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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에는 왜 따라갔어?'가 잘못된 질문인 이유

피해자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장면을 많이 본다

  • 정소담
  • 입력 2018.03.09 17:32
  • 수정 2018.03.09 17:59
ⓒhuffpost

미투 운동에 관해 보고 들으면서, 나와 아주 가까운 가족, 친구들이 사석의 대화에서 여성 쪽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장면을 참 많이 본다. 화가 나는 한편, 나 역시 언젠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구나 깨닫는다.

″그런데 대체 여관에는 왜 따라간 거야?” ”왜 제 때 신고를 안 했어?” ”왜 당하면서도 그렇게 오래 참고 있었어?” 모두 피해를 당한 여성 측에 대한 의문들이다. 범죄 사건을 두고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쪽에 질문을 던진다.

여자는 조신해야 하고 애초에 여관같은 곳에는 따라가면 안 되고 실수를 하면 안 되고 과음을 하면 안 되도록 철저히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여성 중의 하나였고, 나는 그 교육에 매우 충실히 잘 따르며 산 사람이다. 

이런 가치관이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이런 암묵적인 사고 방식이 ‘여관까지만 함께 가면 그 이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여성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는 혹은 여성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지울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수적이고 소심한 성향을 가지고 있고 사소한 피해조차 당하는 것이 싫었으며, 조신하고 썩 괜찮은 여성이고 싶은 욕망이 늘 있었기 때문에 어떤 빌미조차 만들지 않으려 항상 노력하며 살았는데, 그것은 정말로 남자와 여관에 ‘쉬러’ 갈 수 있는 나의 자유를 앗아 갔다.

여관에 가는 것은 꼭 섹스를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누군가와 식당에 갈 수 있듯, 식당에 갔지만 갑자기 밥 생각이 없어져 메뉴를 주문하지 않을 수 있듯.

식당에서 밥 생각이 없어 주문을 안 하겠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입을 벌리고 밥을 마구 퍼 먹인 사건이 발생했다고 생각해보자. 타인의 입에 억지로 밥을 쳐넣은 인간에 대한 비난을 미뤄두고 “근데 먹지도 않을 거면서 식당에는 왜 따라간 거야?”하는 의문부터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성이라는 요소가 개입되면 거기까지는 대체 왜 따라간 거야? 하는 류의 질문이 따라붙게 된다. 요컨대 따라간 여자의 처신이나 행실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냥 제 발로 간 것도 여자가 하면 ‘따라간 것’이 된다.

ⓒDevrimb via Getty Images

여자는 강간이라는 중대한 범죄 사건에 대해 밝히면서도 자신이 그곳까지 가게 된 경위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 즉 나는 헤픈 여자가 아니라는 인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인증에 실패하면 여자가 당한 범죄 행위는 그럴 만 했던 것, 당해도 싼 것이 되어버린다. 헤픈 여자에게는 그래도 되는 세상인 것이다. 물건이나 돈의 씀씀이에 대해서 사용되는 ‘헤프다’는 말이 여자 성경험의 정도를 따지는데 사용되는 건 물론이다.

권력에 의한 성상납 문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십대에 다양한 업계에서 일하며 이 우물 저 우물을 팠다 덮기를 반복했는데, 특정 직업을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부당한 일을 겪을 것 같다 싶은 직종은 애초에 전부 발을 빼버렸다. 성별이 관여된 일은 거의 대부분이 그랬는데, ‘여성성’이 필요한 일은,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남성들에 의해 여성이 부당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런 건 애초에 내 꿈도 아니었어, 하며 접어 버리거나 조금의 부당함도 감내하기 싫어 아무런 반발도 없이 발을 빼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결국 그 일들이 대단히 절실한 꿈인 것도 아니었다.

그 이후에는 성별이 관여되지 않는 일(개인적 기준으로는 면접을 볼 때 굳이 화장을 할 필요가 없는 일, 내가 일을 그만 두어 후임자를 모집할 때 굳이 ‘여성’ 인력을 뽑을 필요가 없는 일)들만 직업으로 삼았다. 가르치는 일이 그렇고 강의하는 일이 그렇고 글을 쓰는 일이 그렇다. 그러나 이건 그냥 나의 선택이었을 뿐, 그리고 결국 내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판단 하에 타협하고 포기해 버린 것일 뿐이지 “나는 그런 일은 하나도 안 당했다!”고 외칠 성격의 것이 전혀 못 된다.

쉽게 말해 이놈의 세상이 이런 구조인 걸 깨닫고 영악하게 차라리 강자가 되는 쪽을 택한 것일 뿐이다. 남자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고 남자한테 아쉬운 일을 당할 일이 적은 분야를 택한 것일 뿐, 다들 왜 나처럼 못 하냐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아니다.

여성이면서도 성별에 관해 크게 부당한 일을 겪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권력 구조에서 하위에 있었던 여성에 대해 ‘너는 왜 그렇게 하지 못 했느냐’고 따져 묻는 비판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죄악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닌데? 나는 여자지만 그렇게 안 살았는데?” 하는 말을 하고 싶었던 때가 많았고, 그래서 그게 너무나 부끄럽고, 심지어 지금이라고 해서 그런 심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피해의 당사자가 되는 것이 싫어 어떤 위계에서든 강자가 되고자 고군분투하며 살았고, 그 과정에서 늘 남자보다 나아야지 생각하며 살았고 운이 좋아 대부분 크게 실패하지 않았는데, 어쨌든 결국엔 ‘남자’를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어떤 남자도 ‘여자’를 기준으로 삼으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모두에게, 우리 모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번 쯤은 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다면 성별에 관해 불균형한 사고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상’이다. 이제는 그 정상 상태가 정말로 정상인지, 다 같이 한 번 의심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피해자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내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한 의심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최근의 미투 운동을 보며, 내가 만약 내 꿈을 위해 어떤 부당한 일을 당했고 나름대로 감내했더라면 나중에 그걸 저렇게 밝힐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는데, 아마 나는 못 했을 것 같다. 나는 피해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문인이라면 걸작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남성 문인들의 추태를 고발하는 글의 주인공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사회인이라면 어느 조직의 대표가 됐으면 됐지 성폭력 사건의 폭로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발의 주인공, 폭로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도움을 보태지는 못할망정, 그 자리에 왜 갔냐느니, 왜 그걸 참고 있었냐느니 하는 말을 어줍잖게 보태는 행위를 하는 ‘과거의 나’들의 모습에는 너무나 화가 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죄인이 아닐 수 없는 비뚤어진 세상에서 타인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도 너무 부끄러운 일이고, 그저 이제는 과거의 나에 대한 부끄러움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싶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서도 얼마나 그릇되고 잘못된 것이 많을지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싶다. 약자가 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영악하게 살아온 나와 달리, 결국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굴러 가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될 분들의 용기를 응원하면서. 또 존경하고 존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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