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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2시간 이상 근무" : 역학조사관들은 정서적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확진자 동선을 파악하고, 원인을 분석하는 일을 한다.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583명 발생한 26일 오전 서울 강서구보건소 내 선별진료소에서 시민들이 코로나19 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2020.11.26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583명 발생한 26일 오전 서울 강서구보건소 내 선별진료소에서 시민들이 코로나19 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2020.11.26 ⓒ뉴스1

#1.

8개월째 코로나19 감염병 최일선에서 근무하고 있는 역학조사관 ㄱ씨는 최근 고속도로를 달리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3주 연속 쉬는 날 없이 일한 뒤 맞이한 모처럼의 주말이었다. ㄱ씨는 운전 도중 계속해서 역학조사했던 이들을 떠올렸다고 했다. ‘내가 그 확진자를 그렇게 해서 접촉자로 분류했는데, 과연 이 사람이 확진자일 확률이 몇 프로나 될까’, ‘내가 풀어준 사람이 안 걸릴 확률은 몇 프로나 될까’ 이런 생각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확진자 역학조사를 하루에 5명씩 했을 테니까 모든 동선에 대해 마음이 걸리는 사람도 있고, 괜히 풀어줬나 생각 드는 사람도 있고, 나 때문에 저 사람 생계를 막은 건 아닐까 수만 가지 생각을 하다가 사고가 났어요.”

#2.

7개월 동안 근무한 역학조사관 ㄴ씨는 최근 자신이 상당히 냉소적으로 변했다고 느낀다. 업무 외의 상황에 대해 자주 자조적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할 때 “지쳐 보인다”는 얘기도 많이 듣는다. 많은 사람들을 역학조사로 접하면서 ㄴ씨는 부쩍 인간 불신이 강해졌다고 했다. “확진자든 밀접접촉자든 일반 동선에 있는 사람이든 아무리 얘기를 해도 객관적인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아요. 지침상 그런 게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생각이 그렇게 바뀌었어요. 최근 좀 날카로운 것 같다는 얘기도 3번 정도 들은 것 같습니다.”

25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청에 근무하는 공익근무자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임시 선별진료소에서 보건소 직원들이 전수 조사를 준비하고 있다. 2020.11.25
25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청에 근무하는 공익근무자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임시 선별진료소에서 보건소 직원들이 전수 조사를 준비하고 있다. 2020.11.25 ⓒ뉴스1

코로나19 확신이 장기화하면서 ‘감염병 소방수’로 불리는 역학조사관들의 누적된 피로도가 극에 달해 10명 중 8명은 정서적 탈진 상태이고, 4명 중 1명은 울분 수준이 ‘심각’ 상태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역학조사관은 감염병에 걸린 사람을 찾고 동선을 파악하며 그 원인을 분석하고 예방하는 구실을 한다.

26일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팀이 경기도에 소속된 역학조사관 20명을 ‘초점집단면접’(focus group interview)한 결과, 코로나19 사태에 방역 최일선에 뛰어든 역학조사관들은 심각한 과잉노동과 그로 인한 감정 고갈과 냉소, 울분 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조사는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7일까지 모두 5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바탕으로 결과를 도출했다. 참여한 역학조사관의 평균 근무 기간은 6.8개월, 최장 근무 기간은 9개월이었다.

강남구청 재난안전과 박경욱 주무관이 지난 9월24일 자가격리 대상자의 문 앞에서 전화로 준수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강남구청 재난안전과 박경욱 주무관이 지난 9월24일 자가격리 대상자의 문 앞에서 전화로 준수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한겨레

조사 결과, 역학조사관들은 확진자 증가 시기에 하루 12시간 이상 근무한 경우, 최근 1주일 사이 새벽 4~5시께 귀가한 경우, 오전 7시에 다시 업무배치 연락을 받은 경우 등 상당한 수준의 초과 근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코로나19 대응 근무 경력이 10개월 된 역학조사관 ㄷ씨는 인터뷰에서 “이번 주를 기준으로 따졌을 때 하루 안에 잠이 들어본 적이 없다. 늘 다음날 새벽까지 일한 다음 잠이 들어서 이번 주 제일 짧게 근무한 게 어젯밤 12시에 끝난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역학조사관 ㄹ씨는 “근래 한 석달 전부터 매번 잘 때마다 역학조사를 하는 꿈을 꾼다”며 “심지어 며칠 쉬었을 때는 마지막 쉬는 날쯤에 아무런 꿈을 안 꿨는데, 다음날 바로 출근해서 역학조사를 하니까 그날 밤에 또 역학 조사하는 꿈을 꾼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역학조사관들은 번아웃 초기 증세를 보였다. 인터뷰 참여자 20명 가운데 80%(16명)는 감정 고갈의 기준점인 3.2점 이상의 점수를 기록하는 ‘정서적 고갈’ 상태를 보였다. 20명의 감정 고갈 평균값은 4.31점이나 됐다. 또한 20명 가운데 55%(11명)는 냉소의 기준 절단값 2.2점을 상회하는 점수를 나타냈고, 평균값은 2.61점이었다. 아울러 20명 가운데 80%(16명)는 효능감 저하 상태(4.0점 이하)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 인터뷰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외상후울분장애’(PTED)를 조사했더니, 이들의 울분 평균값은 2.04점으로 ‘지속되는 울분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는 울분 상태가 ‘심각한 수준’(2.5점 이상)인 응답자가 25%(5명), ‘지속되는 울분’(1.6~2.5점) 상태는 45%(9명)이었다. 연구팀이 이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심각한 수준’은 10.7%, ‘지속적 울분’은 32.8%였던 것과 견주면, 역학조사관들의 울분 상태가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유명순 교수는 “고강도 초과근무에 견줘 역학조사관에 대한 빈약한 사회적 인정과 경제적 보상의 문제는 이들의 번아웃과 울분이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 된 이유”라며 “최근 감염자가 급증세를 보이고 있는 지금, 현장 방역 인력의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타격을 최소화할 보완책 없이 적극적인 역학조사를 통한 상황 호전을 요구하거나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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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