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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n번방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인터뷰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너무나 부끄러웠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지난 3월 지역의 한 교도소를 방문하러 내려가는 차 안에서 바쁜 일정 탓에 며칠 동안 들고만 다니던 프로젝트 ‘리셋’의 n번방 보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진행된 제72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을 지켜보고 있다.2020.4.3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진행된 제72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을 지켜보고 있다.2020.4.3 ⓒ뉴스1

지난해 11월 <한겨레>의 보도로 엔번방 실태가 알려진 뒤 익명의 젊은 여성들이 모여 결성한 리셋은 올해 초 ‘텔레그램 디지털 성범죄 해결’을 국민청원 1호 법안으로 끌어올리며 160쪽 자료집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디지털 성범죄의 개념과 실태부터 대책, 해외 사례까지 망라돼 있었다. 이건 민간이 아니라 사법정의를 세우는 기관에서 했어야 할 일 아닌가.” 바로 그날 밤 회의가 소집됐다. 다음날 “미온적 형사처벌과 대응으로 피해자들의 아픔을 보듬지 못했다”는 법무부의 ‘이례적’ 사과와 중대범죄의 법정형을 상향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성범죄 대상인 아동·청소년을 ‘피해자’로 보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비롯한 엔번방 방지 법안이 지난 29일 밤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제사회와 여성계 등의 오랜 문제제기에도 꿈쩍 않던 현실이 변화의 급물살을 탄 데는 엔번방 사건에 대한 국민적 공분과 함께 그동안 사실상 법 개정에 반대해왔던 법무부의 입장 선회 또한 큰 힘이 됐다.

 

29일 오전 과천 법무부 청사에서 <한겨레>와 만난 추 장관은 엔번방 사건이 우리 사회에 ‘성착취’라는 인식을 각인시킴과 동시에 이런 성범죄의 바탕엔 ‘수요’의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해준 계기라고 평가했다. 그는 현재 디지털 성범죄에 적용되는 복잡한 법체계를 통합하는 법 제정을 “법무부의 다음 과제로 삼겠다”고 말했다.

지난 몇년간 정부가 불법 촬영물, 웹하드 카르텔 등과 관련해 수많은 대책을 내놨어도 디지털 성범죄가 플랫폼만 바꾼 채 끊이지 않는 데는 사법기관의 ‘무른’ 처벌 탓이 크다는 지적이 많았다. 추 장관은 “그동안 사회의 변화 속도를 사법기관이 놓치고 있었다”고 인정하며 “구형이나 양형이 국민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다는 지적이 많은데 아무리 법을 강화해도 피해의 심각성에 대한 공감이 없는 상태에선 바뀌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검사와 판사가 모여 리셋 같은 관계단체나 여성계, 전문가들을 초청해 직접 듣고 토론하는 ‘공동세미나’ 운영을 제안했다. 검찰 내부적으론 인사 등에서 특수부 중심 관행을 벗어나 여성아동범죄조사부나 형사부, 공판부에 보다 많은 기회가 돌아가게 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29일 오전 과천 법무부 청사
추미애 법무부 장관, 29일 오전 과천 법무부 청사 ⓒ한겨레/김봉규 선임기자

―디지털 성범죄 해결을 위한 법적 논의 과정에서 그동안 법무부의 보수적 견해가 가장 큰 벽이 됐던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3월에 디지털 성범죄 처벌 강화 의지를 밝히고 4월17일 의제강간 연령 상향 방침 등을 발표한 것은 수년간 이 문제를 제기해온 여성계에서도 ‘놀랍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바뀐 배경이 뭔가?

“법무부에 인권옹호 기능이 있다.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 부분을 우선순위 과제로 삼자 싶었다. 지난 1월 인사에서 서지현 검사를 법무부 양성평등정책특별자문관으로 발령하고, 성범죄로 인권이 침해되는 부분에 대해 법무부가 할 역할을 구체적으로 조언해달라고도 했다. 서 검사가 ‘엔번방’ 사건 관련 자료를 정리해줬는데, 현안에 쫓겨 막연하게만 심각성을 느끼다가 3월16일 ‘박사’ 조주빈이 검거가 되자 더 늦기 전에 대책단을 만들자고 주문했다.

이후 읽게 된 프로젝트 ‘리셋’ 보고서가 날 부끄럽게 했다. 사법정의를 세우는 기관이 할 일을 민간인들이 하고 있었다. 지방 일정에서 올라오며 그날 밤 회의를 소집해 내가 한 첫마디가 “그동안 뭐 하셨습니까?”였다.(웃음) 사회가 이만큼 변화하고 있고 대처를 요구하는데 그동안 사법기관들이 놓쳐버린 거다. 이후 한달여간 일과가 끝나고 밤에 모여 ‘리셋’을 초청해 공부도 했다. ‘우리를 일깨워달라’고 했고 피해의 심각성에 대해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관계단체나 여성계 사람들도 다양하게 만났다.”

―지난 23일 범정부 대책이 전향적이란 평가가 나오지만 사실 최근 2~3년간 불법 촬영물이나 웹하드 카르텔 때도 대대적 대책이 발표되곤 했다. 이전과 차별되는 지점은?

“우선 우리 사회에 디지털 성범죄가 ‘성착취’라는 점을 제대로 각인시킨 점이다. 기존엔 성폭력이라고 하면 폭행·협박을 동원한 강간 정도만 생각했다. 피해자의 의사는 무시하고 가해자 입장에서 경중만 따졌다. 성범죄의 본질은 피해자의 의사에 달려 있다는 것, 폭행·협박이 없더라도 성착취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끔 만든 건 아주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런 기본 개념 속에서 의제강간 연령을 올리는 사회적 합의도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제작·유포가 끊이지 않는 데는 ‘소비’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성인물 소지도 처벌하는 법 개정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인식이 동인이 됐다.”

―디지털 성범죄의 법정형이 강화돼도 ‘솜방망이 처벌’ 논란이 사라질지,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최근 대법 양형위원회의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조사에서 법관들의 답변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사법기관이 국민적 눈높이와 다르다는 지적, 잘 안다. 엊그제 수도권에 근무하는 검찰 여성아동범죄조사부 부장들과 비공식 간담회를 하며 실제 관련 사건을 처리할 때 애로사항이나 형량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관련 법이 형법, 성폭력처벌법, 청소년성보호법 등으로 나뉘어 복잡하고 구형이 어려운 사각지대도 있어 통합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기술적인 부분을 지원하는 전문수사관이 필요하다는 의견, 특수·공안부서만 높은 평가를 받는 문화가 남아 있어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기 어려운 부분도 들었다.

판사들의 경우, 사법부의 독립성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여론으로부터의 독립’도 있다 보니 실제 현실에 대해 이해할 여지가 차단될 수도 있다. 가상공간에서 일어나는 범죄다 보니 직접적인 신체접촉보다 피해가 덜하다고 생각도 하는데, 그게 ‘관념’이다.

그런데 피해자들은 살 떨리게 전율하고 잠도 못 자지 않나. 피해의 심각성에 대해 공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선 구형이나 양형이 올라갈 수 없다. 이 현상이 뭔지 깨닫고 공감하려면 결국 책을 읽거나 피해자로부터 듣거나 간접경험밖에 없다. 검사와 판사가 함께 관계 단체나 직접 취재한 언론인 등을 만나는 공동세미나 같은 걸 제안하고 싶다.”

 

―디지털 성범죄 특별법 요구가 여성계에서 있다. 실제 진척시킬 의지가 있나?

“형태가 특별법이 될지는 더 검토해봐야 하지만, 통합법의 필요성은 강하게 느낀다. 법무부의 우선과제다.”

―성폭력, 성매매 같은 기존 범죄에 대한 법 개정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특히 강간죄 기준을 ‘동의’ 여부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왔는데, 어떤 입장인가?

“비동의 간음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해자의 심리상태가 과연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냐는 부분을 놓고 우려가 있는데, 사실 어릴 때부터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되면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돼도 과잉처벌 우려가 없다고 본다. 오히려 이런 방향으로 교육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이 부분은 신설돼야 한다고 본다.

물론 제 생각이 법으로 표현되려면 (사회적) 공감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열단계라고 할까, 비동의 간음죄를 입법예고해놓고 사회적인 경고를 주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처벌 강화와 함께 포괄적 성교육 강화를 정부가 선언했지만 구체적이지 않다.

“엔번방 사건의 근본엔 한마디로 교육 부재가 있다. 경쟁만 가르치는 폭력사회인 거다.

얼마 전 읽은 김누리 중앙대 교수의 책에서 한국 사회의 심리구조를 ‘오만’과 ‘모멸’로 요약했던데 정말 공감했다. 오만함은 상대방의 감정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거다. 모멸감은 열패감 때문에 느끼는데 이 열패감을 가장 약자에게 푼다.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을 때, 그 열패감의 대상이 특히 나보다 약하다고 생각한 여성이라면 용납을 못 하는 거고, 여성 혐오도 생기는 거다.

그동안은 ‘잘못하면 처벌받을 거야’ 같은 겁주는 식의 ‘법 교육’만 했다. 그런데 엔번방 사건은 우리가 ‘스카이캐슬’처럼 성공하는 것만 가르치지 정작 상호 존중하며 관계를 형성하는 법은 안 가르쳐준다는 점을 똑똑히 보여줬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이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지속가능하지 않다. 엔번방 사건을 단순히 여성의 문제로만 국한하지 않고 한국 사회의 심각한 병리적인 징후로 봐야 한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29일 오전 과천 법무부 청사
추미애 법무부 장관, 29일 오전 과천 법무부 청사 ⓒ한겨레/김봉규 선임기자

―디지털 성범죄 피의자 신상공개 강화를 밝혔는데, 포토라인을 없애고 피의사실 공표를 막겠다던 법무부의 기존 방침과 모순되진 않나?

“실제 수사하는 여성아동범죄조사부 부장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해자들은 자신의 얼굴과 직업 등이 알려지는 걸 가장 수치스럽고 두려워한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범죄의 원인을 찾아내고 이후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장기적인 과제다. 성범죄도 사건 하나하나가 ‘인권 참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엄하게 처벌해야 하는데 그 수단 중 하나로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건 (지금 단계에서) 필요하다고 본다.”

―사실 조주빈 검거가 없었다면 이번 총선에서 젠더 이슈는 실종됐을 거다. 그 전에는 주요정당의 젠더 관련 공약도 변변히 없었다. 강남역 사건, 미투, 혜화역 시위를 거쳤는데도 최근 오거돈 전 부산시장 사건을 보면 우리 사회가 좀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구조적인 이유가 있을까? 당대표 시절 안희정 전 지사 사건에 신속하고 단호한 결정을 내렸는데 내부 반발은 없었나.

“기성세대도 똑같이 산업화 시대의 경쟁 1세대다. 밥상머리에서 형제들에 비해 빨리 밥먹고 숟가락 놓는 사람이 최고라고 배웠듯, 경쟁 사회에서 본능적인 식욕, 성욕 등 내 욕구만 먼저 충족해야 한다며 자라났다. 아까 오만과 모멸을 말했는데 상대방이 모멸감을 느끼는지 생각이 없던 거다. 시장은 그 권력을 이용한 오만의 상징인 셈이고.

안 전 지사 땐 피해자 인터뷰를 보고 직감했다. 피해자 말이 맞구나. 그렇다면 이건 심각하고 있을수 없는 일이다. 피해자 인터뷰 방송이 끝나자마자 회의를 소집했다. 반창고를 붙였다가 확 잡아 떼면 악 소리를 못내잖나. 그래서 전격처분이 가능했다.”

―정치인 시절 ‘여성’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걸 꺼려 했다고 알려졌다. 그래도 여성의 롤모델이 돼야 한다는 주변의 시선이나 그로 인한 부담감은 있었을 듯하다.

“막중한 책임감이 있다. 동시에 여성이라서 여성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과잉된 것처럼 보일까 하는 우려도 있다. 판사 시절 여성이란 이유로 형사 단독판사부를 맡기지 않으려고 하길래 법원장실까지 가서 ‘왜 제가 해선 안 되냐’고 물으니 ‘피고인이 법대에 덤벼들면 감당할 수 있겠냐’ 하더라. 그래서 ‘남자 판사들이 태권도 유단자가 아닌 이상 똑같은 상황인데 왜 내게만 묻냐’고 해서(웃음) 결국 단독판사를 맡은 적이 있다. 역시 여성은 형사 사건을 담당할 능력이 안 돼라는 말이 나올까 억척스럽게 일했다.

지금 검찰 조직도 의식적으로 바꿔보려고 한다. 중요 부서에 여성 검사들을 배치시키려 했고, 기피 부서로 알려진 여성아동범죄조사부에서 열정적으로 일을 한 분들에 대한 인사평가도 제대로 하려 한다. 동기부여를 하면서 홀대받았던 부서가 희망 부서가 되도록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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