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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7월 22일 16시 48분 KST | 업데이트됨 2020년 08월 13일 10시 21분 KST

박원순 사건과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이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

'순백의 피해자'는 필요하지 않다.

라이언스게이트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스틸컷

※ 이 기사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돼 있지만, 실제 벌어진 사건입니다.

몇 년 전 이야기를 꺼내 보자면, 내 친구들 사이에서 ‘골뱅남‘이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 있었다. 딸아들이 나보다 조금 어린 정도라고 했으니 최소 작은아버지뻘은 되는 중년 남성이었다. 사적으로 얽힐 이유도 의지도 없음은 자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와 몇 차례 단둘이 술을 마셨다. 백수 시절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썩은 동아줄’이 그였던 탓이다.

‘골뱅남’은 술을 마시지 않는 내게 술을 사겠다며 불러내곤 했다. 대놓고 추접스러운 말을 하진 않았지만 손과 팔과 어깨에 잦은 ‘터치‘가 있었다. 자고로 대화할 때는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것이 예의라 배웠거늘 점점 눈을 맞추기 싫어져 면접 볼 때처럼 인중이나 미간을 봤다. 그는 영양가 없는 만남이 끝날 무렵 늘 나를 희망고문했다. 이제 그의 부름을 받아도 나가지 않으리 다짐한 후에도 나는 확실한 거절 대신 에둘러 가짜 약속과 가짜 소화불량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잊을만 하면 ”골뱅이?”를 외쳐댔다. 이것이 ‘골뱅남’이란 별명의 유래다.

그가 나를 ‘딸 같이’ 봤는지 외로운 중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봤는지 여자로 봤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으나, 나는 당시 그 불쾌한 경험의 원인이 내게 있다며 분노를 억눌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에게 ‘아무 일도 없지 않았나‘, ‘너만의 착각일 듯‘이라고 지적당할 지 몰라 불안했다. 누군가는 ‘콩고물 기대한 주제에 말이 많다‘고 할 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 일을 못 구할 수도 있었다. ‘부른다고 나간 네 탓’이라고 서글픈 자기합리화를 한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밤쉘)은 이런 내 개인적 기억을 다시 또렷하게 재생했다. 미국 최대 보수 언론 폭스뉴스에서 수십년 간 벌어진 직장 내 성폭력과 이를 폭로한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밤쉘‘은 피해자들을 다만 무결한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폭스뉴스 내부의 여성들은 “TV는 시각매체”라는 논리로 자신들의 치마를 걷게 하는 세계 최고 언론 거물 로저 에일스의 왕국에 복무하며, 더 ‘바비인형’ 같은 모습으로 ‘팀 로저‘라는 구조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다. 메긴 켈리(샤를리즈 테론)는 ‘흑인 산타’의 존재를 부정하며 “200년간 산타는 뚱뚱한 백인이었다”고 주장하고, 그레천 칼슨(니콜 키드먼)은 ”앞서 나가려면 앞섶을 빨아야 한다”는 말을 미소로 받아치며 1군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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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이런 폭스뉴스에서 ‘여성’들이 로저에게 선사할 수 있는 충성의 궁극적 형태는 성접대다. 남성과 여성은 이 왕국에서 실력으로 승부할 수 없다. 폭스뉴스 리포터이던 루디 바크티아가 자사 워싱턴 지국장 브라이언 윌슨의 성접대 요구를 거절했다가 해고당한 건 이 규칙을 직유한다. 영화는 당시 상황을 그대로 옮겨오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이 직장 내 성희롱에 대처할 때 보여주는 ‘국룰‘을 관객에게 공유한다. 1단계, 일단 추파를 던지는 상대에 대한 ‘인간적’ 존경 어필하기. 2단계, 좀 더 노골적인 추파가 왔을 때 모르쇠로 일관하기. 3단계, 직접적 요구가 날아왔을 때 상대가 그런 마음을 품게 한 내가 잘못했다며 사과하기. 여기까지 해 봐도 통하지 않는다면 선택지는 둘 뿐이다. 성접대에 응할 것인가, 퇴사할 것인가.

‘밤쉘’의 로저 일당, 좀 더 크게는 직장 내 성폭력이 잔인한 건 피해자 자신에게 상황을 선택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불쾌함에 저항할 수 없다는, 혹은 저항해도 소용이 없다는 무력감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하게 만든다. 처음 그레천이 로저를 고소했을 때, 폭스뉴스 직원들은 밀려드는 언론사 전화에 로저의 역성을 들었고 회사 익명 커뮤니티에는 로저 칭송글이 넘쳐났다. 고소 당한 로저도 과거 그레천이 자신을 칭찬했던 발언들을 모아 퍼뜨릴 것을 종용한다. ‘좋은 일을 했던 사람‘과 ‘성범죄자’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 목적이다.

로저에게 성희롱을 당했던 메긴은 이들이 왜 왕국을 부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지 안다. 루디의 사례, 불리한 계약, 로저에게 감시 당하는 익명 커뮤니티는 ‘로저는 그러실 분이 아니다’라는 답을 강요한다. 결국 메긴이 ”누가 네 옷을 벗겼는데 그걸 증명하라고 나체로 돌아다니게 떠밀고 있잖아”라고 분노하며 그레천의 고소 행렬에 합류하게 된 배경은 용기지만, 그 용기를 내지 못한다고 해서 피해자의 피해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음을 영화는 말한다.

연대를 부탁하는 메긴에게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은 묻는다. 왜 성추행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었느냐며, ”당신의 침묵이 어떤 일로 돌아올지 알고 있었나”라고 따진다. 메긴은 코웃음을 치며 ”로저가 한 짓은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답한다. 나중에는 이렇게 자조하기도 한다. ”폭로를 안 해도 욕 먹고, 해도 늦게 했다고 욕을 먹는다”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전 비서 성추행 의혹을 뒤로 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 사건의 전개 양상에서 ‘밤쉘‘을, 또 우리 중 누군가의 말 못했던 경험을 본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 죽음으로써 답하신 것 같다”, ”순수하고 부끄러움 많던 사람”이란 정치권의 말들은 로저 왕국의 권력을 나눠가졌던 이들의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실 분이 아니다”라는 지지자들의 항변은 슬픔과 진실의 경계 뿐만 아니라 피해자까지 지워 버렸다. 그러면서 ‘피해자’라고 불리고 싶으면 자신을 드러내라고 강요한다.

때문에 박 시장 사건 피해자는 ”저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울부짖는다. 그는 아직도 ‘피해 호소인‘에서 ‘피해자‘로 완벽하게 ‘승격’되지 못했다. ‘밤쉘’의 그레천과 메긴은 로저를 무너뜨렸지만, 폭스뉴스의 성폭력 가해자 두 명이 받은 퇴직금과 피해자 전원이 받은 보상 액수에는 큰 차이가 없다. 왕좌에 앉은 왕만 바뀌었을 뿐 아직 왕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영화에서 로저를 처음 고소한 그레천은 ”뭘 원하냐”는 변호사의 말에 ”그런 행동 안 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그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