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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껍데기를 태우다

  • 민용준
  • 입력 2018.06.08 14:36
  • 수정 2018.06.08 14:37
ⓒhuffpost

잘 알려진 대로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헛간을 태우다>는 ‘헛간을 태운다’는 모호한 말을 하는 ‘그’와 그 말을 듣고 불에 탄 헛간을 찾아다니는 ‘나’와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하듯 사라져버린 ‘그녀’에 관한 이야기다. 번역본 기준으로 30페이지에 불과한 이 단편소설은 하루키 특유의 허무주의적 사유로 점철된 세계관 한편에 숨을 죽이고 자리한 미스터리의 예감을 남긴다. ‘헛간을 태운다’는 모호한 말은 곱씹을수록 섬뜩한 상상으로 폭발하는 뇌관 같다. 때가 되면 헛간을 태운다는 ‘그’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녀’ 사이에 드리운 서사적 그림자는 각각의 영역에 존재하는 두 개의 그림자로 이해돼야 마땅하지만 하나의 그림자 안에 포괄된 인과라는 예감을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그녀’의 행방을 궁금해하고, ‘그’가 불태웠을 법한 헛간을 꾸준히 돌아보는 ‘나’는 결국 ‘그녀’를 찾길 포기하고 간혹 타오르는 헛간이나 상상하는 무력한 존재로 늙어갈 뿐이다. 불길한 징후가 방치된 세계의 그림자를 예감조차 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사유만 거듭하는 존재는 허무해서 되레 공포스럽다.

<버닝>은 하루키의 원작을 참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양식으로서 체화한 작품이다. <헛간을 태우다>의 ‘나’와 ‘그’ 그리고 ‘그녀’가 이룬 삼각관계는 <버닝>의 종수(유아인)와 벤(스티븐 연) 그리고 해미(전종서)의 삼각관계로 이양됐다. ‘나’는 우연히 알게 된 ‘그녀’로 인해 우연히 알게 된 ‘그’에게서 헛간을 태운다는 고백을 듣게 된 뒤 ‘그’가 태울 법한 헛간을 찾아다니던 중 ‘그녀’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 <헛간을 태운다>의 주요한 골자다. 여기서 ‘나’를 종수로, ‘그’를 벤으로, ‘그녀’를 해미로 치환한 것이 <버닝>의 주요 서사다. 원작의 서사는 영화의 서사 안에 고스란히 접목됐다. 동시에 ‘헛간을 태운다’는 은유적 뉘앙스까지 그대로 끌어안음으로써 불분명하면서도 불길한 짐작을 양산하는 원작의 의도까지 고스란히 인수했다. 하지만 이창동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다. <버닝> 역시 <헛간을 태우다>가 아닌 것이다.  

하루키의 원작은 <버닝>이라는 세계관의 전반을 인테리어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참고한 모델하우스에 가깝다. <헛간을 태우다>로부터 많은 것을 빌려왔지만 <버닝>은 감정적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원작과 달리 감정적 발화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헛간을 태우다>의 인물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 속에 대자연처럼 존재하는 것마냥 보이지만 <버닝>에는 물음표를 쥐고 세계의 흐름을 역류해 정답을 얻고자 하는 인물 종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헛간을 태우다>에서 ‘그’가 태운다는 헛간을 찾아 떠도는 ‘나’처럼 <버닝>의 종수 역시 벤이 태운다는 비닐하우스를 찾아 나서고, 헛간만 찾는 ‘나’와 달리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벤의 취미와 해미의 갑작스러운 실종에 모종의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고 벤을 추적한다.  

종수는 ‘태운다‘는 말을 은유로 받아들일 만한 경험적 근거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분노 조절 장애가 있었던 종수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아내는 집을 나갔다. 그로 인해 종수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집에 남은 어머니의 옷가지를 불에 태웠다고 말한다. 종수는 태운다는 행위가 존재를 지우는 행위일 수 있다고 짐작할 만한 경험적 근거가 있다. 동시에 종수가 소설가라는 꿈을 가진 인물이라는 건 의미심장한 설정처럼 느껴진다. 벤은 종수가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그가 메타포에 공감할 수 있는 인물임을 인식하고 있다. 결국 벤이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고백하는 건 하루키의 원작에서 ‘그’가 ‘나’에게 헛간을 태운다고 고백하는 행위처럼 무심한 고백에 가깝지만 이는 <버닝>에서 종수라는 인물에게 부여한 경험과 자질을 통해 <헛간을 태우다>와 판이한 양상의 이야기로 확산시킬 동력이 된다. ‘나’는 ‘그’가 말한 헛간의 은유를 읽어낼 의무가 없는 인물이지만 소설가를 꿈꾸는 종수는 벤의 비닐하우스가 은유하는 대상을 읽어내거나 상상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종수가 세계의 은유와 호흡하는 본능을 지닌 인물일 수 있다는 건 <버닝>의 서사를 진전시키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버닝>에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보다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 등장한다. 귤을 까먹는 판토마임을 보여 주는 해미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그뿐이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진짜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그리고 해미는 종수에게 유년 시절 종수가 자신에게 ‘되게 못생겼다’고 말한 적 있다고 기억을 더듬게 한 뒤 자신이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밝히고, 종수에게 말한다. “이제 진실을 말해봐.” 해미에게는 존재한다는 믿음보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 과거보다 우월한 지금의 자신을 통해 위장된 위안을 확인하며 불안한 현실을 망각하거나 그로부터 도피한다. 카드값을 갚기 전까지 돌아오지 말라는 가족과의 관계를 잊고, 먼 아프리카 대륙에서 행해진다는 성스러운 의식을 동경한다.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탐닉할 이상을 찾는다. 자신의 근본적 실체를 지울 메타포가 될 만한 무언가를 찾아 구차한 현실을 덮거나 그럴듯하게 수식한다. 그런 의미에서 벤은 해미에게 찾아온, 강력한 메타포가 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벤은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걸 내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어서야. 더 좋은 건 그걸 내가 먹어버린다는 거지.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난 나 자신을 위해서 제물을 만들고 내가 그걸 먹는 거야.” 이 대목에서 해미가 제물의 의미를 묻자 벤은 그것이 메타포라 말한다. 벤은 메타포를 먹어치우는 존재다. 주기적으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그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건 그래서다. “한국에는요, 비닐하우스가 진짜 많아요. 쓸모없고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거 같아요. 그리고 난 그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거죠.” 벤이 보기에 한국은 먹어치우기 좋은 메타포가 끊임없이 제공되는 환경인 것이다. 결국 해미와 벤은 서로에게 유용한 메타포의 관계에 가깝다. 다만 현실을 압도할 만한 메타포를 곁에 두고 싶은 해미의 욕망과 달리 벤은 끊임없이 대체 가능한 메타포를 파괴적으로 수집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종수는 메타포를 찾아 떠도는 해미와 벤의 세계를 직시하는 인물이다. 종수는 그런 메타포로 점철된 텅 빈 내면에 입장하거나 관찰하며 스크린과 객석을 중계하는 역할을 맡은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종수는 관찰하고 사유하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헛간을 태우다>의 ‘나’와 달리 극적인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대상이다. 하루키의 원작에서 이양된 것으로 보이는 세 캐릭터 중 가장 큰 차이가 느껴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헛간을 태우다>의 ‘나’가 세 인물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유부남인 것과 달리 <버닝>의 종수는 벤보다 어린 남자다. 원작의 ‘나’와 ‘그’가 소득 격차로 구분되는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는 반면 <버닝>의 종수와 벤의 빈부 격차는 좀처럼 좁힐 수 없는 두 사람의 거리감으로 작용한다. 종수는 부모에게 경제적 원조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건사하기 위해 일용직 육체노동을 하며 전전한다. 반대로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살아온 것으로 보이는 벤은 일찍이 부를 축적해 삶이 무료할 정도로 여유롭다. 그래서 ‘재미있는 건 무엇이든 하는’ 벤은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가 느껴져야 진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장의 삶을 건사하며 소설가의 꿈도 견인해야 하는 종수 입장에서 이는 도무지 현실 감각이 없는 비현실의 언어일 뿐이다.  

그럼에도 종수가 벤과 거듭 만나게 되는 건 벤과 함께해야만 해미를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무료한 일상에서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를 느끼게 해줄 만큼 재미있는 일을 찾아다니는 벤에게 새롭게 만난 누군가는 예측 불가능한 재미의 가능성을 품은 존재일 수 있다. 종수가 벤에게 갖는 불편함은 벤 입장에서는 신경 조차 쓰이지 않는 감정일 뿐이다. 반대로 종수는 벤의 재력이 해미를 끌어당기는 중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벤에게 모종의 질투심과 무력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고, 부유하고 말끔한 벤의 친구들 앞에서 한낱 신기한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듯한 해미의 모습을 바라보는 종수의 얼굴에서는 모종의 수치심과 혐오감이 읽힌다. 종수가 ‘나’와 달리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이라는 점은 그의 캐릭터가 하루키의 원작이 제시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다른 두 사람과 다른 곳에서 소환된 존재임을 추측하게 만든다.  

사실 우리 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지만 윌리엄 포크너의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다. 포크너의 소설은 삶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남자,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서 죄의식을 느끼는 한 아이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그려진 반면, 하루키는 같은 제목으로 장난처럼 헛간을 태우는 남자에 대해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창동 감독의 말처럼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뿐만 아니라 윌리엄 포크너의 중력도 느껴지는 작품이다. 포크너의 단편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소설 <헛간 타오르다(Barn Burning)>는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 영향을 미친 소설로도 알려져 있다. 하루키는 이런 연관성을 부정했지만 어쨌든 포크너의 단편소설은 <버닝>의 세계관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종수는 <헛간을 태우다>의 ‘나’가 자리한 위치에 있지만 캐릭터 성격상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에 등장하는 소년 사티를 모티프로 한 인물처럼 보인다. <헛간 타오르다>는 타인의 헛간에 불을 지른 아버지 때문에 재판을 받고 해당 지역에서 추방당하는 사티의 가족에 대한 사연에서 시작된다. 사티의 아버지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으로 참전한 전력이 있다.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흑인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 의식을 드러낸다. 사티는 그런 아버지의 폭력성을 무분별하게 옹호하는 소년이다. 다시 헛간에 방화를 저지르려는 아버지가 험한 꼴을 당할까 염려돼 그를 막아보려 하지만 의도와 다르게 아버지를 비극적인 상황으로 몰아가는 계기를 만들어버리고 그로 인한 고통 속으로 내몰린 채 그로부터 도피하듯 내달리는, 비운의 존재다.  

종수는 시청 공무원을 폭행한 죄로 수감 중인 아버지의 재판이 열릴 때마다 법원을 찾는다. 종수는 아버지의 폭력성을 경계하지만 아버지를 증오하는 것 같지는 않다. 변호사의 요청에 따라 아버지를 위해 탄원서를 받는 종수는 여전히 아버지의 중력 안을 맴도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종수가 소설가를 꿈꾸는 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고 싶다는 내면이 작동한 결과처럼 보인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로서의 삶을 꿈꾸는 건 자신을 지배하는 어떤 세계로부터 달아나야 한다는 본능적 선택처럼 보인다. 그래서 <버닝>의 결말은 결국 종수가 작가로서 선택 해야 한다고 믿는 결말로 나아가는 것 같다. 영화의 결말 직전에 종수는 비로소 무언가를 쓰는데 이는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수많은 메타포의 세계 속에서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는 결말을 찾아가는 작가로서의 여정처럼 보인다. 결국 <버닝>의 결말은 메타포를 사냥하는 포식자를 처단하는 작가로서의 선택이자 삶의 의미를 불어넣던 존재의 상실감을 야기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에 대한 분노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알맹이가 없는 은유만을 소비하는 껍데기 같은 존재와 세계에 대한 환멸과, 그러한 존재와 세계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폭력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종수의 마지막 행위가 그런 감정을 모두 벗어던지고 불태워버리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정화하겠다는 제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종수는 끊임없이 메타포의 허상을 추구하게 만드는 존재 자체를 스스로 응징함으로써 현실을 사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보존한다.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윌리엄 포크너를 태워 양식적인 메타포의 세계를 구축한, 이창동의 새로운 시도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창동이라는 스토리텔러가 처음으로 온전히 영화적인 미장센으로만 건축한 결과물을 실험한 첫 사례라 불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적 형식성을 고려한 시도로만 한정할 결과는 아닌 것 같다. 

진실을 알 수 없는 인과관계의 빈자리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의 미스터리함을 암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게 된 세상에 대한 이야기.

이창동 감독의 말은 <버닝>이 발견하고 추구한 모호한 미스터리 자체가 동시대를 지배하고 관통하는 주요한 심리를 반영한 결과라는 말처럼 들린다. 결국 이창동이라는 대가가 바라보는 지금의 세태를 반영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거대한 껍데기의 신전을 짓고 모조리 태워버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창동이라는 인장까지 모두 다 태우고 얻어낸 것만 같은 낯선 세계. 어쩌면 <버닝>은 이창동의 경력에 전환점이 될 첫 번째 영화이자 새로운 메타포일지도 모르겠다.

* ESQUIRE KOREA 2018년 6월호에 실린 글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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