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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주목한 여성 오케스트라 지휘자 아누 탈리가 한국 관객들을 만났다

코리안심포니 연주를 위해 처음으로 처음으로 내한했다.

  • 허완
  • 입력 2020.10.16 08:46
아누 탈리가 지휘하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리허설.
아누 탈리가 지휘하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리허설. ⓒ한겨레/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할머니 보세요! 지휘자가 여자예요!”

오래전,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클래식 콘서트장. 객석의 6살 소녀는 무대로 걸어 나오는 에스토니아 출신 지휘자 아누 탈리를 보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남성 지휘자에 익숙한 소녀의 눈에는 여성인 아누 탈리가 지휘봉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꽤나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최근 한국을 찾은 아누 탈리는 지난 14일 <한겨레>에 당시의 상황을 전하며 “그 소녀를 계속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유소년·청년층에게 음악을 들려줘야 해요. 젊은 여성들이 마음을 다하고 노력하면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고 격려하고 싶어요.” 여성은 지휘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자란 기성 세대와 달리, 아누 탈리를 보고 자란 젊은 세대는 지휘를 여성도 할 수 있는 ‘당연한 직업’으로 후보군에 넣을 수 있다는 의미다.

아누 탈리가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 것도 이런 차원이다. 그는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지난달 26일 한국에 들어와 경기도 김포의 한 호텔에서 2주간 머문 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고전적: 클래시컬’ 무대를 이끌었다. “세계적 보건 위기라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가능한 한 즐겁고 정상적인 생활과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관객을 위해 꼭 공연을 하고 싶었다”는 대답 속에는 다양한 무대에 서며 여성 지휘자를 익숙한 존재로 만들고 싶다는 뜻도 담겨 있다.

에스토니아 출신 지휘자 아누 탈리.
에스토니아 출신 지휘자 아누 탈리.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

 

그의 바람이 무대에도 고스란히 전해진 모양이다. 프로코피예프 교향곡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한 이날 공연은 아누 탈리를 보러 온 이들로 띄어 앉기를 적용한 300석 규모의 객석이 꽉 찼다. 그의 지휘 자체가 또 하나의 악기였다. 무대에 선 그는 온몸으로 지휘했다. 몸을 앞뒤 혹은 사선으로 움직여 리듬을 타는가 하면, 지휘봉을 잡지 않은 왼손을 목 뒤, 허리 뒤까지 오갈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였다. 악장과 악장 사이엔 지휘봉을 내려놓고 맨손으로 지휘하기도 했다. 이정일 악장은 공연 뒤 “작곡가의 의도를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 힘쓰는 지휘자”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이날 그의 이런 모습에 매료돼 한국의 아누 탈리를 꿈꿨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날 공연은 아누 탈리로 대표되는 이들의 노력으로 요즘 세계 오케스트라에서 여성 지휘자의 입지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최근 아누 탈리 외에도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지휘봉을 잡는 여성이 늘고 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올해 100돌을 맞아 처음으로 여성 오페라 지휘자를 내세웠다. 독일 출신 요아나 말비츠가 모차르트 오페라 <코지 판 투테>를 지휘했다. 지난 9월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여성 지휘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세계 51개국 여성 지휘자 220명이 참여했다. 아누 탈리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 모일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마련됐다는 것은 의미 있다. 여성 음악인이 서로를 응원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정말 아름답다”고 말했다. 한 클래식계 관계자는 “기회를 얻지 못했던 여성 지휘자들이 마음껏 실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보수적인 클래식계에 남녀 구분이 없어져야 한다는 걸 보여준 대회였다”고 말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고전적: 클래시컬’ 연주 장면.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고전적: 클래시컬’ 연주 장면. ⓒ한겨레/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1982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여성 단원이 처음 입단한 후, 오늘날 여성 단원이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클래식계는 변화했다. 하지만 지휘 분야는 여전히 남성 중심이다. 한국에서도 국공립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여성이 뽑힌 것은 2013년이 처음이다. 2000년대 이후 여성 지휘자의 약진이 시작됐지만 여전히 수련 과정의 차별적인 시선은 존재한다. 아누 탈리도 지휘를 공부하던 시절부터 1997년 24살에 개인 오케스트라인 노르딕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할 때까지 여성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음악을 공부하던 초창기에 일부 선생님들이 ‘너는 재능이 있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는 17살에 지휘자 상을 받았고, 2017년 <워싱턴 포스트>는 유명 여성 지휘자를 이을 차세대 주자로 그를 지목했다.

아누 탈리는 “최근 수년 사이 변화의 흐름을 느낀다. 젊은 여성들이 큰 꿈을 꾸고 주저 없이 클래식계로 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 지휘자 대회 본선 진출자의 연령대가 대부분 20~30대였던 점을 고려하면 여성 지휘자의 비중은 앞으로 더 늘 것으로 보인다. 그와 함께 활발하게 활동하는 미르가 그라지니테틸라, 수산나 멜키, 알론드라 데 라 파라, 카리나 카넬라키스가 언젠간 베를린 필, 뉴욕 필 등 세계 톱 오케스트라의 수장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아누 탈리는 젊은 세대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성세대의 훈련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윗세대는 우리가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차원에서 직접 겪은 차별적인 경험을 이야기해왔어요. 하지만 전 제가 겪은 차별을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해요. 젊은 세대는 비난이 아닌 격려와 지지, 그리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제안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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