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2020년 03월 08일 16시 28분 KST

신종 코로나로 답답한 생활 중인 한 대구 할머니의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전문)

신종 코로나의 최전선인 대구 중구에 거주하는 시민이다.

박영자씨 제공
박영자 할머니(74)가 대구 중구 자택에서 손주와 함께 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

″냉동실 발가벗고 나니 은행 갈 일 별로 없고 한 달 생활비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부자 된 기분이다. (중략) 혼자 즐기는 법도 배우고 각자 위생을 챙기면서 희망을 가지면 그 또한 지나갈 것이다.”

박영자 할머니(74)가 지난 6일 휴대전화로 글쓰기 모임 지인들에게 보낸 ‘비우니 채워지더라’라는 글의 일부다. 사람과 사람을 타고 기자에게도 전해진 글은 삶의 지혜를 나눠줄 노년의 재치와 해학이 문장마다 넘친다. 생활의 미학이랄까.

한데 찬찬히 읽다보면 군데군데 시선이 멈춰선다. ‘어쩌다 운동 나가면 모자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거지같이 나가도 누가 날 알아볼 리도 없고 부끄럽지도 않다.’ 글이 건너온 경로를 거꾸로 물어물어 보니 박 할머니 사는 곳이 대구 중구라 했다.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의 최전선이다.

박 할머니의 글은 먹구름 뒤덮인 답답한 현실을 뒤집는 역설이자 희망이었다. 글은 ‘힘들다, 어렵다 하지 말고 즐기면서 사는 현명한 방법을 터득해서 우리 함께 위기를 잘 극복하자’고 제안하며 끝을 맺는다.

박 할머니는 8일 뉴스1과의 통화에서 ”코로나19 사태 이후 한 달째 집에만 있었더니 무기력해지더라”며 ”이건 아니다 싶어 장롱도 뒤지고 냉장고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번 비워보자는 생각에 이것저것 정리하다 보니 생각이 들었다”고 글 쓴 계기를 전했다.

″모두가 힘든 시기지만 집에서도 얼마든지 불안하거나 지겹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더라고요. (코로나19 사태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겹다고 생각하면 하루도 못 버텨요. 오히려 이번에 좋은 습관을 기를 기회라고도 생각해요.”

 

 <비우니 채워지더라>

오늘은 갈치, 내일은 고등어.

설날 남긴 냉동실 나물 녹여 비빔밥 해 먹고, 떡국 떡 꺼내서 어묵 넣으면 문구점 떡볶이로 변신하고, 신 김치에 냉동 돼지고기 넣고 버터 한 스푼 넣어 푹 끓이면 오모가리 김치찌개 되고, 탕국 데워 밥 해동 시켜 말아 먹으니 제사밥 먹는 것 같고,

보름찰밥 해동은 밥 하루 안 해도 되는 공짜 삶이 되고, 콩, 조, 밤등은 영양밥으로 변신하고, 곶감, 유과, 약과는 심심풀이 간식 되고, 인절미 녹여서 콩가루 무치니 고소한 찰떡이 되고, 절편 녹여 후라이팬에 구우면 바삭한 맛이 일품이다. 꿀 찍어 먹어봐.

작년 가을 깊숙이 모셔둔 송이는 아들 오는 날 별식이 되고, 꽁꽁언 불린 미역으로 쌀 뜨물 넣어 담백한 미역국도 끓이고, 제사 때 쓴 북어포는 무우 빚어 넣고 계란 풀어 해장국 끓이고, 명란 젖 얼린 것으로 계란찜도 하고,

새우 젖 넣고 잘생긴 무우에 쪽파넣어 봄 깍두기 만들고, 묵은지 두어 번 씻어 찬밥에다 달래장 살짝 얹어 먹으면 입안에 봄이 한가득, 돌덩이 같은 시래기 꺼내어 멸치 육수에 콩가루 무쳐 국 끓이면(무우도 한칼 넣고) 콩가루가 몽글몽글 입안으로 절로 넘어간다.

냉동실 발가벗고 나니 은행 갈 일 별로 없고 한 달 생활비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부자 된 기분이다.

바깥나들이 안 하니 카드비 3분의 2가 줄고, 목욕탕 안가고 집에서 샤워만 하니 목욕비 줄고, 아침저녁으로 씻던것 하루 한번도 귀찮아서 안 하니 수도요금 줄고, 머리 자주 안 감으니 샴푸 린스 꼭지가 마르고,

손자 녀석 운동화 1주일에 한 번씩 씻는 것 한 달이 되어도 씻을 일 없고, 세수하면서 속옷과 가벼운 옷 주물러 빨면 세탁기 돌아갈 일 없고, 손자 녀석 학원 안 가니 학원비 나갈 일 없고, 어쩌다 운동 나가면 모자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거지같이 나가도 누가 날 알아볼 리도 없고 부끄럽지도 않다.

통닭이 먹고 싶으면 전국에서 시켜줘도 대구에서 집 턱 앞에 배달되는 세상이니 코로나만 아니면 좀 답답해서 그렇지 비우고 나니 얻는 것도 많음을 깨달았다. 혼자 즐기는 법도 배우고 각자 위생을 챙기면서 희망을 가지면 그 또한 지나갈 것이다. 인적이 드문 조용한 시간대에 나가서 햇볕 좀 쪼이고 가벼운 운동도 한다.

열려있는 꽃가게에서 작은 화분 몇 개 사서 오면 베란다 문을 열 때마다 천리향, 긴끼아나, 수선화, 히야신스 향기가 내 몸속으로 깊숙히 스며들어와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보리 한 되 사 와서 모아둔 플라스틱 통에 보리싹을 키우니 먹기도 하고 집안이 푸른 잔디밭이 되었다.

힘들다, 어렵다 하지 말고 즐기면서 사는 현명한 방법을 터득해서 우리 함께 위기를 잘 극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