건 자신감을 키워준다. 존엄한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안다면 사는 동안에도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우리가 만약 존엄성보다 큰 걸 바란다면 어떻게 될까? 지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생애 가장 신나는 날이 될 거라고 감히 상상해 본다면? 존엄성은 우리의 마지막이 될까, 아니면 그저 당연한 것이 될까? 

나는 내 삶의 마지막 날을 상상하며 종말이 가까워졌을 때 기분을 돋궈줄 무언가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출신 공학자 알렉스 바닝크와 함께 ‘더 사르코(The Sarco)‘를 개발했다. 더 사르코는 3D 프린트로 만들 수 있는 기계로, 안에 들어간 사람을 저산소증으로 죽게 만든다. 죽음이 ‘그저 존엄하기만한 개념’ 이상이어야 한다는 내 생각을 처음으로 구현한 기계다. 

ⓒVIA PHILIP NITSCHKE

사르코는 어디로든 가져갈 수 있다. 로키산맥의 경이로운 풍경이나 태평양의 파도 앞에서도 작동된다. 죽는 장소 역시 중요한 요소이니 말이다.

좋은 풍경을 보며 죽음을 맞이하는 건 새로운 발상이 아니다. 영화 ‘소일렌트 그린’은 아름다운 그림과 마음을 달래주는 배경 음악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주는 평화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획기적인 영화에서 다루지 않은 한 가지는 죽음이 주는 기쁨이다. 죽으면서 기쁨을 느끼지 못할 이유는 뭔가?

저산소증은 기쁨을 줄 수 있다. 급격한 기내 감압을 경험해본 사람에게 물어보시라. 술에 취한 듯한 혼미함에 산소마스크를 써야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공군에서 복무하던 시절, 훈련실 산소 농도를 낮추고 친구에게 편지를 쓰라는 명령을 받았다. 산소가 지상 수준으로 돌아온 뒤에 다시 읽어봤더니 편지는 엉망진창이었지만,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 쓴 글 같았다.

나는 워크숍에서 “죽음은 한 번뿐이니 최고의 죽음을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종종 말하곤 한다. 최면제인 넴부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안락사할 때 쓰이는 넴부탈은 평화롭고 확실하며 존엄하기는 하지만, ‘기쁜 죽음’으로 이르지는 못한다.

사르코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사용자들은 정신 건강을 검증하는 온라인 테스트를 거치고, 이 시험을 통과할 경우 24시간 동안 쓸 수 있는 사르코 사용 코드를 받게 된다. 이 코드를 입력하고 추가 확인 절차를 거치면 기계 안의 액체 질소가 방출되어 캡슐 안의 산소 농도가 급격히 낮아진다. 사용자는 그 후 1분 안에 의식을 잃고 곧 사망하게 된다.

사르코를 통한 죽음에는 고통이 없다. 질식하거나 숨 막히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하고 취한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사르코는 ‘당신이 맞을 수 있는 최고의 죽음을 맞으라’는 나의 말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했다.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면서 희열을 느끼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단편 영화 ‘H 포지티브’에도 비슷한 개념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마크는 ”죽을 때 피 속에 최면제가 아닌 아드레날린이 흐르기를 원한다”라고 말한다.

불치병 진단을 받은 마크는 ‘존엄사 롤러코스터’를 만든다. 엄청난 중력가속도 때문에 산소 결핍이 일어나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죽음과 동시에 엄청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관객마다 마크의 죽음에 대한 반응은 다를 수 있지만, 그의 죽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다. 지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은 모두 특별하다는 것이다. 죽을 때의 기분을 비참한, 고통, 정신적 괴로움의 정도가 아닌 긍정적인 방법으로 측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모두가 사르코의 등장을 환영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년이면 사르코의 기술이 오픈 소스로 공개된다. 나는 사르코가 널리 사랑받기를, 사르코를 통해 죽음에 대한 우리의 대화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허프포스트US의 ‘Here’s Why I Invented A ‘Death Machine’ That Lets People Take Their Own Lives’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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