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강간’이라는 말을 아는가? 주로 데이트 상대나 친구 등 아는 사람에게 당하는 동의 없는 성행위를 뜻한다. 나는 데이트 강간이라는 말이 일본에서 알려지기 전에 그 일을 겪었다. 그땐 아무리 애인이라고 해도 동의하지 않은 섹스 및 유사행위를 시도한다면 그게 강간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만약 이 사실을 알았다면 뭔가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이 기사에는 일부 섹스 및 성폭력 관련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섹스는 3개월은 만나본 뒤에 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두 번째 데이트만에 동의 없는 섹스를 시도했다
전 남자친구와 사귀기 시작하고 몇 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데이트 후 막차를 놓친 그는 우리 집에 왔고, 그를 집에 데려온 나의 행동을 ‘OK 사인’이라고 받아들이더니 피임하지 않고 섹스를 했다.
그는 나와 사귀기 전 만나던 상대와 처음 섹스를 한 후 ”〇개월이나 기다린 나는 좋은 사람”이란 말을 하기도, 갑작스럽게 결정된 첫 데이트에 레스토랑을 예약하지 못한 걸 ‘멋없다’며 사과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사귄 지 3개월 동안은 섹스하고 싶지 않다고 확실히 말했다.
하지만 그는 사귄 후 두 번째 데이트에서 키스를 하고 갑자기 속옷에 손을 넣었다. 그에게 혐오와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럽게 손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섹스라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믿을 수 있는 상대와만 하고 싶고, 그러려면 일정한 기간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잘 하지 못했다.
결국 그와 섹스를 했지만 ‘동의’를 묻는 말은 듣지도 못했다. 섹스 중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가 콘돔을 끼지 않아 지적하자 그저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너무 불안해서 혼자 병원에 갔다. 나는 그와 사귀는 사이이며, 그렇기에 섹스도 할 수 있다고 안정해보려 했지만 병원 앞에선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산부인과에서 사후 피임약을 처방받았다. 사후 피임약은 보험이 안 되고, 먹어도 임신할 가능성이 있고, 2만 9700엔 (한화 약 31만 1500원)이나 한다는 걸 알았다. 편의점에서 돈을 찾아 처방된 약을 사서 먹었다. 너무 슬펐지만, 왜 슬픈지도 모른 채 2주일 후 생리를 했다. 남자친구에게 생리 소식을 전했을 때 그는 ”정말 다행이야”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마치 남의 일처럼 말이다. 그 후에도 그와 계속 만났다.
처음으로 ‘성적 동의’란 말을 배우며 내가 강간 피해자인 걸 깨달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친구에 대한 위화감은 커졌다. 점점 그와의 섹스가 고통스러워져 결국 이별했다. 조금 지나자 영화에서 성폭력 장면을 보면 눈물이 흘렀고 과호흡이 왔다. 성 묘사가 있는 영화나 만화에 혐오감이 치밀어 오르고, 그와 비슷한 체격이나 복장의 사람을 보면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정신이 불안정 해지고 술을 많이 마셨다.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는 날도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뭐가 이상한지 모르는 상태가 계속됐다. 그러다 ‘성적 동의’란 말을 알게 됐다.
‘설마’라고 생각하며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책을 읽고 상담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피해자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동의 없는 성행위는 강간과 다를 게 없었다. 첫 섹스에서 느낀 슬픔과 위화감은 소중하게 대해주길 원한 남자친구에게 동의 없이 성행위를 강요당한 슬픔이었다. 이미 그와 헤어진 지 6개월, 강간 피해로부터 1년 이상 지난 시점에야 이 사실을 깨달았다.
고민 끝에 그에게 전화를 걸어 첫 섹스할 때 ‘성적 동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사귀는 사람인데 그런 걸 동의할 필요 없다. 너 역시 이별을 말하고 나를 흔들었으니 내 기분을 상하게 한 가해자다”라고 말했다.
그는 합의 없이 성행위를 강요한 것과 이별을 말한 게 같은 수준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강간은 개인의 인격과 존엄을 짓밟고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합의해 이별한 걸 같은 취급하다니?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왜 미디어와 사회는 데이트 성폭력을 당연시하고, 그게 강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을까?
이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왜 당시 남자친구의 행동이 성폭력인 걸 몰랐을까? 매일 괴로웠다. 주위 사람은 ”빨리 잊어버리는 게 좋다”고 했지만 잊힐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조심하지 않았고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한심함을 느꼈다. 그러나 같은 질문을 반복할수록 사회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일본에서는 동의 없는 성행위는 성폭력이라는 인식이 부족하다. 오히려 동의 없는 성행위를 일종의 ‘로맨틱한 연애’로 생각하는 풍조가 있다. 많은 일본인이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보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좋은 예다.
예를 들어, 내가 중학생일 때 유행하던 만화에는 주인공이 성폭력을 당하는 장면이 초반부터 등장한다. 믿기 어렵게도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는 영웅이고 그렇게 연애가 시작된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억지로 키스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거다. 그러나 억지로 키스하는 행위는 현실에서 성폭력이다. 이런 성폭력을 자행하는 묘사가 만화나 드라마에서는 ‘심쿵’하는 장면처럼 묘사되고, 사람들은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소비한다. 급기야 성폭력을 당했는데도 여주인공은 그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
분명 성폭력인데 ‘좋아해서 참을 수 없었을 뿐‘이라는 면죄부가 주어진다. 이런 표현들은 섹스나 성에 관한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다. 강간이나 성폭력을 연애의 한 요소로 묘사함으로써 많은 피해자가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어려워진다. 연애 만화뿐 아니라 어린이 애니메이션 ‘도라에몽’에도 문제가 되는 장면이 나온다. 진구 같은 남자캐릭터가 ‘도라에몽’ 속 히로인 이슬이가 목욕하는 모습을 몰래 보는 장면이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어린이용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표현은 많은 사람의 가치관이나 생각에 영향을 준다. 또, 대체 어디서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을 수 있는가? 학교 성교육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은 매우 한정적이다.
초등학교 성교육 시간에는 생리란 여자아이가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성기 이름을 인쇄된 프린트물에 적어 넣었을 뿐이었다. 중학생 때는 성병을 배우고 바나나에 콘돔을 씌우는 걸 배운 게 다였다. 하지만 ‘성적 동의’의 중요성과 성폭력에 관한 지식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학교는 섹스와 성을 이야기하는 걸 금기시하고 가족 내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꺼내기 어렵다. 결국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부정확한 정보나 포르노와 만화, 애니메이션 또는 소설에서 우리는 섹스를 배운다.
성폭력을 일종의 연애로 소비하고, 성을 금기시하기만 하고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자라는 건, ‘강간을 당하라’는 말과 같다. 19세 때 강간당한 나를 만약 지금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단지 사귄다는 이유로, 평소에도 섹스를 자주 했다는 이유로 동의 없는 섹스를 해서는 안 된다. 소중한 사람이라도 당신의 의사에 반해 몸을 만지거나 키스를 할 권리는 없다. 섹스를 할 때나 키스, 애무 등을 포함한 모든 성적 행위에는 매번 서로의 적극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상대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진짜 원하는지 확실한 동의를 얻어야 한다. 평소에도 ‘싫다’ 또는 거부 의사를 말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의사에 반하는 성행위를 강요당하거나 성폭력을 당해도 그 일로 자신을 비난하지 말라.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
*허프포스트 일본판에 실린 독자 기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