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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정부' 첫 여성가족부 장관 정현백이 윤석열 당선자의 '여가부 폐지' 공약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다급함이 있었던 것 같다"

정현백 전 여성가족부 장관이 2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에서 <한겨레></div>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정현백 전 여성가족부 장관이 2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겨레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통해 구체화되는 동시에, 야권과 시민사회의 반대 목소리도 더 커지고 있다. 지난 25일 여가부 업무보고가 46분 만에 종료된 뒤 인수위 사회복지문화분과 간사인 임이자 의원(국민의힘)은 “여가부 공약을 실현할 방안을 심도 있게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청와대의 용산 이전 방침과 함께 윤석열 정부의 연착륙 여부를 가름 짓는 주요 정쟁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현재 여가부의 가족 정책은 보건복지부, 청소년 정책은 교육부로 이관하는 방안 등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여성계는 이미 반대해왔다. 조직개편 1차 안은 4월 첫주 가시화될 전망이다. 갈등이 정점에 치달을 시점인 셈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초대 여성가족부 장관을 지낸 정현백(69) 성균관대 명예교수도 최근 예상치 못하게 바빠졌다. 윤석열 당선자가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던 ‘여성가족부 폐지’가 가시화하자 그는 시민사회에서 여가부 폐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모으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지난 17일 뜻이 맞는 여성계 인사들과 함께 ‘성평등 정책 강화를 요구하는 여성과 시민 모임’을 꾸려 여가부 폐지에 반대하는 8709명의 지지서명을 받았다. 지난 1월 여가부의 ‘여성 신년인사회’에서는 “젠더 문제의 정치선전과 정치도구화는 여성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며 “그러나 성평등 정책이, 여가부가 위기에 처한다면 여성들과 여성운동은 분연히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정현백 명예교수는 현 정부의 첫 여성가족부를 이끌던 시절 ‘고분고분’한 장관은 아니었다. 2017년 여성혐오 관점과 표현을 담은 책이 문제가 되자 탁현민 의전비서관(당시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의 경질을 청와대에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2018년에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위력 성범죄 사건이 드러나자 곧바로 피해자에 대한 법률 지원과 지지 의사를 밝혔다. 같은 해 불법촬영에 대한 분노로 거리를 달궜던 혜화역 시위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여가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여가부가 할 수 있는 일과 한계를 몸소 경험한 정 교수에게 여가부의 확대 재편이 아닌 폐지는 지난 20여년의 한국 사회 성평등의 성취를 한순간에 후퇴시키는 ‘자해 행위’였다.

지난 23일 <한겨레>와 인터뷰한 정 교수는 여가부의 ‘역사적 소명이 다했다’는 윤 당선자의 발언이 ‘시대착오적’이라고 했다.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다급함”에 엉뚱하게 일자리와 주거 불안에 몰린 청년들의 “마른 짚더미와 같은 분노에 불을 붙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여가부가 폐지되더라도 각 기능이 복지부·법무부 등으로 이관되면 기능의 공백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재직 시절 자신의 경험을 들어 조목조목 반박했다. 동시에 예산이 1조4천억원에 불과한 여가부의 한계에 관해 설명하며, 보육·돌봄 기능을 중심으로 여가부의 확대 재편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다음은 정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재차 ‘여가부의 역사적 소명이 다했다’며 폐지 의지를 밝혔다.

“굉장히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정당을 기준으로 봐도 그렇다. 독일을 보자. 앙겔라 메르켈 총리 시절 보수 정부 아래에서 성평등 정책이 오히려 강화됐다. 메르켈 행정부 기간 여성 장관 비율은 가장 많을 땐 43.8%에 달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독일의 여가부 격인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장관을 지냈다. 메르켈이나 폰데어라이엔 같은 보수 정치인들이 할당제를 통해 정계에 진출했고, 능력을 인정받았고, 성평등 정책을 폈다. 반면 이번 여가부 폐지 추진은 한국의 보수가 자기 개혁이나 자기 갱신에 실패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선진국의 보수 세력은 벌일 수 없는 일이다.”

진보당 6·1 지방선거 기초의원 예비후보와 당원들이 25일 오전 대통령 당선자 집무실이 있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당선자의 대선 공약이었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폐지할 것을 촉구한 뒤 ‘폐지’ 글자를 찢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진보당 6·1 지방선거 기초의원 예비후보와 당원들이 25일 오전 대통령 당선자 집무실이 있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당선자의 대선 공약이었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폐지할 것을 촉구한 뒤 ‘폐지’ 글자를 찢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겨레

―‘여가부 폐지’가 보수정당 대통령 당선자의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다급함이 있었던 것 같다. 유럽이나 미국은 청년 일자리나 주거 문제, 자산 불평등 문제를 둘러싼 불만이 외국인 혐오나 난민 혐오로 흘러간다. 반면 한국 사회에는 이런 갈등이 아직 가시화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경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도 압축성장한 사회다. 민주주의와 함께 페미니즘도 사실 압축성장을 했다. 사회가 이걸 수용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와 같은 정치인들이 수용의 지체를 이용해 바짝 마른 짚더미와 같은 청년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고 생각한다.”

 

―여가부가 여성만을 위한 부처, 성별 간 갈등과 역차별을 조장하는 부처라는 시선이 있다.

“여가부는 여성뿐 아니라 다문화 가족, 성폭력 피해자, 학교 밖 청소년 등 다양한 취약계층을 담당한다. 한가지 사례를 들고 싶다. 내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군산에서 한 청소년이 아버지에게 수차례에 걸쳐 성폭력을 당했던 일이 뒤늦게 드러난 적이 있다. 아이의 상태를 이상하다고 여긴 학교 선생님이 신고했는데 피해자의 나이가 8~9살 정도여서 여가부 산하 해바라기센터가 아닌 복지부 산하 지역아동센터로 보내졌다. 그런데 성희롱, 성폭력 대응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나 노하우가 없는 아동센터가 아버지를 불러다가 ‘아이 좀 잘 챙겨라’ 하고 돌려보낸 거다. 그 아이는 다시 아버지의 폭행에 노출됐다가 청소년이 되어서야 다시 선생님의 신고로 해바라기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해바라기센터는 피해 청소년을 아버지로부터 분리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여가부는 복지부와 같은 거대 부처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취약계층을 성인지적 관점을 갖고 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여가부의 기능을 복지부·법무부 등으로 쪼개거나, 여가부를 대통령 산하 위원회 형태로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독립 부처가 없으면 법률 제안권이나 예산 편성권이 없고, 집행권도 없고 협상력도 없어진다. 부처 간에 일을 하다 보면 국장급끼리 만나서 조율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다. 결국 장관이 장관한테 가서 부탁하고 국무회의에 가서 대통령 앞에서 의견을 개진해야 변화가 이뤄진다. 가령 데이트폭력 관련 법안을 만들 때 법무부의 반대, 국회 법제사법위의 반대가 심했다. 여가부 장관이 없다면 이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 여가부가 처나 청으로 격하돼서 국장급의 누군가가 이들을 설득한다고 생각해봐라. 같은 급의 국장이 ‘장관이 반대해서 방법이 없다’고 하면 끝이다. 과거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 산하 여성특별위원회를 하다가 여성부가 탄생하게 된 이유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그래서 나는 여가부 폐지를 주장하는 정치 엘리트들에게 ‘제발 과거에서 학습 좀 합시다. 공부 좀 합시다’라고 말하고 싶다.”

정현백 전 여성가족부 장관이 2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에서 <한겨레></div>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정현백 전 여성가족부 장관이 2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겨레

―현재 여가부를 둘러싼 논의는 ‘폐지 대 존립’에 갇혀 있지만, 여가부를 개편해야 한다는 의견은 여가부가 존립해야 한다고 보는 쪽에서도 꾸준히 나왔다. 향후 어떤 개편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독일의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가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저는 여가부가 성평등, 가족, 청소년 등을 포괄하면서 보육·돌봄의 주무부서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한부모 가족은 복지부 등이 제공하는, 결혼한 부모들이 받는 여러 가지 혜택에서 비켜나 있다. 이런 취약계층에 특화된 여가부가 사라지고 인구·저출생 등을 관할하는 거대 부처가 들어서면 이들을 섬세하게 선택적으로 지원하기가 어려워진다. 여성 노동과 돌봄·보육 문제가 실타래처럼 얽힌 경력단절 문제도 마찬가지다. 젠더 관점에서 총괄하고 조정하는 부처 없이 기능적으로만 접근하면 그냥 돈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평등 주무부처는 단순히 성별 집단 간의 기회 분배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의 장기적 존속 가능성을 위해서 필요하다.”

 

―여가부 재편 또는 강화 논의가 문재인 정부 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에 아쉬움을 표시하는 목소리가 여성계에도 많다.

“여가부가 일정 부분 실패한 부분이 있다. 특히 성별임금 격차에서 좌절감을 느꼈다. 기업 임원직에서 여성 비율이 조금씩 높아지기는 했지만 잘 해결이 안 됐다. 주요 기업의 여성 임원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5%(2021년 여가부 상장법인 성별 임원 현황 조사 결과) 수준이다. 여가부의 문제도 결국 구조적 개혁이 되지 않으면 땜질식 처방에 그치게 된다. 1조4천억원에 불과한 여가부 예산의 한계도 있다. 여가부가 예산 대비 사업의 가짓수가 너무 많다. 기획재정부나 국회 여가위 의원들도 깜짝 놀랄 정도다. 예산은 적고 사업은 많으니까 여가부 직원들이 고생은 하는데, 티가 덜 난다. 그 적은 여가부 예산에서도 성평등 분야 예산은 7%에 불과하다. 직원 배치는 사실 예산 규모와 직결된다. 결국 여가부를 폐지하는 게 아니라 예산과 지원을 강화해서 해결할 문제다.”

 

―여가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이 있다면.

“역시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이다. 그 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산하에 성희롱성폭력근절 종합지원센터가 탄생했다. 또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도 제도적으로 성공한 케이스다. 여가부가 있었기 때문에 디지털성범죄와 같은 문제가 정치권에서 진짜 문제로 떠오를 수 있었다. 국무회의 차원에서 다른 부처 장관들을 설득하고,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의원들을 설득하고, 법을 만들고 제도화하는 것 모두 성평등 주무부처의 역할이다.”

1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에서 열린 ‘성평등 정책 강화를 요구한다’ 여성·시민 긴급 기자회견에서 선언 연서명에 참여한 8709명이 남긴 말과 명단이 붙어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1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에서 열린 ‘성평등 정책 강화를 요구한다’ 여성·시민 긴급 기자회견에서 선언 연서명에 참여한 8709명이 남긴 말과 명단이 붙어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한겨레

―이번 대선에서 20대 여성과 20대 남성의 표심이 극단적으로 엇갈렸고, 특히 대선 막판에는 청년 여성의 표심이 주요 변수였다. ‘자신의 투표권이 존재하지 않는 기분’을 느낀다고 한 청년 여성도 많았다.

“20대 여성들은 생존에 대한 불안감과 정의감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하나은행이나 국민은행의 채용비리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채용 과정에서 차별받고, 대선 뒤에 호신용 호루라기 판매가 늘었을 만큼 생존의 불안을 느낀다. 이번 대선을 계기로 여성들이 겪는 생존의 불안에 사회가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여가부 폐지 논란에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나는 한국의 보수가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심각한 자기 도전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년 여성들에게 ‘너무 힘들면 소리를 질러라, 조용히 있지 말고 소리를 질러라’라고 말하고 싶다. 아프면 소리를 질러서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하고, 공동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망설이지 말고, 개인화된 정치를 넘어서서 연대 네트워크를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한겨레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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