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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니컬러스 케이지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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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게티>나 <로이터> 같은 국제 통신사들이 올리는 북한 사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취미가 생겼다. 니컬러스 케이지 때문이다. 1990년대 전성기를 누리다 지금은 싸구려 B급 영화에나 간간이 출연하는 바로 그 배우 말이다. 한물간 할리우드 스타와 북한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냐고? 아니다. 케이지는 북한을 방문한 적이 없다. 북한 관련 영화에 출연한 적도 없다. 북한에 투자한 적도 없다. 그와 한국의 관계는 이혼한 전 부인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왜 니컬러스 케이지인가.

북으로 잘못 배달된 쿠션

몇 달 전 미국 온라인 쇼핑몰 ‘이베이’에서 케이지가 그려진 쿠션 커버를 샀다. 이유는 그저 ‘웃겨서’였다. 나는 집을 온갖 웃긴 물건들로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케이지의 얼굴이 징그러울 정도로 꼼꼼하게 박힌 쿠션을 이베이에서 보자마자 완전히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 지구의 누군가는 대체 왜 케이지 얼굴이 인쇄된 쿠션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아마 그 이유는 그저 ‘웃겨서’일 것이다. 케이지는 확실히 할리우드 스타답지 않게 어수룩하고 어딘가 빈 듯한 매력이 있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물건이 오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케이지 쿠션은 경쾌한 택배 기사님의 “택배 왔어요!”라는 외침과 함께 집에 오질 않았다. 이베이에는 고객의 배송 불만을 처리하는 센터가 있다. 배송 문의를 했더니 일주일 만에 이런 대답이 왔다. “저희도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주문하신 아이템이 북한으로 잘못 배송됐습니다. 저희가 다시 보내드려도 괜찮을까요? 배송비는 당연히 무료입니다.”

영국의 이베이 판매자는 아마 헷갈렸을 것이다. 해외 직구를 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Korea는 ‘North Korea’와 ‘South Korea’로 분류되지 않는다. 정확한 영어 국명인 ‘People’s Republic of Korea’와 ‘Republic of Korea’로 분류된다. 남한인인 나조차 종종 어떤 게 북한이고 남한인지 헷갈린다. 그러니 물건을 북한으로 보내버린 영국의 순진한 이베이 판매자를 비난할 자격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쿠션은 어디에 있을까. 몇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먼저, 쿠션은 북한으로 갔다가 검색대에 걸려 세관 창고에 보관됐을 수 있다. 둘째, 북한 세관 직원이 몰래 빼돌렸을 수 있다. 북한 주민들 역시 할리우드 영화를 불법으로 들여와 본다는데, 어쩌면 <콘에어>나 <더 록>을 불법 비디오로 보고 케이지의 팬이 된 세관 직원일지도 모른다. 세 번째 가능성. 이건 좀 슬프다. 북한 세관은 평양에 사는 김도훈씨 집을 급습해서 할리우드 스타의 얼굴이 그려진 쿠션을 제국적 자본주의 상거래 사이트에서 불법으로 사들인 죄로 구속했을 수도 있다. 쿠션이 평양으로 날아간 것은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이니 충분히 가능한 악몽이다. 평양의 김도훈씨는 “니코라 케이지가 누군지 모릅네다. 고저 정상을 참작해주시라요”라고 울부짖다가 지금쯤 연해주 접경 지역에서 강제 노동을….

쿠션 찾으러 평양 가볼까

나로서는 제발 두 번째 가능성이 실현됐기를 바란다. 케이지의 은밀한 팬인 북한 세관 직원이 평양의 거실에 이 쿠션을 두고 은밀하게 애용해주기를 간절히 빈다. 혹은 평양의 김도훈씨가 쿠션을 받아 행복하게 사용하기를 바란다. 종전이 선언되고 남북 민간 교류가 가능해지는 날, 나는 니컬러스 케이지 쿠션을 돌려받으러 평양을 방문할 생각이다.

* 한겨레21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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