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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맞붙지 못한 세계챔피언, 장정구 vs 유명우

[신들의 전쟁, 세상을 뒤흔든 스포츠 라이벌⑦]

ⓒhuffpost

한국인 프로복싱 역사상 세계 타이틀을 가장 오랫동안 보유했던 두 선수. 1980년대 프로복싱의 엄청난 인기몰이 속에 같은 체급에서 돌주먹을 자랑했던 두 선수. 그러나 팬들의 뜨거운 열망에도 끝내 라이벌 대결은 성사되지 못했다. 주인공은 ‘짱구’ 장정구와 ‘작은 들소’ 유명우다. 만약 두 선수가 맞대결을 펼쳤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는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복싱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젯거리다.

장정구는 1988년 WBC(세계복싱평의회) 라이트플라이급 15차 방어에 성공한 뒤 챔피언 벨트를 자진 반납했다. 1983년 3월부터 1988년 6월까지 무려 5년 3개월이나 챔피언 벨트를 보유했다. 유명우는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플라이급 17차 방어에 성공하며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한국 프로복싱 사상 최다 방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챔피언 자리에 앉은 기간도 1985년 12월부터 1991년 4월까지 무려 5년 4개월로 장정구보다 한 달가량 길다.

통산 전적은 장정구가 42전 38승 4패, 유명우는 39전 38승 1패로 장정구는 4번 졌고, 유명우는 딱 1번밖에 지지 않았다. 하지만 장정구도 4패 중 3패가 은퇴를 번복하고 복귀한 뒤에 당한 것이다. 통산 KO율은 장정구가 17KO승, 유명우가 14KO승으로 장정구(40퍼센트)가 유명우(36퍼센트)보다 조금 높다. 장정구는 2010년, 유명우는 2013년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에 나란히 헌액됐다.

두 선수의 최전성기는 1980년대 중후반으로 겹친다. 당시 이들의 맞대결은 최고의 빅카드로 꼽혔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두 선수는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장정구는 “링에 올라갈 때 진다는 생각은 안 한다. 그런 마음으로 싸웠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반면 유명우는 “만약 맞대결이 펼쳐졌다면 내가 무조건 졌을 것이다. 그의 경기 방식은 나와 맞지 않는다”며 몸을 낮췄다.

두 선수 모두 인파이터였지만 스타일은 조금 달랐다. 장정구가 상대에 따라 변칙적인 경기 운영을 했다면, 유명우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기 운영을 하면서도 꾸준히 상대를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둘 다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복싱 입문

장정구는 1963년 2월 4일 부산에서 태어났고, 유명우는 1964년 1월 10일 서울 출신이다. 나이는 장정구가 한 살 더 많다. 프로 데뷔도 장정구가 1980년, 유명우가 1982년으로 장정구가 2년 빠르다. 키는 장정구 161센티미터, 유명우 163센티미터로 유명우가 2센티미터 정도 더 크고, 몸무게는 현역시절 최경량급인 같은 체급에서 뛰었기 때문에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두 선수가 복싱에 입문한 계기는 조금 달랐다. 우선 장정구는 부산 아미동 빈민가에서 거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필리핀의 세계챔피언 벤 빌라폴로에게 도전장을 냈던 김현치 선수에게 반해 부산 아미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복싱 명문’ 극동체육관에 들어가면서 복싱을 시작했다.

반면 유명우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가 우연히 가져온 글러브를 끼어본 것이 복싱에 입문한 계기가 됐다. 서울 용산구 한강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역시 서울 봉천동의 ‘복싱 명문’이었던 대원체육관에 입문했다.

둘 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만 열두 살 때 복싱을 시작했는데 장정구는 복싱 글러브를 끼자마자 유소년 시절부터 각종 아마추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성공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복싱계의 편파 행정에 환멸을 느끼게 되는데, 전국체전 부산 예선에서 우승을 해도 본선 진출권은 다른 선수에게 준다거나, 특정 선수와의 시합 때 판정 불이익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장정구는 프로에서는 진정한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프로 전향을 서둘렀다.

유명우는 중학교 3학년 때 전국학생신인선수권대회를 통해 데뷔했는데 워낙 체구가 작아 신장과 리치(양손을 뻗었을 때 손이 미치는 거리)에서 밀리는 바람에 포인트 위주의 아마추어 성적은 겨우 1승 3패에 그쳤다. 하지만 이때 이미 복싱 기술이 높은 수준에 올라 웬만한 프로 선수와도 대등하게 스파링을 할 정도였다.

마침내 두 선수는 프로에 데뷔했다. 장정구는 만 열일곱 살 때인 1980년 11월 17일 MBC 신인왕전을 통해 프로에 데뷔했고, 이 대회에서 우수선수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유명우는 만 열여덟 살이던 1982년 3월 24일 김득구와 김강민의 라이트급 동양타이틀전 오프닝 경기로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4라운드 경기에서 최병범 선수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이때부터 유명우는 36연승 행진을 이어갔다.

그날 김강민을 이긴 김득구는 WBA 라이트급 타이틀 도전권을 얻었고, 그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챔피언 레이 맨시니(Ray Mancini)와 대결하다가 쓰러진 뒤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안방 호랑이’ 꼬리표 속 말년의 억울한 패배

두 선수는 차츰 복싱팬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장정구는 1982년 9월 18일 파나마의 일라리오 사파타에게 세계 타이틀 도전장을 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사파타는 긴 리치를 활용한 아웃복싱을 펼쳤고, 결국 장정구는 고전 끝에 1 대 2로 판정패했다. 유명우는 1984년 12월 필리핀의 에드윈 이노센시오를 누르고 동양챔피언에 등극했다. 이어 손오공과의 라이벌 매치에서 7회 KO승을 거두며 세계 타이틀 도전권을 얻었다.

장정구는 6개월 뒤인 1983년 3월 26일, 세계 타이틀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일라리오 사파타에게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상대를 철저히 분석해 3회 TKO승을 거두고 마침내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유명우는 1985년 12월 8일 W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이었던 미국의 조이 올리보를 대구로 불러들여 판정승을 거두고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이후 장정구는 15차 방어, 유명우는 17차 방어까지 성공하며 나란히 5년 넘게 세계챔피언 벨트를 보유했다.

두 선수는 세계 타이틀을 방어하면서 큰 고비가 몇 차례 있었다. 장정구의 경우 1984년 8월 18일 경북 포항에서 열린 일본의 도카시키 가쓰오와의 4차 방어전이었다. 당시 장정구는 체중을 무려 14킬로그램이나 감량한 데다 포항의 찜통더위와 맞서야 했다. 더욱이 8·15 광복절 사흘 후에 경기가 열려서 일본 선수에게는 절대 질 수 없는 경기였다. 결국 장정구는 엄청난 정신력으로 9회 TKO승을 거둔 뒤 기쁨에 겨워 오열했다. 하지만 엄청난 체력 소모로 몸에 수분이 많이 빠져나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졌다.

유명우의 고비는 18차 방어전에서 찾아왔다. 1991년 12월 17일 일본 원정으로 치른 이오카 히로키와의 경기였다. 유명우는 그때까지 36전 전승 14KO승을 이어가고 있었으니 겁날 게 없었고 경기도 근소하게나마 우세했다. 그런데 심판들의 채점 실수로 1 대 2 판정패를 당하고 타이틀을 잃고 말았다. 20차 방어전을 마치고 명예롭게 타이틀을 반납하고 은퇴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두 선수는 롱런에 성공했지만 대부분 국내에서 방어전을 치러 ‘안방 호랑이’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장정구는 일본의 구시켄 요코가 가지고 있던 13차 방어 기록을 넘어서 15차 방어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14차 방어까지 국내에서 가졌고, 15차 방어전을 처음으로 일본 원정으로 치렀다. 15차 방어전 상대는 11차 방어전 상대였던 일본의 오하시 히데유키였다. 일본 고라쿠엔 경기장에서 열린 이 경기는 경량급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난타전 끝에 장정구가 다운을 무려 7번이나 빼앗으며 8회 TKO승을 거뒀다. 그리고 장정구는 이 경기를 끝으로 타이틀을 스스로 반납했다.

유명우도 17번의 방어전을 모두 국내에서 치렀는데, 공교롭게도 첫 해외 원정에 나섰던 18차 방어전에서 심판들의 채점 실수로 일본의 이오카에게 억울한 패배를 당하고 타이틀을 잃고 말았다.

두 선수 모두 챔피언에서 내려온 뒤 명예 회복을 별렀다. 억울한 패배를 당한 유명우는 WBA에서 판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고, 결국 제소 끝에 이오카와의 재경기가 받아들여졌다. 타이틀을 억울하게 빼앗긴 뒤 11개월 만에 다시 일본에서 이오카의 3차 방어전 상대로 치러진 리턴매치에서 유명우는 2 대 0의 판정승을 거두고 명예 회복에 성공했다. 이후 1993년 7월, 일본의 호소노 유이치를 물리치고 1차 방어에 성공한 뒤 챔피언 벨트를 자진 반납했다. 프로 통산 전적은 39전 38승(14KO) 1패. 유일한 패배가 잘못된 판정으로 기록된 이오카와의 승부였다.

장정구는 챔피언 벨트를 스스로 내려놓은 지 1년 만에 다시 링에 복귀했다. 하지만 ‘경량급의 타이슨’으로 불렸던 멕시코의 움베르토 곤잘레스, 그리고 태국의 소트 치탈라타와 무앙카이 키티카셈에게 잇따라 패배를 당한 뒤 영원히 링을 떠났다. 아쉬운 점은 3경기 모두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심판진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패배를 맛봐야 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장정구는 프로 통산 42전 38승 4패를 기록했다. 4번 중 3번이 은퇴 직전의 다소 억울한 패배였다.

끝내 무산된 라이벌 매치는 거액의 대전료 탓

당시 두 선수의 수입은 어마어마했다. 1980년대 후반 당시 프로야구 최고 스타 최동원의 연봉이 7,000만 원 정도였고, 강남의 30평 아파트가 7,000만 원가량 했을 때인데 장정구는 국내 스포츠 선수 중 최고액인 연간 2억 4,000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유명우도 1988년 3억 8,000만 원의 대전료를 받았는데, 이것은 국내 프로복서 중 최고액 기록으로 남아 있다.

두 선수의 맞대결이 무산된 이유는 대전료 탓이 컸다. 두 선수의 통합 타이틀전 얘기가 많이 나왔지만 당시 두 선수의 대전료를 맞추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지는 선수는 명예와 자존심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 때문에 프로모터 쪽에서는 최소 3억 원 이상의 대전료를 준비해야 했는데, 그 누구도 이런 거액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두 선수가 은퇴한 지 20여 년이 넘어 뜬금없이 맞대결 이야기가 나왔다. 2017년 2월 1일, 삼일절을 한 달 앞둔 시점에 가수 김장훈 씨의 소속사인 ‘공연세상’은 “삼일절 특집으로 복싱팬들에게 꿈의 매치였던 전 세계 챔피언 장정구와 유명우의 레전드 매치를 독도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공연세상 측은 “독도의 불규칙한 기상 상황을 고려해 대전 날짜는 3월 1일부터 3월 중순까지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며 “두 선수는 조만간 기자회견을 통해 경기 진행방식과 계획을 밝힐 예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레전드 매치’는 흐지부지 성사되지 못했고, 어떤 이유로 무산됐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두 선수의 라이벌 대결은 50대의 중년이 되어서도 복싱팬들의 궁금증만 유발한 채 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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