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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코리아 인터뷰] 탈북자 학교이자 다문화 학교, 장대현학교의 학생들

  • 박수진
  • 입력 2015.05.20 10:06
  • 수정 2016.10.11 07:00

허핑턴포스트코리아는 창간 1주년을 맞이해 2015년 3대 기획 시리즈를 추진합니다. 국내외로 첨예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북한 인권과 탈북자 문제, 30만을 넘긴 다문화 가정, 불법과 합법을 통틀어 170만 명에 육박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번에는 탈북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로 설립된 후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모인 장대현학교의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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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현학교는 부산∙경남 지역의 유일한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로 이미 몇 차례 언론에 소개됐다. 실제로 본 이곳은 다문화 학교의 모습도 갖고 있다. 전체 학생 17명 중 6명이 중국에서 나고 자란 중국 국적, 1명은 한국 국적이다. 나이는 14살부터 20대까지 있다. 20대 학생을 포함해 일부를 제외하고 전원이 기숙 시설에서 공동 생활을 한다. 교장인 임창호 고신대 교수는 이 학교를 기숙학교로 만든 가장 큰 이유를 "탈북 학생들은 가정에서 교육이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부모들과의 세대 차이도 학생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된다. "집에 가면 북한 부모와 친척들이 북한 사고방식과 가치관 그대로 살고 있거든요. 집 나오면 한국, 집에선 북한. 그래서 갈등이 심하죠."

이 학교에 다니는 탈북자 학생 2명, 중국인 친부모를 두고 중국인으로 자라다 탈북자 새엄마를 따라 한국으로 이민 온 중국 국적 학생 1명, 그리고 한국 국적 학생 1명을 인터뷰했다. 인터뷰이의 요청으로 일부 가명을 사용했고, 일부 지명은 대체하거나 명기하지 않았다.

스물다섯 살 김연희(가명) 씨는 과목마다 수준에 맞춰 초등학교 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함께 듣고 있다.

김연희(가명) 25살, 탈북

초-중학교 과정

- 탈북할 때 혼자였다고 들었는데, 어린 나이일 때 혼자 중국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어요?

= 13살 때였는데, 철이 없었어요. 우리 동네는 하도 탈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18살, 19살, 이런 젊은 언니들이 중국에 가서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집을 도와줬는데 그게 부러웠어요. 미나리 캐면서 하루하루 사는 게 어려웠거든요. 미나리는 하도 캐서 동네에는 없고, 5시간씩 걸어서 깊은 산에 갔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5시간 걸어서 산에 도착하고, 거기서 또 5시간 캐면 한 배낭 차요. 그거 메고 다시 집까지 걸어온 다음에 제가 장마당(시장)에 나가서 팔았죠. 판 돈으로 쌀이나 국수 사오고요. 그러다 보니까 맨날 '빨리 커서 중국 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중국 한 번 갔다 오면 돈 엄청 벌어오던데... 그래서 일단 한번 가서 돈 벌고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갔죠. 그런데 중국에 갔더니 브로커가 저 포함해서 저랑 같이 간 사람들 8명을 팔아먹었어요.

- 속은 거네요.

= 이후로도 몇 번 팔려갔어요. 처음에는 북한 군인이 중국 사람한테 팔고, 그 중국 사람이 또 중국 사람한테, 그 다음에 저희를 산 사람이 다시 북한 사람이었어요. 평양 여자였는데 자기도 그 마을에 팔려와서 그걸로 먹고 살고 있는 거예요. 그 마을의 한 집에서 거의 1년 살고 도망쳐 나왔어요.

- 어떻게요?

= 거기 살던 중에 고향의 엄마랑 연락이 됐어요. 엄마가 국경 쪽에 사는 친척이 있는데 거기 가보라고 했어요. 그분이 받아줘서 거기 식당에서 일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거기도 국경이라 안전하지 않으니까 2년 만에 일을 그만두고 청도로 도망쳤어요. 거기서 또 4년 살았고요.

- 청도에는 정착하겠다는 생각으로 간 거예요?

= 살 때까지 살아보자 했죠. 한국 갈 생각은 전혀 못 했어요. 그런데 청도에서 한국 식당에서 일했거든요. 거기서 한국 사람들 접촉하면서 한국에 대해 알게 되고, 거기서 만난 탈북자 언니 통해서 브로커도 소개받았어요. 브로커가 그러더라고요. '너 나이에 한국 가면 집도 주고 공부도 시켜준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안 간다고 했는데, 1년 뒤에 생각이 바뀌어서 다시 그 브로커를 찾아갔어요.

- 브로커 비용은 어떻게 했어요?

= 하나원에서 나올 때 정착금 4백만 원 주잖아요. 그걸로 갚아요.

- 요즘 미디어에서는 북한에서 외국 방송이나 영화 보는 게 전보다 더 쉬워졌다고 해요. USB나 SD카드로 전보다 훨씬 많은 영상 파일을 갖고 온다고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국경이 있는 함경도와 량강도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도 하고요. 본인은 북한에 살 때 어땠어요?

= 저는 국경에 살았지만 어려서 못 봤어요. 동네에서 가만가만 보는 건 봤어요. CD-R이라고 아세요? 동네 사람들이 중국산 CD-R에 드라마랑 영화 넣어서 몰래몰래 많이 봤거든요. 한국 옷은 있었어요. 한국어 상표는 다 떼고 입었어요.

- 한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어요?

= 엄청 나쁘게 생각했어요. 북한 TV 보면 항상 그 아나운서가 "남조선 괴뢰군들이..." 이러고 욕하잖아요. 또 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하고 한편이기 때문에 '승냥이 원쑤'라고 싫어했어요. 한국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 보기만 하면 손 자르고 피 뽑아서 팔아버린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중국에 가서 아닌 줄 알게 됐죠.

- 북한에 살 때는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어요?

= 학교에서 말하는 대로 김정일을 우러러봤죠. 그런데, 겉으로는 그랬지만 속으론 좋지 않은 느낌을 받고 있었어요. 길거리에서 어른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거든요. 지금 통일되기 직전이라고. 통일되면 잘 사는데 수령님이랑 김정일이 반대해서 안 되는 거라고. 그리고 애들이 학교에 바쳐야 할 게 너무 많았어요. 말로만 사회주의 국가잖아요. 무료로 병도 치료해주고 공부도 시켜준다고. 그런데 학교 가면 범 가죽, 토끼 가죽, 고철을 자꾸 내라고 해요. 그런 게 집에 있는 게 아니니까 어디 가서 구해와야 하잖아요. 못 구하면 돈 내라고 해요. 전 못 내서 학교를 못 다녔어요. 선생님이 뭐라고 하고, 학교에서 왕따 당하기도 하거든요.

지금 보면 북한 같은 나라가 없어요. 주민들을 꽉 쥐고 말도 제대로 못 하게 하고. 간부들은 잘 먹고 잘 사는데 주민은 못 살고, 좀만 잘 살면 빼앗고. 내가 북한에 있는 엄마한테 돈 보내도 엄마 마음대로 못 쓰고. 정부에서 사람들 솟아날 구멍이 없게 만들잖아요.

-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요?

= 김정은이 싫어요. 김정은이 국방위원장 됐을 때 중국 사람들이 어린 나이에 대통령 돼서 저게 해낼 수 있을까, 이런 얘기 많이 했거든요. 사실 전 그땐 이런 생각 했어요. 젊으니까, 중국이나 한국 보고 눈이 트였으면 다른 나라랑 좀 비슷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점점 더해요.

-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한국 생활은 어땠어요?

= 처음 하나원 나와서 제일 어려웠던 건 한국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거요. 하나원에서 교육도 그렇게 받았어요. 북한말은 악세가 세서 한국사람들하고 말할 때 조심해야 한다고. 이 말 하면 실수하는 거 아닌가, 이 말 해서 맞을까 틀릴까 그런 거 많이 생각했어요. 슈퍼 가서 뭘 사야 하는데 외래어도 너무 많고.

- 한국에서 알고 지내는 탈북자들이 많나요?

= 제가 사는 동네에 저희 기수에서 네 가족이 집 받았거든요. 같이 이 동네에 온 사람들은 다 어르신들이에요. 다른 데는 젊은 여자들끼리 또래끼리 많이 왔거든요. 그런데 전 나이 차이가 있으니까 같이 왔다 해도 통하지 않아서 답답했어요. 한번은 쇼핑하러 동네 이모랑 같이 갔는데 이모는 아줌마들 옷 보잖아요. 그런데 전 그게 눈에 안 차요. 또 대화할 때도 어른들은 살아온 경험이 있는데 전 철없이 말하니까 통하지 않죠.

- 10대들이 다니는 학교에 입학할 생각을 했네요. 언제부터 이 학교에 다녔어요?

= 올해 3월 2일에 입학했어요. 중국에 살면서 한국 올 생각 없을 땐 학교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나이도 있으니까. 그러다가 브로커 얘기 듣고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북한에서 초등학교도 다 못 나왔으니까 말이랑... 뭐라고 할까, 아무튼 대화할 때 못 배운 게 티 나요.

처음 한국 와서는 아르바이트를 한 게, 벌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없잖아요. 기초 생활 수급비만으로는 빡빡하거든요. 그런데 정착 도와주는 선생님이 이 학교에서 무료로 공부시켜 준다고 하는 거예요. 많이 고민하다가 공부 시작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시작했어요.

- 학교생활은 어때요?

= 여기 애들은 거의 공부 하다 왔는데요. 저처럼 중국에 (잡혀서) 살다 온 게 아니니까 다 저보다 잘하는 거 같아요. 저는 나이가 있는데 애들보다 못하니까 쪽팔릴 때가 엄청 많아요. 그런데 자존심 잊어버리고 애들이랑 같이 하기로 했어요.

- 그래도 중학교 과정에 다니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본인 빼고는 다 기숙 생활을 하고 있기도 하고.

= 단체생활이 좀 어렵긴 해요. 우리 학교에선 외박을 자주 안 하잖아요, 이번에 제주도 갔다 오고 전에 강원도 스키캠프 갔다 왔는데요. 단체생활 하다 보면 저녁에 점검 같은 거 하는데 그런 게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저는 이 나이 먹고 선생님들한테 혼나니까. 속으로 생각 많이 했어요. 그런 거 다 견뎌야 한다고.

- 학교 다니는 목표가 뭐예요?

= 지금 계획은 이 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하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대학에 갈 거예요. 제가 중국어를 잘하잖아요. 그래서 중국어나 교육 전공해서 중국어 교사하고 싶어요. (채널 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도 많이 봤는데, 거기 나오는 사람들 보니까 공부하고 싶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대학도 다니고, 한국 와서 적응 많이 한 사람들이잖아요. 저도 이렇게 살지 말고 공부를 해서... 한국에서 성공한 북한 사람들 보면 저보다 상황이 어려운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애도 있는데 대학도 졸업하고. 전 혼자잖아요 혼자만 잘 살면 되니까.

- 엄마와 같이 살고 싶지 않아요?

= 완전 데려오고 싶죠. 그런데 엄마가 무서워서 안 오겠대요. 지금 저랑 통화할 때도 10시간 걸어서 산에 올라가서 전화하거든요. 가족이 두 명씩 어디 가면 의심하니까 다른 사람은 못 오고 엄마 혼자만 나와서 전화하고. 그런데 엄마가 오겠다고 해도 권하고 싶지 않아요. 오다가 일이 잘못되면 저를 얼마나 원망하겠어요. 함부로 엄마 오라고 못 하겠어요.

- 북한이 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나아질 거 같진 않아요. 북한 사람들도 한국 드라마 다 보는 거 아니고 몰래몰래 보니까. 한국 진짜 이런가? 상상만 하는 정도죠.

- 통일이 될 수 있을까요?

= 완전 어렵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퍼즐 풀듯이 어려울 거 같아요.

- 살아 있는 동안에 될 수 있을까요?

= 저 살아 있는 동안에요? 음... 저 6살 때부터 시장 아줌마들이 내년에 무조건 통일된대, 그랬거든요. 그런데 안 됐잖아요. 통일될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냥 준비는 하는 거죠.

이곳 학생들은 한국 국적인 1명을 제외하고 모두 후원금으로 공부하고 있다. 상주하며 함께 생활하는 교사 5명을 제외한 나머지 교사들은 모두 급여 없이 봉사로 수업을 맡는다. 아직 중고등학교 학력이 인정되지는 않지만 교사들은 모두 교사자격증을 갖고 있다. 한국사회 정착을 목표로 하고 있기에 이곳 수업 역시 대부분 검정고시 준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이들이 영어와 함께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인 일반사회는 인근 중학교 교사로 일하다 퇴직한 도상욱 씨가 맡고 있다. "수업 때는 TV에 나오는 은행 이름 대면서 '니가 신용 많이 높여서 제1금융권 이용해라' 이렇게 동기 부여하면 애들이 빨리 배워요."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건 생활 경제만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역사도 김일성 위주로 배우고 고구려만 가르쳐줘요. 전체적으로 다 어렵습니다. 세계사도 모르고, 명예혁명이 뭔지도 처음 듣고."

자오 뢰를 비롯해 대부분의 학생들이 3~4인 1실의 기숙사에 살고 있다.

자오 뢰 16살, 중국 국적

중학교 3학년 과정

- 고향이 어디예요?

= 허베이 성이요.

-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됐어요?

= 후엄마(새엄마)가 북한 분이고요. 후엄마 따라서 11살 때 왔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친엄마랑 살러 1년 동안 중국 갔다가 6학년 때 다시 왔어요.

- 북한 출신인 새엄마가 중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있나요?

= 5살 때 우리 집에 경찰이 와서 엄마 잡아가는 거 봤어요. 그때까지는 북한이란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아직도 엄마 잡혀갈 때 기억나요. 엄청 무서워서 울었거든요. 동네 마트 아줌마한테 '아빠한테 전화해주세요, 경찰 왔다고요.'하고. 그때 엄마가 왜 집에 안 오는지 되게 궁금했었는데 어릴 때니까 그런 게 금방 지나간 거 같아요.

- 처음 한국 왔을 땐 어땠어요?

= 처음에 한국말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밖에 몰랐어요. 초등학교는 일반학교 다녔는데요, 친구가 도와줬을 때 '감사합니다' 했더니 친구가 너무 신기해했어요. "선생님, 얘가 감사합니다래요"하고. 4학년 때는 외국 학생들 한국어 가르쳐주는 수업이 있어서 거기서 공부했어요. 몇 명 없었는데 일본 사람, 러시아 사람, 미국 사람, 우즈베키스탄 사람 있었던 것 같아요. 외국인이 많아서 적응하기 편했죠.

그런데 6학년 돼서 다른 학교 갔는데 애들이 달랐어요. 욕도 많이 하고. 저는 한국말을 못 하니까 싸울 수도 없고요. 전교에 외국인이 저 혼자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한국말도 서툴고 하니 그런 게 있겠죠. 친한 친구 별로 없었어요.

- 탈북자 대안학교는 어떻게 다니게 됐어요?

= 엄마 따라서 탈북민들 다니는 교회에 다녔는데 거기서 알려줘서 왔어요. 이름은 탈북 학교지만 (학생 중에) 한국 사람도 있고, 6명은 중국에서 태어났어요. (중국 국적이지만) 부모님이 탈북민인 친구도 많거든요.

- 주위에 알고 지내는 중국 사람들이 있어요?

= 한국에 있는 중국 친구 있고요, 아빠 친구들도 중국 사람들이에요. 아빠 친구들이 평소에 이야기하는 거 들어보면 회사에서 일할 때 사람들이 중국사람이니까 좀 못났다고 보는 거 같아요. 특히 남자니까 그런 게 신경 많이 쓰이는 거 같아요. 우리 아이들은 지금부터 공부 열심히 하면 한국 아이들 이기면 되는데 어른들은 그럴 수 없잖아요.

- 나중에 중국에 가서 살고 싶은 생각 있어요?

= 별로요. 중국에서는 대학 가기 힘들거든요. 전교 1등 해도 못 들어갈 수도 있어요. 들어가도 과학 수업도 영어로 하고. 한국 대학 가서 중국에서 1년 정도 공부하고 오는 거 하고 싶어요. 대학교 가려면 한국 국적 가지는 게 좋은데 만약에 안 그래도 되면 나중에 북한에 가 보고 싶어요. 친구들 고향에 가보고 싶어요.

- 만약에 한국 국적으로 귀화하면 이름도 바꿀 거예요?

= 아니요, 이름 그대로 할 거예요. 성 자오, 이름 뢰.

- 통일이 될 것 같아요?

= 전 될 것 같아요. 제가 젊을 때 통일이 빨리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북한 가서 일하고 싶어요. 꿈이 상담사예요. 저 같은 부모님 이혼하거나 외국에서 온 아이들도 상담해주고 싶어요. 저도 그러니까 그 애들 마음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고요. 사람들이 제가 북한 학교가 아니고 통일을 준비하는 학교에 다닌다고 알아주면 좋겠어요.

임창호 교수는 지금 10대인 탈북자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윗세대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만나는 또래집단과의 언어 격차가 더 크기 때문이다. 외래어도 외래어지만 '깜놀', '페북' 같은 줄임말은 더 당황스럽다. 그렇다고 한국 10대들이 북한에 대해 가진 고정관념이 부모 세대와 비교해 많이 나아진 것도 아니다. 임 교수가 만난 탈북 학생 중 일부는 일반 학교에 다니면서 '북한에서는 쥐를 잡아먹느냐'는 질문도 받았다. 묻는 사람이야 평생에 한 번일지 모르는 질문이지만 같은 질문을 되풀이해 받는 탈북자 입장에서는 스트레스가 된다. 아이들은 머뭇거리다 자연스럽게 따돌림당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이가 어린 만큼 문화 차이를 빨리 따라잡을 수도 있다고 교사들은 말한다.

"공부 대신 '개콘' 보고 싶고 스마트폰 만지고 싶은 애들 행동은 다 똑같아요. 십수 년 벌어진 차이를 몇 년 안에 따라잡아야 대학에 가서 삶이 연결되는데 남한 애들처럼 공부하는 습관이 안 들어서 그게 가장 힘든 점이에요. 아이들도 먹을 거 구하러 다니고 공사에 동원돼서 학교를 빠지는데, 그렇게 학교 빠진 애들을 졸업할 무렵에 교사들이 다시 불러요. 보고용 졸업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요."

전산부장을 맡은 한철이는 컴퓨터실 밖에 자기 컴퓨터 자리가 따로 있어서 이 자리에 개인 물건을 놓는다. 한철이가 들고 있는 원통은 공예 수업시간에 직접 만든 것으로, 뒷면에는 북한에서 친했던 친구들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이한철(가명) 15살, 탈북

중학교 3학년 과정

- 탈북한 과정이 어땠어요?

= 엄마는 종교 문제로 저보다 2년 전에 먼저 탈북했어요. 친아버지가 술을 많이 먹어서 제가 5살 때 엄마가 친아버지랑 이혼하고 나중에 재혼했는데, 엄마가 중국 가고 나서 새아버지랑 살았거든요. 그러다가 공부하러 다른 데 가서도 살고, 평양에 가서도 잠깐 살고. 그런데 엄마가 자기가 먼저 나와버렸으니까 마음에 걸렸나 봐요. 제가 정말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집으로 엄마가 사람을 보낸 거예요. 우리 집은 이미 엄마 때문에 감시받으니까. 방학이었는데 친구가 와서 자기 집으로 놀러 가자 해요. 그때 집에 아무도 없고 저 혼자 설거지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혼자 따라갔어요. 가니까 엄마가 보낸 사람이 있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보낸 사람 맞다고 엄마만 아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대는데 그래도 못 믿겠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친구 엄마가 가라고 했어요. 너 여기 살아봤자 꿈도 없고, 미래 위해서도 가는 게 좋다고. 그 친구 엄마가 저한텐 엄마나 같았거든요. 그래서 믿었어요. 맞아, 친구 엄마가 그때 북한 나쁘게 말한 거 생각나요. 계속 까먹고 있다가 지금 생각났어요. 그래서 믿고 떠났어요.

- 그래도 불안했겠네요.

= 그때는 탈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엄마 말고 없어진 게 한 명 있었나? 저희 마을은 작으니까 금방 소문나서 다 알거든요. 국경을 넘으니까 친척이 데리러 왔어요. 친척이 연길 옆에 살아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편하게 왔어요.

- 중국에서 라오스 한국 대사관까지 간 과정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나요?

= 돈 받고 탈북민들 날라다 주는 중국 경찰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검열 안 하는 공안 차 타고 심양까지 갔어요. 제가 북한에서 중국어 가르치는 학교 다녀서 중국어 잘했거든요. 지금은 다 까먹었는데. 아무튼 그래서 중국 사람인 척하고 별 문제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거기서 조선족들이랑 한국말하고 놀았어요. 원래 탈북한 사람들 중국에 있을 때에는 집 안에만 있거든요. 누가 신고해버리면 잡혀가니까. 그런데 길에서 애들이 노는 걸 보니까 나도 놀고 싶은 거예요. 조선족 말하고 북한말 똑같거든요. 거기 조선족 애들 집에 가서 컴퓨터도 하고 게임도 하고, 인터넷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우리 엄마 라오스까지 데려다 준 사람이 와서 스타렉스 비슷한 중국 차 타고 저도 국경까지 갔어요. 9인승인데 저 혼자 타고. 여관에서도 자고, 산도 넘는데 거기는 나라 사이에 국경이 따로 없데요.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고 밑에 뱀 나타나는 게 좀 무서웠어요.

라오스 가서 한국 시민권자인 엄마랑 만났어요. 이틀 동안 침대 버스 타고 비엔티안까지 가서, 한국 대사관에 가려고 툭툭을 탔어요. 영어로 '사우스 코리아'라고 사전 찾아서 말하고요. 새벽 5시 반에 날이 어스름하게 밝았는데, 내려보니까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보이는 거예요. 북한 대사관에 내려준 거죠. 그때 마침 비가 와서 초소에 사람이 없었어요. 경찰 눈에만 띄어도 위험한데... 그래서 급하게 다른 호텔로 갔어요. 거기서 좀 자고 아침 7시 반에 한국대사관에 전화했어요. 호텔주인하고 대사관하고 통화해서 호텔에서 잡아준 택시 타고 대사관에 갔어요. 거기도 엄청 가까워요, 2분 가니까 대사관이에요. 택시가 대사관 안으로 들어가서 '아이구, 살았다' 했어요. 그날 비 안 왔으면 북한 대사관에 잡혀갔을지도 몰라요. 끌고 들어가면 끝이니까.

- 북한에서 살던 기억은 얼마나 나요?

= 7살 정도부터는 기억나요. 주위 친구들... 우리 마을이 국경 마을이고 제가 어리다 보니까 잘 모르겠는데 제가 본 바로는 굶어 죽는 건 없었거든요. 굶는 애들은 있었겠지만 그런 (굶어 죽는) 일은 없었어요. 내 태어나기 전에 그랬대요. 제가 한 달 정도 다른 지역에서 살아봤는데 거기는 풀죽 먹고 농사도 안 되더라고요. 식량 없는 철이 따로 있거든요. 365일 다 없는 게 아니고. 가을에 제일 좋고요, 겨울에 괜찮고. 봄에도 나물이 조금씩 나니까 괜찮은데 여름이 문제예요. 풀죽만 먹어야 돼요.

- 태어나기 전 이야기를 들은 게 있어요?

= 거기서는... 사람들이 지나간 일을 회고 안 해요. 여기서는 계속 지나간 일을 해석하잖아요, 북한 사람들은 그런 걸 안 해요. 사람이 많이 죽었다, 그게 좋은 거 아니잖아요. 떠올리기 싫은 거죠. '고난의 행군'도 여기 와서 알았어요.

- 한국이나 외국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았어요?

= 북한 사람들 중국이 잘 사는지 다 알아요. 그런데 무시하고 계속 놀려요, 옛날에 북한보다 못 살았다고. 그래도 속으로 경제를 인정은 해요. 옛날에는 미국도 잘 산다고 인정 안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국도 잘 산다고 인정하는 사람 많아요. 표현을 못 하는 거지. 그리고 저 같은 경우는 한국 드라마 엄청 봤거든요.

- 한국 드라마는 어떤 식으로 봤어요?

= 엄마가 중국에서 제 걸로 외장하드를 사줬어요. 제가 컴퓨터에 관심 많으니까 제 컴퓨터도 있었어요. 중국에 먼 친척이 땅이 많아서 부자래요. 그래서 컴퓨터 수리가 안 되니까 깨지면 또 사주고 또 깨지면 또 사주고 그랬어요. USB는 한국 거 썼어요. 중국 거는 쓰레기라서 못 쓴대요. 그래서 중국에서 인터넷으로 다운 받은 거 받아서 봤어요. '목란 비데오' 안 찍힌 거.

북한에서 만든 '붉은별 OS' 있잖아요. 거기서는 한국 CD나 USB 못 써요. 다 차단돼서. 그래서 대신 윈도우XP를 깔아요. 노트북도 한국 거니까, 그러면 CD랑 USB 다 쓸 수 있거든요. 외장하드에도 '대장금', '주몽', '괴물' 같은 거 넣어서 한 3년 동안 봤는데 들키지 않았어요. 노트북이 왜 좋으냐면요, 탁 덮어서 USB 빼고 이불장 넣어버리면 끝이니까요. 서로 얼굴 다 아니까 이불장까지 열어보지는 않거든요.

- 그래서 북한에서 외국 드라마나 영화를 제일 많이 보는 게 보위부원들이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회수해가서 모든 방송분을 모아서 다 본다고요.

= 그렇죠. 보안부가 '나쁜 짓' 더 많이 해요. 보다 들키면 다 회수하는데 자기네가 본대요.

- 한국 음악도 들었어요?

= 음악은 별로 안 들어봤어요. 조그만 애들은 음악 별로 안 듣잖아요. 북한 애들이 음악에 별로 관심 없어요. 중국 드라마에 나오는 노래나 많이 듣고. 북한에서 노래 듣는다면 TV에 CD 넣어서 듣는 거고요. MP3는 큰 애들이 갖고 있는데 컴퓨터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중국 건 작은데 북한 건 엄청 크고 이어폰 꽂으면 잡음이 얼마나 많은지 부드드득 게임기 소리 나요. 노래 못 들어요, 최악이에요. 6비트예요.

그런데 제가 평양에 산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한국 노래 들어봤어요. 윤도현의 '나는 나비'하고 안재욱의 '친구'를 들었어요. 할아버지들이 장윤정 노래 듣는 것도 봤어요. 하루는 길에서 어떤 청년이 2G폰 들고 가다가 노래를 틀었는데 한국어가 나와요... 그럼 의심할 여지가 없잖아요. 한국에 와서 다른 친구가 중국 노래 '펑요' 듣는 걸 봤는데 그 노래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평양의 그 청년이 안재욱의 '친구'를 들었던 거예요. 또 얼마 전에 (합동 수학여행 갔던) 고등학교 형이 노래 부르는데 제가 북한에서 뭔지도 모르고 들었던 노래인 거예요. 가사를 인터넷에 쳐보니까 '나는 나비'였어요.

- 그렇게 모르고 본 게 많았어요?

= 엄마가 '대장금' 보여줬을 땐 북한 영화인 줄 알았어요. 북한이 사극 많이 만들거든요. 사극에서 하는 말이 북한 표준어랑 비슷해요. 그래서 전혀 한국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NG스페셜 보니까 말이 이상한 거예요. 이거 어디 말씨지? 엄마한테 '어느 나라 말이요?' 따져 물었어요. 그러니까 한국 거래요.

북한에 있을 땐 학교 가면 북한 사람이고 집에 오면 남한 드라마 보고 남한 사람 돼요. 그렇다고 한국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집이 못 살았던 것도 아니고... '영화 저렇게 잘 만드네, 좋다' 생각은 했지만 그것 때문에 북한 나쁘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북한이 영화 세트만 좋게 만들거든요. 그래서 한국 드라마도 저거만 저렇게 만들었겠지, 했는데 보다 보니까 현실적인 것 같고...

-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북한에서 이사를 많이 다닌 것 같은데요.

= 다른 도시 나가서 공부하고 있을 때 엄마가 없어진 거예요. 새아버지는 착해서 집으로 와서 있으라고 했는데 전 평양에 있는 친척 집에 갔어요. 평양에 갈 때 전학증을 받질 않아서 학교를 못 다녔어요. 내가 고향이 평양이면 북한에 지금도 아직 있을 거야. 그전에도 멀리 갔던 적이 있는데 4일 동안 굶으면서 94km를 집까지 걸어갔어요. 하루종일 걸어 다니면 나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대여섯 명 봐요. 내비게이션 없으니까 서로 길 물어보고. 길에 누웠다가 내 이대로 자면 죽겠구나, 그런 생각 들어서 질겅이 따먹고. 그리고 정신 차리고. 독 있는 거 먹었다고 토해서 더 맥없어지고. 고난의 행군 했어요.

- 한국에 와서는 어떻게 살았어요?

= 하나원에서 나와서 여기 오기 전에 다른 학교 다녔어요.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였는데 그땐 중1이니까 미래에 대한 생각을 전혀 안 한 거 같아요. 수업을 다 영어로 하니까 스트레스 받고. 지금은 돈 주고 배우래도 배우겠는데 2년만 더 있을 걸 후회도 좀 해요. 배울 마음이 없으니까 환경이 좋았는데도 안 배워지더라고요. 애들도 차별은 아닌데 무시하는 것도 있고 힘들었어요. 이 학교에서 제일 좋은 건 친구들. 같은 고향 친구들이 몇 명 있어요.

- 지금 학교생활은 어때요?

= 수업이나 단체 생활이 마음에 들죠. 일단 일반 학교랑 다르게 애들이 북한 사람들이니까 친근함도 있고. 우리도 그렇지만 중국 애들이랑 한국 누나랑 처음엔 다 힘들어했어요. 중국 애들은 자기들끼리 중국어로 말하고. 그리고 생활도 부딪히는 게 있었는데 뭐랄까. 북한 애들은 씻는 거 싫어해요. 저도 싫어했다가 많이 고쳤는데 중국 애들은 중국에서 많이 씻었으니까 계속 우리보고 더럽다고 했어요.

- 꿈이 뭐예요?

= 지금은 컴퓨터 엔지니어인데 북한 애들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일단 공부 열심히 하고, 대학 갈 때 컴퓨터 쪽으로 가든지 예술 쪽으로 가든지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북한에 인터넷이 없잖아요. 거기에 랜선 깔려면 내가 할 일이 많은 거 같아요. 고향 친구들한테 가서 컴퓨터도 가르쳐주고. 고향 땅을 3D로도 만들어 보고 싶어요. 탈북자 중에 자기 고향 지도를 그리는 분이 있대요. 저는 3D로 아예 그려보려고요. 저희 집은 디자인해놨어요. 학교에서 전산부장이라서 Vegas로 생일 동영상 같은 거 만드는데 지금까지 배운 기술 잊어먹지 않으면 돼요. 지금 시급한 건 검정고시니까 일단 그거하고...

- 한국에 사는 탈북자들도 많이 알고 지낼 텐데, 어른들이 기억하는 북한하고 본인이 기억하는 북한은 어떻게 다른가요?

= 그분들은 옛날 북한을 기억하죠. 저랑 같은 하나원 기수에 고난의 행군 때 러시아에 벌목꾼으로 나갔다가 탈출한 50-60대 분들이 있는데요. 저랑 다른 사람들이 북한 이야기하면 거짓말이라고 해요. TV도 있고 녹화기도 있다고 하면. 러시아에서 숨어 살아서 북한 사람을 못 봐서 북한 얘기를 잘 모르거든요. 90년대 고난의 행군 때를 많이 기억하니까. 지금은 북한이 못 산다고 해도 발전되긴 했죠. 그건 인정해줘야 하는데 몰라요. 그리고 제가 아는 것도 이제는 북한 최신 정보가 아니에요. 여기 와서 2년 있었으니까. 내 있을 때 그랬다, 이렇게 말해야지 괜히 말했다가 후배들한테 욕먹어요.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나오는 사람들은 여기 와서 5년, 10년 넘게 산 사람들이잖아요. 그분들 하는 소리가 맞는 것도 있는데 틀린 것도 많죠. 내 생각엔 90%가 옛날 말 하고 있어요. 탈북민들도 재미로 보는 거죠. 북한이 바뀌는 속도가 빨라서, 지금 공산주의라 해도 공산주의는 절반이고 속은 자본주의예요. 농촌 가면 자기 개인 논밭 없는 집이 없어요. 없는 집은 굶는 집. 개인 밭에서 나오는 소득 가지고 장사도 하고. 보안원 와이프들도 장사해요. 그래서 (시장이) 돌아가요.

- 통일이 될 것 같아요?

= 통일되죠.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자꾸 내년 내년 하는데, 내 생각에는 이번엔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빠르면 2, 3년 안에 되겠는데 늦어도 10년 안에는 돼요. 내가 대학교 졸업한 다음, 결혼 전엔 무조건 돼요. 제가 평양에서 국경에서도 못들은 한국 노래 들었잖아요. 평양 사람들이 더 물들었단 소리예요. 단속하는 사람들이 시민들 돈 조금씩 빼앗아 먹어야 하니까, (장사하는 사람들하고)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저도 저만 탈북하는 줄 알았다고 했잖아요. 근데 와보니까 대한민국에 2만8천 명 와 있는 거예요. 아, 북한 망할 때가 됐네. 초소 세워놓고 다른 지방 못 가게 막는다고 하지만 걸어 다니면 얼마든지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죠. 국민들을 못 막아요. 난 처음에 탈북해서 중국 가면서도 김정은 편들었어요. 엄마한테 가는 거지 나라를 배신한 건 아니다, 그랬는데 와서 보니까 나쁜 놈인 거예요. 우리 같은 15살짜리한테 욕먹는 어른이 어디 있어요. 그냥 통일된다고 난 생각해요.

한국은 북한에 관심 없잖아요. 자기 사는 게 바쁘고, 뉴스 볼 때만 북한 생각하지. 교회 친구들도 기도할 때만 북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섭섭했어요. 그런데 막상 나도 한국 살수록 북한을 잊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사진에서 들고 있는 원통)에 친구들 이름 적어놨어요. 잊어버릴까봐. 두 명은 생각 안 나서 못 적었어요. 긴장이 풀리면서 모든 걸 다 까먹어요. 그래서 이렇게 계속 물어봐주는 게 감사해요. 아까 친구 엄마가 저보고 중국 가라고 말한 것도 방금 말하면서 생각났잖아요.

총학생회의 같은 전교행사가 있을 때 예린이는 애국가, 교가 반주를 맡는다.

김예린 18살, 한국 국적

고등학교 2학년 과정

- 탈북자 학교에 어떻게 오게 됐어요?

= 아빠가 통일에 대해서 공부해보지 않겠냐고 먼저 말해서요. 전 처음엔 절대 안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주제였어서.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하고 아예 먼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제가 해외에 나가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한국은 아직까지 분단 국가 아니냐' 그런 질문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 학교에서 오기 전까지는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라든가 그런 게 없어서 자세하게 대답 못하고 그냥 맞다, 분단 국가다, 대답했죠.

- 통일부 다큐멘터리(위 영상)에서 인터뷰한 거 보니까 이런 말을 했더라고요. 탈북자 친구들이 "같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다르고, 다르다고 생각하면 같다"고.

= 제가 외국 가서 만난 친구들이 말도 안 통하고, 머리색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른데도 너무 잘 지내다 왔거든요. 그래서 이 학교 올 때도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다를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만나보니까 벽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때 너무 힘들어서 선생님 붙잡고 울면서 얘기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우리는 다르다'고 인정하니까 같은 점이 보이더라고요.

- 어떤 건가요?

= 자잘한 것들 있잖아요. 공기놀이를 한다든지, 한국 사람들이 하는 것들.

- 학교 졸업하고 목표가 뭐예요?

= 유학 준비하고 있는데요, 한국 대학보다 미국 대학 가서 올바른 생각을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딱히 큰 공부를 하러 미국 가는 건 아니고요.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NGO 쪽에서 일하고 싶어요. 네팔에 지진 날 때 구호하러 달려가고 그런 일이요. 아니면 잘못된 교육을 바로잡는 일을 하고 싶어요. 교육은 한 사람을 성공시키는 중요한 일인데 너무 대한민국에서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부하는 기계를 만드니까.

- 통일이 될 것 같은가요?

= 네, 꼭 됐으면 좋겠어요. 막막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될 거 같아요. 그거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저는 먼저 섞이는 게 아니면 통일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북한 애가 남한 학교에 가는 경우는 많은데 남한 애가 북한 학교 가는 경우 없다고 하잖아요. 많은 분들이 제가 공부 못해서 여기 왔다고 생각하지만 전 이 공부가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살아갈 시대에서 해결할 문제기 때문에, 누구라도 몸소 뛰어들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 통일되면 뭘 하고 싶어요?

- 친구들 고향에 있던 백화점에 가 보고 싶어요. 거기에 옷이 되게 비싸대요. 거기 구경도 하고 싶고, 한철이가 시골에 살았다는데 거기도 궁금하고. 평양이 제일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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