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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 집단에 속해 20년을 산 내가 그 집단에서 벗어난 방법

"한 번도 되돌아보지 않았다."

ⓒINDEPENDENT

나는 20년 넘게 초월명상(TM) 창립자이자 비틀즈, 비치보이스, 디팩 초프라 같은 유명인사의 구루 역할까지 했던 인도의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가 운영하는 아시람(ashram)에서 살았다. 그중의 6년은 마하리시의 참모 역할까지 맡았다.

TM을 광신집단으로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TM에서 배운 대로 하루에 두 번씩 집에서 명상하는 게 모두인 사람은 TM을 광신종교로 여길 리 없다. 마하리시는 TM을 1959년에 서양에 처음 알렸는데, 그 과정에서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쉽고 간단한 동작 정도로 소개했다. 우리 라이프스타일, 일상, 종교에 변화가 요구되지 않는 듯했다. 하루에 두 번씩 명상을 하는 그 자체로 삶이 저절로 나아질 거라고 배웠다. 그리고 정말로 나아졌다. 적어도 내 삶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나는 TM이 정말로 좋았다. 이전에 몰랐던, 낯선 걸 새로 체험하는 느낌이었다. 내적 평화로 인한 진정한 행복감이었다. TM을 22년 동안 따르며 나는 명상을 통해 기쁨과 행복만 체험했다. 나는 마하리시도 사랑했다. 그의 매력적인 아우라와 최면이라도 걸릴 듯한 그의 성품에 빠졌다. 그러다 6년간 그의 유럽 지구 참모로 활동하게 됐다. 마하리시의 최측근이 된 것이다.

스탭으로 일하는 동안 나는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감정적 롤러코스터를 인내해야 했다. 마하리시는 나를 지목해 일종의 개심′자아’수술을 하곤 했다. 그의 기분에 따라 나는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지구 멸망을 막을 대단한 사람에서 가장 역겹고 하찮은 쓸모없는 지렁이로 변했다. 교관이 새 훈련병을 아끼는 마음에서 혹독하게 교육하듯이 마하리시도 측근들을 혹독하게 대했다. 400명 넘는 TM 회원 앞에서 그에게 공개적으로 혼난 적도 있다.

TM의 광신적인 면은 1979년 앰허스트 매사추세츠에서 처음 엿봤다. 당시 마하리시는 ‘세계 평화 모임‘이란 제목으로 2,600여 명이 모인 명상 대회를 진행 중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신성한 어머니‘라는 여신이 자신에게 직접 나타나 범죄와 전쟁과 환경적 독소가 지구를 오염시켰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평화를 위한 자신의 ‘세계적인 계획’이 빨리 성과를 내지 못하자 여신이 화가 났고 그래서 여신이 인류를 멸망하겠다고 위협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하리시의 간청에 못 이긴 여신이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고 전했다.

마하리시는 더는 시간이 없다며 세상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닥쳐있다고 말했다. 모두 짐을 챙겨 1주일 내로 아이오와로 이주한 다음 세계의 멸망을 방지하기 위한 공동 명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약 1,000여 명이 아이오와주 페어필드에 있는 마하리시 인터네셔널 유니버시티(MIU)로 이주했다. 광신은 그곳에서 우리 삶을 서서히 지배했다. 값비싼 수강료와 제품을 구매하느라 모두 전 재산을 탕진했다.

MIU 부지에는 금색으로 칠한 대형 지오데식 돔(geodesic dome) 두 개가 있었다. 남녀가 따로 모여 명상하는 곳이었다. 마하리시가 전송한 방송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떨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경우 우리가 곧 핵무기 대학살 또는 지구 종말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우리를 겨냥한 그의 교묘한 공포 및 협박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는 미끼를 사용하는 데도 능숙했다. 칭찬 말이다. 우리를 가리켜 일반인보다 몇 배 더 월등한 사람이라며 터무니없는 고위 직함을 부여했다. 자기가 임의로 만든 조직 체계의 일원으로 ‘이그제큐티브 주지사’ 같은 직함을 남발했다. 

우리는 마하리시의 확고한 종교관과 이에 따른 엄격한 일정을 무조건 따랐다. 뭘 먹을지, 뭘 입을지, 어디에 살지, 뭘 믿을지, 뭘 말할지, 뭘 읽고 뭘 읽지 말아야 할지, 어떤 활동이 좋을지, 심지어 사는 집의 구조까지 그의 숨통 막히는 지시를 모두 따라야 했다. 그의 광신적인 면모가 더 두드러지면서 추종자들도 더 배타적인, 더 파벌적인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은 ”프로그램에 속하는 이”였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프로그램에서 제외된 이”, 즉 추방된 인물로 낙인되어 커뮤니티로부터 소외당했다. 그런 사람에게는 지오데식 돔 입장은 물론 TM 수업도 금지됐다.

우리는 페어(Fair)필드에서 사는 게 아니라 피어(Fear)필드에서 살고 있었다. 조직을 이끄는 우리의 지도자들이 바로 공포 대상이었다. TM만이 깨우침의 유일한 길이고 마하리시만이 진정한 영적 스승이라고 믿는 우리에게는 TM이라는 천당에서 추방되는 게 가장 큰 공포였기 때문이다. 영적 ‘초월(超越)’을 달성할 기회가 사라진다며 우리는 방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값어치를 증명해야 했다.  

억압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 심해졌다. TM 출간물이 아닌 요가, 명상, 뉴에이지, 다른 인도 출신 구루 등이 쓴 자기조력 도서를 포함한 모든 ‘부정적인’ 도서가 MIU 도서관에서 사라졌다. 다른 영적 스승을 만나는 것, TM이 승인하지 않은 다른 수업을 듣는 것, 하물며 인도로 여행을 가는 것도 금지됐다. 

MIU와 MSAE(Maharishi School for the Age of Enlightenment) 강사들은 창의적인 생각을 가진 학생을 나무랐다. ‘부정적’ 이미지(예를 들어 괴물)를 그리거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쓰는 학생도 질책 대상이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도모하는” 행위는 ”프로그램에서 제외”되는 지름길이었다. 알코올, 마약 등 중독자들을 위한 상담 서비스는커녕 중독자 치유 모임도 제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명상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 거라는 비난만 받았다.

나는 내가 독재적이고 억압적인 조직에서 공포 때문에 20년 넘게 살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6년 집에서 가진 소규모 기도 모임을 시작으로 자유를 향한 작은 발걸음을 디뎠다. 

그런데 TM 간첩들은 내 집 근처에 주차된 자동차 번호판들을 기록한 뒤 그 주인들의 금색 돔 배지를 빼앗음과 동시에 그 사람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거의 모든 페어필드 주민들이 나를 피했다. ‘기피할 인물’로 낙인된 나는 집을 팔고 페어필드를 떠날 때가 됐다는 걸 깨달았다.

나와 마하리시, 나와 수많은 친구를 이어주는 선을 끊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페어필드를 1989년에 떠나기로 한 것은 정말로 잘한 결정이었다. 나에 대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었고 나를 돌볼 능력도 갖추게 됐다. 나는 한 번도 되돌아보지 않았다. 

*허프포스트UK의 글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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