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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교육자로서 '동의'란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확실한 동의'를 매번 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Getty Images/iStockphoto

성폭력 기사를 또 하나 더 클릭하기 전에, 애매한 영역을 생각해 보라. BDSM 이야기가 아니다. BDSM의 규칙도 동의의 스펙트럼에 들어가긴 하지만, 나는 동의 그 자체의 개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배심원 선정에 참석했다 일찍 끝났던 어느 날, 20년 전 사춘기 때 내게 성교육 수업을 받았던 한 젊은 여성이 나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최근 동의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나를 떠올렸다고 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녀는 매번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매번이 어떤 의미인가? 키스할 때마다, 성관계를 가지게 될 것 같을 때마다 매번?” 그녀는 기혼자고, 남편은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아서 성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동의를 말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교육자로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청소년들, 만난지 얼마 안 된 성인들, 심지어 여러 해 동안 함께 해온 커플들이 확실한 동의를 매번 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모든 젠더들이 진정한 성행위를 바라게 하고, 그를 가능하게 할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바라게 할 수 있을까?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할 때 나는 ‘동의의 연속체’라는 교육 도구를 사용했다. 나는 칠판에 선을 그었다. 오른쪽 끝에 ‘폭력적 강간’이라고 썼다. 왼쪽 끝에서부터 강제적 섹스 방향으로 ‘서로간의 동의’, ‘장난스러운 유혹’, ‘강제’ 등을 적어나갔다. 지금 해일처럼 쏟아지는 성폭력 혐의들은 이 연속체의 중간 정도에 존재한다. 권력을 가진 남성이라는 이유로 가능했던 강제이다.

 

그렇지만 서로간의 동의조차 늘 단순하지만은 않다.

 

의사소통의 실패

 

오늘 청취자들이 전화를 걸어 이야기하는 쇼에서 지역 정치인들의 성희롱 혐의에 대해 말하며 ‘페미니스트 어젠다’라는 표현을 들었다. 전화를 건 청취자는 매체의 정치적 편향과 커리어를 망치는 페미니스트들을 비난했다. 또한 왜 여성들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냥 빠져나오지 않았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녀는 성인이었다”라는 주장이었다. 수잔 콜은 “여성들은 그냥 빠져나오기 보다는 상황을 ‘해결’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썼다. 또한 “대화는 어떨까? 여성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여성의 대답을 진지하게 받아들여라.”고 말한다. 

 

강간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은 의사소통의 실패로 이어지는 잘못된 기대를 경험할 수도 있다. 엇갈리는 신호와 자기인식 및 명확성 부재가 합쳐진 결과다. 특정 형태의 성행위에 명백히 동의했다 하더라도, 행위 중이나 후에 불편함, 불쾌감, 후회가 들 수 있다.

ⓒGetty Images/imagenavi

동의만을 따지는 것은 너무 낮은 기준이다

 

조시아 빌스키는 토론토의 섹스와 감정 표현 교육자 캐런 B. K. 찬의 말을 인용한다. “동의가 낮은 기준이라는 이야기가 나온지 꽤 되었다. 그건 가장 낮은 기준이다. 그 다음으로는 성적 쾌감과 좋은 섹스, 즉 당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섹스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찬의 글은 좋은 섹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릴리 루프부로우는 질 삽입 섹스 중의 통증에 대한 글에서 이 이슈를 이어받는다.

 

“연구에 의하면 여성 중 30%는 질 삽입 섹스 중에, 72%는 애널 섹스 중에 통증을 경험했다고 하며, ‘상당수’는 파트너에게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성폭력 수업 중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아무 때나 싫다고 해도 괜찮은가? 성행위를 시작한 다음에 갑자기 중단해도 괜찮은가?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질문은 남아있다.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하는가?

 

기대치 관리

 

성행위 중 통증이 없더라도 쾌감 역시 없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지루할 수도 있다. 쾌감이 없다면 왜 계속하는가?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성행위에 동의하지만, 그 모든 이유들이 자랑스럽지는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당연시되기 때문에, 혹은 파트너의 필요 때문에 그것을 묵인하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곧 기분이 좋아지길 바라기 때문이다(가끔 좋아질 때도 있다). ‘눈을 감고 잉글랜드를 생각하라’던 빅토리아 시대의 격언보다는 진보가 이루어졌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우리에게 욕망이 없다는 걸 아는 파트너와 함께 있는데, 우리는 왜 욕망을 느끼려고 애써야 하는가?

 

나와 오래 사귄 파트너 사이에 있었던 일이 기억난다. 나는 도중에 흥미가 사라져서 그에게 말했다. 그는 굉장히 화를 냈고, 일어나 앉더니 위협적인 목소리로 “그래도 난 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다른 커플이었다면 폭행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고통과 분노를 느끼며 등을 돌렸다.

 

성적 건강에 대한 WHO의 정의에는 ‘강제, 차별, 폭력 없이 즐겁고 안전한 성경험을 할 가능성’이 들어가 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섹슈얼리티를 포용하고,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가르쳐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소통하고 또 들을 것인지도 그에 포함된다. 우리가 원하는 걸 오늘 당장 얻을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미래의 기쁨을 생각해 보라.

 

* 33년간 성교육자로 활동해온 Lyba Spring가 허프포스트 CANADA에 기고한 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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