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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도 시청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코로나 브리핑 수어통역사들이 하고 싶었던 말들

보건복지부 코로나19 브리핑 수어통역사 인터뷰

  • 박수진
  • 입력 2020.06.15 11:12
  • 수정 2020.06.15 11:24

아침 8시40분 오송발 케이티엑스(KTX). 그는 요즘 1주일에 2~3일 이 기차에 오르며 하루를 시작한다. 코로나19 브리핑 현장에서 농인(청각장애인)의 귀가 되어주는 김동호 수어 통역사 이야기다.

코로나19로 수어 통역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있다. 그들은 표정으로도 의미를 전달해야 해 마스크도 착용하지 못하고 통역에 온 신경을 쓴다. 김동호 통역사는 “농인들의 인권이 주목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10일 서울 <한국방송></div>에서 ‘덕분에 감사합니다'를 수어로 전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수어 통역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있다. 그들은 표정으로도 의미를 전달해야 해 마스크도 착용하지 못하고 통역에 온 신경을 쓴다. 김동호 통역사는 “농인들의 인권이 주목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10일 서울 <한국방송>에서 ‘덕분에 감사합니다'를 수어로 전하고 있다. ⓒ한겨레/박종식 기자

오송역에서 버스를 타고 세종에 도착해 11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을 통역한 뒤, 오송에 돌아와 1시30분 식품의약품안전처, 2시10분 중앙방역대책본부 통역을 마치고 늦은 오후 다시 케이티엑스에 몸을 싣는다. 갈 때는 시작이었지만, 올 때는 끝이 아니다. 곧장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국방송>(KBS)으로 달려가 저녁 8시30분 뉴스와 마감 뉴스(밤 11시40분) 통역을 준비한다.

“요즘은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에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지난 10일 한국방송에서 만난 김동호 통역사가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수어 통역사 생활 17년 중에 요즘처럼 뿌듯한 나날도 없다. 정부가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처음으로 정례브리핑에 수어 통역사를 배치한 것이다. 현재 김동호 통역사를 포함해 고은미·고경희·윤남·권동호·신환희 통역사가 2명씩 팀을 이뤄 1주일에 2~3일씩 번갈아 통역을 맡는다.

고은미, 신환희 통역사
고은미, 신환희 통역사 ⓒ보건복지부 제공
고경희, 김동호 통역사
고경희, 김동호 통역사 ⓒ보건복지부 제공
권동호, 윤남 통역사
권동호, 윤남 통역사 ⓒ보건복지부 제공

지난 2월4일부터 투입됐는데, 수어를 하나의 언어로 인식한 의미 있는 변화라고 이들은 해석한다.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이 통과되면서 수어는 국어로 인정받았지만 세간의 인식은 미미하다. 서면 인터뷰로 만난 권동호 통역사는 “그나마 코로나19로 재난브리핑 현장에 수어 통역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면서, 수어 사용자인 농인이 정보 접근이라는 기본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관련 영상에 “수어 통역사분들께 감사하다”는 댓글이 줄지어 달린다. 장애인단체와 국가인권위원회가 지금껏 반복해서 수어 통역의 의미를 강조해왔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들도 코로나19로 중요성을 새삼 느끼고 있다.

코로나19라는 대재난 속에서 수어 통역의 역할이 빛난 데는 수어로 정보를 더 잘 표현하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았던 통역사들의 노고가 컸다. 김 통역사는 “코로나19 브리핑 통역은 지금까지 한 통역 중에서 가장 난도가 높다”고 말했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 이름은 물론이고 사회적 거리두기, 코호트 격리 등 행정용어에 의학용어까지 등장하기 때문이다.

“뉴스와 달리 원고를 미리 받아볼 수 없어 즉석에서 풀어내는 것이 힘들었어요. 수어 통역을 잘하려면 맥락을 완전히 이해한 다음 이를 다시 수어식 문장으로 표현해야 합니다.”(김동호 통역사)

김동호 통역사가 코로나19 메시지를 수어로 전했다.
김동호 통역사가 코로나19 메시지를 수어로 전했다. ⓒ한겨레/박종식 기자

처음에는 ‘코로나19’ 등 생소한 단어를 ‘ㅋ’, ‘ㅗ’처럼 문자 그대로 전달하는 ‘지문자’를 사용했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모이는 것 금지’ 식으로 문맥 구도를 풀어 설명했다. 하지만 이를 반복하면서 통역사끼리 머리를 맞대어 적절한 수어 표현을 찾아내기도 했다.

코로나19 브리핑에 수어 통역사가 배치되면서 국립국어원에서도 ‘새수어 모임’을 만들어 의미 전달이 높은 수어 표현을 찾고 보급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 여전히 현장 상황이 급박해 못 받을 때가 많지만, 최근엔 10~20분 전에라도 브리핑 원고를 미리 받아볼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부처에 요청했는데 흔쾌히 받아들여주셨어요. 통역사의 요청을 이렇게 쉽고 발 빠르게 수용해주는 현장은 없어요.”(김동호 통역사)

브리핑은 많으면 하루 3번이지만 이들은 24시간 긴장 상태다. 매일 달라지는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해 이동 시간에도 앱으로 다양한 매체의 기사를 읽는다. 표정 연구도 멈추지 않는다. 액세서리는 물론이고 줄무늬가 있거나 색상이 밝은 옷도 입지 못한다.

수어 통역사는 손으로만 내용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표정과 몸의 방향 같은 ‘비수지 기호’로 감정도 함께 드러내야 한다. 김동호 통역사는 “표정도 수어가 가진 문법 중 하나다. 표정과 동작의 동반 없이 따로 놀면 의미 전달이 안 된다”고 말했다. 비수지 기호의 의미 전달이 70~80%이고, 손동작은 20~30%에 불과하다. 실제로 코로나19 브리핑을 보고 있으면 수어 통역사들은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고,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온몸으로 단어와 문장을 표현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못한다”고 이들은 말한다. 처음 수어를 배울 때는 따로 표정 연습도 한다. 김동호 통역사는 “배우들의 눈빛 연기에서부터 표정 연기를 눈여겨본다”며 “최근 <슬기로운 의사생활>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면서 수어 통역도 통역을 한다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빼박캔트’(빼도 박도 못 한다) 등 수많은 신조어가 생겨나는 시대에 누구보다 유행에 앞서가고 흐름을 읽어야 한다.

“최근 ‘1일3깡’이 화제이길래 찾아보기도 했어요.”(김동호 통역사)

 

방역을 전담하는 의료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수어로 표현하는 ‘덕분에 챌린지’ 캠페인이 벌어지는 등 수어 통역에 대한 관심은 과거보다는 훨씬 높아졌다. 방송사도 더 신경을 쓴다. 한국방송은 재난방송 주관 방송사에 지정되면서 지난 3월 말부터 수어 통역사 24시간 대기 체제가 갖춰졌다. 재난 발생 시 총 4명이 2명씩 번갈아 투입된다. 지난 5월 발생한 강원 고성 산불 사건 때 이런 24시간 대기 체제가 빛났다. 두명이 한시간씩 번갈아 맡아 재난 상황을 끝까지 생중계했다. 에스알티(SRT·수서발 고속열차)는 사고 등 돌발상황 땐 청각장애인 승객에게 문자로 수어 영상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수어통역자격고시’가 처음 실시된 1997년 이후 양성된 전문 수어 통역사 약 1800명 중 텔레비전 통역을 하는 이들은 50~60명 정도다. 한국에 농인은 약 35만명이고 통역사 수요도 많지만, 수어 통역을 동반하는 프로그램은 별로 없다.

수어 통역사 9명을 투입하는 한국방송이 사정이 나은 편이고, <에스비에스>(SBS)는 2명, <문화방송>(MBC)은 3명에 불과하다. 2019년 기준으로 전체 방송 프로그램의 7% 정도(장애인 방송 고시에 따른 법적 기준 ‘자막 100%, 화면 해설 10%, 수어 통역 5%’)만 수어 통역을 제공한다. 지난 ‘5·18 민주화운동 40돌 기념식’에서 수어 통역사를 배치하지 않은 것을 두고 장애인단체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난 2일 장애인단체들이 한국방송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지상파 3사 저녁 메인뉴스에 수어 통역사를 배치하라”는 인권위 권고를 즉각 수용할 것을 촉구했지만, 방송사들은 비장애인 시청권 제약 등의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윤남 통역사는 <한겨레>와 한 서면 인터뷰에서 “공중파나 케이블에서 방송하는 농인 아이들을 위한 만화에 수어 통역이 삽입되기는 하지만,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만 송출하고, 수어 통역을 삽입한 예능 프로그램 등도 대부분 늦은 밤부터 이른 아침까지만 송출된다. 또한 수어 통역을 삽입한 뉴스는 한참 일해야 하는 낮과 늦은 밤에만 송출된다”고 말했다.

이어 윤 통역사는 “농인의 방송시청권과 평등권, 정보접근권, 의사소통권 등이 침해되는 상황이 현실에 만연한다. 농인도 시청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한국방송이 공영방송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호 통역사는 “대통령 연설에 수어 통역이 제공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농인 교회에서 목사가 수어로 설교하는 모습을 보고” 혹은 “친구를 기다리던 중 농인이 건넨 메모를 보고 대신 전화를 걸어주었던 일” 등 일상의 경험을 통해 농인에 대해 알게 되고 수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언어는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이들은 자칫 자신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치지 않을까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관심을 받아야 할 주체는 통역사가 아닌 농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터뷰에 응한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농인들의 인권이 주목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통로가 된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농인들의 권리를 지지하고 싶어 나서게 됐습니다.”(김동호 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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