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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피를 가진 노인이 마지막 헌혈로 2000명을 더 살릴 수 있게 됐다

″긴 여정의 끝이 왔다”

  • 손원제
  • 입력 2018.05.17 17:43
  • 수정 2018.05.17 17:55

한 번의 일반적인 헌혈 양으로 세 사람 정도를 살릴 수 있다. 혈장 헌혈 1회로는 18명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한 번 뽑을 때마다 2000명 넘는 아기들의 생명을 살리는 특별한 피도 있다. 

ⓒYoutube/The Sydney Morning Herald

이 귀중한 피를 60년 넘게 꾸준히 기부하며 아기 240만명의 목숨을 구한 80대 노인이 지난 11일(현지시각) 생애 마지막 헌혈을 했다. 5명의 아기가 엄마들 품에 안겨 2000여 생명을 살릴 피가 마지막으로 채혈되는 광경을 지켜봤다. 그의 도움으로 살아난 아기들이다.  

시드니모닝헤럴드 등 호주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사는 제임스 해리슨(81)은 이날 시드니 타운홀 기증센터에서 생애 1173번째 헌혈을 마쳤다. 그가 18살이 된 이래 격주로 빠짐없이 이어오던 헌혈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그가 처음 헌혈에 나선 것은 1954년 18살 때다. 그는 4년 전인 14살 때 심장 수술을 받았다. 무려 13리터의 혈액을 투여받은 끝에 살아난 그는 법적 헌혈 가능 연령인 18살이 되면 헌혈을 시작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 때만 해도 그는 평범한 헌혈자였다. 그런데 몇 번 헌혈 뒤 그의 피에 특별한 성분이 들어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RH병’을 치료할 수 있는 희귀 항체가 그의 혈관 속을 돌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능력은 그가 수술 때 각각 다른 사람에게서 온 혈액을 복합적으로 수혈받은 점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의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RH병은 산모와 태아의 RH 혈액형이 다를 때 산모의 혈액이 태아를 공격하는 병이다. 이 병으로 호주에서만 해마다 수천명이 숨졌다. 그런데 의학자들이 1967년 마침내 해리슨이 지닌 항체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안티-D’ 백신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후 2주에 한 번씩 1162번 그의 오른 팔에 주사바늘을 꼽았다. 이날 이전까지 마지막 10번은 왼쪽 팔을 써야 했다고 한다. 이렇게 뽑은 해리슨의 혈액으로 만든 백신으로만 240여만명의 아기 목숨을 살려낼 수 있었다. 그에게는 ‘황금 팔을 가진 사나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Youtube/The Sydney Morning Herald

해리슨이 헌혈을 끝내게 된 것은 81살이 넘는 고령자의 헌혈을 금지한 호주 정부의 법적 기준 때문이다. 해리슨은 ”허용만 된다면 계속 헌혈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혈액이 관을 타고 흐르는 것을 보며 ”내겐 슬픈 날이다. 긴 여정의 끝이 왔다”고 말했다.   

해리슨에겐 1999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훈장이 수여됐다. 그를 백신 프로그램의 첫 헌혈자로 선정했던 로빈 밸로는 ”그가 수백만명의 아기를 구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면 그저 울먹이게 된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기쁘게 했을 상찬은 아마도 이날 그의 마지막 헌혈을 지켜본 아기 부모들과 아기들의 앙상블이었을 것같다. 딸 라일와와 함께 한 베스 이즈메이는 ”그는 우리 아기들을 지켜준 정말 놀라운 분”이라고 감사 인사를 했고, 아기들은 그저 옹알이로 하모니를 보탰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의 ‘안티-D’ 프로그램은 160명의 헌혈자에 의존해 지탱되고 있다고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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