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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입어야 할지 몰라 까만 옷만 입어요"

[박사 논문 엎고 스타일링 도와드려요②]

ⓒhuffpost

저는 22살, 학부 3학년 ▲▲▲라고 합니다. 학교 게시판에 올리신 글을 봤을 때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하고 있는 여러 고민들이 ‘옷’에 대한 형태로 표출이 되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엇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옷으로 말해보자면 여성스럽고 단아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지만 막상 쇼핑을 가거나 옷을 고를 일이 생기면 항상 편하고 어두운 옷만 선택하게 돼요. 예쁜 옷을 입으면 단점이 부각되는 것 같아서요.

제 상상 속의 저 자신은 항상 걸그룹처럼 모든 것이 세팅된 완벽한 상태인데 막상 옷을 꺼내 입고 거울을 보면 그런 상상이 깨져버리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남을 많이 의식하는 성격도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타인을 정말 많이 의식하면서도 결국은 ‘편한 대로’하게 되고 그렇게 아무렇게나 꾸미지 않고 나가면 후회, 또 의식을 하며 한껏 꾸미고 나가도 불편해서 후회, 어떤 선택을 내려도 결론은 그렇게 되더라구요. 

저는 좀 더 밝은 사람이고 싶어요. 그리고 밝은 사람처럼 보이면 실제로도 밝아질 것 같아요. 

피부는 하얀 편이고 키는 157 정도예요. 얼굴이 작고 머리는 어깨선을 약간 넘는 정도, 약간 통통한 편이고 다리가 좀 짧은 것 같아요. 구두를 많이 신는 편이기는 한데 오랫동안 걸어 다녀도 발이 심하게 아프지 않는 편한 구두를 선호해요. 꼭 만나 뵙고 싶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컨설팅을 신청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민이 많고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고민은 자기 정체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특히 ▲▲양에게는 이 고민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였다. 그러한 고민이 자신의 정체성에 맞게 스타일링을 도와준다는 나를 만나고 싶다는 강한 열망으로 표출되었나 보다. 

그런데 재밌는 것 하나. 그렇게 만나고 싶다고 해놓고, ▲▲양은 시험에 민감했다. 내가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린 시점이 딱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 (물론 시험 신경 쓰지 않는 학부생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양은 시험 기간에 신청 사연을 올려놓고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란다. 

약속한 날이 다가오고, 그녀의 ‘나만의 곡’인 보이(feat. 계피)의 ‘Ever Ever’를 들어봤다.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한 여성이 가사의 화자이다. 아무리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듯 시간을 흘리며 지내도 어딘지 모르게 남아 있는 자신의 그리움과 미련을 노래한 가사. 마이너의 멜로디와 쿨한 편곡에서 음악의 세련됨이 묻어났지만, 가사의 내용과 상반되어 있는 멜로디는 가사 속 화자의 심리와 닮아있다.  

마침내 그녀를 처음 만나는 날. 내 앞에 앉은 그녀. 와 예쁘다! 

소위 남자들이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맑고 하얀 피부, 건강한 머릿결의 자연스러운 갈색 머리, 예쁘고 선한 눈매. ▲▲양 역시 다른 신청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묘사한 글에서보다 훨씬 외모가 아름다웠다. 

▲▲양은 어딘지 모르게 억눌려 있었다. 예쁜 외모와는 달리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모습.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자신 없어서 자신을 감추고 싶어 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먼저 도착한 그녀는 검정색 폴라와 물 빠진 블랙 진을 입고 앉아있었다. 그녀는 내가 앞에 나타나자 ‘우와!’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분명 스타일리시한 모습인데 디테일이 있거나 불편해 보이는 아이템 하나 안 걸치고 있는 게 신기하단다. 나는 씩 웃으며 그 비법 다 전수해 줄 거라고 일러줬다.

나는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체형이나 스타일에 대한 분석보다는 ‘나’ 스스로에 대한 탐구라고 일러줬다. 

그 예로 내가 내 길을 찾아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소개했다. 어느 순간부터 공부가 재밌어졌고 공부를 잘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말 잘 듣는 모범생으로 살아왔던 모습, 그 안에 머물며 안전하다고 생각해왔던 낮은 자존감. 그러다 우울증에 아무 것도 못한 채 치료를 받았던 시간들.

내가 학자가 되길 바라는 주위의 기대와 관심을 쳐내는 것이 결코 쉬웠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건 진짜 내 행복을 찾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본질적이지 않은 부분이었다. 나는 주위의 기대를 충족시키느라 정작 나를 보살피지 못했던 내 모습을 직시하고 내 길을 걷기로 마음먹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녀는 이런 내 얘길 들으며 성장 과정에서 온전히 자신이지 못했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녀는 중학교 시절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해서 주위를 당황시켰다. 그러나 지금은 매우 순한 양이 되었고, 거듭된 칭찬으로 그 안에 머물며 주위 사람들과 (겉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시각이 너무 부정적이었다. 다리가 휘어서 O자형 다리라는 얘기, 하체 비만이란 얘기, 키가 너무 작아 다리가 짧다는 얘기. 그런 얘길 듣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예쁜 ▲▲양은 왜 이렇게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고 있는 걸까?’

‘나만의 곡’에 대한 질문을 해봤다. 음악 분위기 자체는 나도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그녀를 만나러 가는 동안 음악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고 하자 반가워한다. 어떤 점에서 그 곡을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그 곡이 늘 좋았단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최고의 권위자의 도움을 받아 정신 분석 치료를 경험한 내가 환자로서 받았던 질문들을 떠올려 보면, 뭘 좋아하든지 그냥 좋은 건 없다. 어딘가에 무슨 이유든 어떤 계기든 반드시 존재한다. 치료 전후로도 치열한 자기 탐구의 과정을 거쳐 온 터라 나도 그 전제에 동의한다. 

나는 홀로 생각해 보았다. 혹시나 그 곡은 자신을 찾고 싶어 하는 그녀가 원래의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무의식을 확인하게 된 곡은 아닐까. 쿨한 척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어떤 대상을 완전히 보내지 못했고 잊을 수도 없다는 가사. 아무런 문제 일으키지 않고 평온한 상태로 아닌 척하고 살지만, 자신을 찾아서 행복해지려는 그녀의 마음 같다. 쿨하고 잔잔한 슬픔과 그리움이 묻어난 노래는 여운을 남겼다.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오늘 정말 좋았어요. 그리고 오늘 제가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요. 주변에서는 지금의 순한 제 모습이 좋다고 하시지만, 사실 그런 칭찬이 교묘하게 저를 조종하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지하철을 타고 다음 신청자를 만나러 가며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은 어쩌면 독립하여 온전히 ‘나’ 이질 못해 방황하는 후기 청소년기의 고민의 단면이 아닐까?’

대학생이 되어 이제 드디어 ‘학생’, ‘딸’ 보다는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띠고 살아야 하는데, 마침내 주권(主權)을 회복해도 그 방향성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며칠 뒤 그녀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양이 내게 털어놨던 그 고민들. 사실은 주권을 되찾아 온전히 스스로이지 못했던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 필히 거쳐야 했던 과정이었어요. 지금부터 주권을 찾고 스스로에 대한 탐구를 하고 그 결과 찾아낸 자신을 마주하면, 더 밝은 사람, 자신의 단점은 그냥 웃어넘기는 사람이 될 거라 믿어요 너무 예쁜 ▲▲양이 자꾸 자기 신체의 단점만 부각하여 바라보는 자아상은 스스로에게 너무 부당해요.” 

#2 다양한 성취 속에서 길을 잃다

두 번째 만남의 날.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녀는 자신이 매우 이중적인 사람임을 발견했단다. 그녀가 그날 들고 온 별칭은 ‘줄을 타는 아수라’였다. 자신은 양 극단 사이에서 늘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쓴단다.

별칭이라는 것은 사실 어떤 옷을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의 잣대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녀의 별칭에 대한 내 답은 이랬다. 

“‘세련된 꼰대’, ‘시크한 빙구’ 같은 별칭들은 이중적이면서도 옷을 고르는 잣대가 되어줄 수 있어요. 그런데 ‘줄을 타는 아수라’라는 별칭은 이중성만 내포하지 잣대는 포함하지 않네요. ‘아수라’는 옷을 고를 때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어요.”

그녀가 별칭을 보다 더 명확하게 정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함께 탐구했다. 

우선, 그녀는 새로운 걸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배움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단다. 그런 배움의 기회를 통해 자신의 시야가 넓어지는 게 좋다고. 라틴어와 영어, 세법, 사격과 승마, 미술과 음악, 칵테일 등 분야가 참 다양했다. 

그녀는 자신의 배움이 무엇을 향하느냐는 내 질문에 그냥 즐거울 뿐이란다. 아무런 외부적인 조건이 없이도 스스로 배우고 싶어 하고 자신의 지식이 확장되는 것이 즐거우며, 자신의 지식이 활용 가능한 상황이 올 때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단다. 

다음으로, 그녀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신의 이력을 쌓아가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공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동아리 활동이나 시민사회단체 인턴 활동을 두루 경험했으며, 의외로 인간관계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그녀는 다양한 활동을 동해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다양한 경험을 얻고 싶었단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신과 비슷한 전공의 사람들이 비슷한 진로를 택해서 준비하고 공부하는 모습에서 늘 답답함이 느껴졌었다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딘가가 낯익었다. 가장 친한 친구 S가 성취자형 인간이라 나에겐 그녀의 즐거움의 포인트가 친숙했다. ▲▲양에게도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성취욕이 큰 부분임이 보였고, 그녀 역시도 성취자형 인간(에니어그램 3번)이 아닐까 생각했다. 

확인을 위해 두 가지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첫 번째 질문.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대안(plan B 혹은 plan C까지)을 준비하느냐고. 그녀는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볼 때면, 이해가 되지 않아 왜 그다음을 생각하지 않는지 다그치기도 한단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 다양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늘 다른 매력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지 물어봤다. 그 역시 그렇단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빙고!’를 외쳤다. 

나는 웃으며 ▲▲양은 성취자형 인간인 것 같다고, 그리고 다양한 사람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가가는 그것이 성취자형 인간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일러줬다. 그녀는 웃으며 말한다. 

“그게 저만의 매력인줄 알았는데 성취자형 인간의 매력이었군요.”

이쯤 되면 그녀가 캡처해 온 ‘왠지 끌리는 룩’을 안 볼 수가 없다.

역시. 성취자형 인간답게 돋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오픈 백의 가죽 미니 드레스, 버건디 컬러의 백리스 원피스 룩. 자신은 백리스라는 반전 매력을 선망한다고. 여배우의 시상식 룩에서나 볼 법한 벨벳 소재의 실버 색상의 드레스 룩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려함을 선망함이 보인다. 

나머지 셋과 성격이 상반되는 룩도 있었다. 블랙 스키니 진, 하얀 폴라, 하얀 스니커즈, 그리고 더블 버튼의 오버 핏 그레이 코트. 옷을 입을 때 편안함을 추구하고 싶다는 것에서 휴식에 대한 필요도 엿보였다.(3번 성취자형 인간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9번 평화주의자처럼 귀차니즘이 나타나기도 한다.)

▲▲양은 남이 뭐라 하지 않더라도 남보다 뭔가 뛰어난 면이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일례로 시험 기간이 아니어도 늘 도서관에 간다고 했는데 그건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라고. 

그 얘길 듣자, 처음에 그녀가 꽤 시험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인상을 받았음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학점 관리는 반드시 스펙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받기 위한 수단이지 않을까.  

#3 “저를 찾고 나니까 정말 좋아요”

세 번째 날. 그녀는 새로운 별칭을 가지고 나타났다. 

‘치밀한 귀차니스트’

어찌 된 배경에서 탄생한 별칭인지 물어봤다. 자신은 늘 치밀하게 무엇인가를 계획하지만, 막상 실행을 하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치밀함을 탓하며 귀찮아하기 십상이라고. 늘 자신은 자신을 ‘나는 왜 이렇게 늘 귀찮아하지?’라며 책망했단다.

그녀가 말한다. 

“‘치밀한 귀차니스트’라는 별칭을 찾고 나니까 정말 좋아요. 제가 지난주에는 못 찾았잖아요. 그냥 ‘아수라’ 정도. 내 안에 모순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다가 이 별칭을 딱 찾고 나서 정말 맘에 편해졌어요. 여전히 어질러져있는 상태는 같지만, 그 어질러진 것이 마치 어질러진 화장대 같은 느낌? 깨끗하진 않지만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알아서 나 스스로는 불편한 것이 없는 느낌 있죠?”

‘치밀한 귀차니스트’라는 별칭에는 솔직함이 엿보인다. ‘그래도 괜찮아. 늘 이렇게 귀찮아하는 그게 나야.’라고 스스로를 허용하고 웃어넘기는 건강함도 엿보인다. 

“그런데 이제는 어차피 그런다고 제가 막 살 것도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귀찮아해도 ‘원래 나는 그런 사람인데 뭘’이라고 스스로를 허용하게 되었죠.”

어쩌면 그녀의 귀차니즘은 너무 많이 성취하려고 욕심을 내다보니 발생하는 부작용 같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보다 계획을 훨씬 치밀하게 짜니까. 그녀는 계획을 세워서 뭔가를 추진하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경험할 때가 너무 많았단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아이돌 스타를 따라 하고 싶었던 ‘귀차니스트’양의 마음이 생각났다. 아마도 그 나이 또래에 가장 성공한 여성이라면 아이돌 스타일 텐데 스타들의 성취를 가능케 해준, 치밀하게 계산된 화려한 룩을 따라 입고 싶었겠다. 

그런데 막상 따라 해 봐도 똑같지가 않아서 좌절감을 느끼고, 따라 입으려고 해도 귀찮아서 그걸 못하는 거라고. ‘귀차니스트’양은 씩 웃으며 그런 자신을 순순히 인정한다. 

그런 모습이 옷을 입을 때도 이중적으로 나타났었다. 자신이 외출할 때 ‘신경을 쓴다’, ‘화려하게 입는다’라는 건 항상 타이트하게 입는 불편함의 추구였다. 불편하게 입고 나면, 외출을 위해 신경을 썼다고 스스로 심리적으로 안도하곤 했지만, 그렇게 입은 날은 몸이 불편해 스스로를 자책하는 날이 많았다. 

이제 남은 건 ‘치밀한 귀차니스트’양을 위해서 치밀하게 계산하고 입지만, 몸과 마음 모두가 편안한 룩을 구성하는 것이다. 스타일리시하게 입어도 스스로의 치밀함을 책망하지 않도록.  

셋째 날 우리가 집중적으로 했던 작업은 그녀만을 위한 2가지 겨울 룩을 구성해보는 것이었다.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다 설계해볼 수도 있었지만, 겨울용을 일단 구성해 보면 차후 그녀 스스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만들어 가기 위한 좋은 시범 케이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녀의 아이템을 구성하기에 앞서 나는 그녀가 스타일링 법칙을 눈과 머리로 익힐 수 있는 훈련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패션 앱을 켜고 각각의 룩을 띄워서 만약 해당 룩이 스타일리시하다면 어떤 법칙이 적용되었기 때문인지, 왠지 이상한 룩은 스타일링 법칙에 따르면 어떤 아이템을 어떻게 다른 아이템으로 교체해야 할지에 대해서 토론했다.

본격적으로 두 가지 겨울 룩을 구상하기 직전 내가 깜짝 놀란 것은, 그녀가 준비해온 노트였다. 작고 예쁘게 눌러쓴 글씨로 꼼꼼하게 자신의 옷장을 분석하여 잘 입는 옷과 입지 않는 옷 등을 구별해 왔다. 역시 치밀하다. 

화이트 계열의 옷을 오염이 걱정돼서 입어본 적이 없다고 한사코 꺼리는 그녀. 나는 그날 내가 입고 갔던 오버사이즈 아이보리 코트를 그녀에게 입어보라고 권했다. 어색해하며 입어보던 ‘귀차니스트’ 양. 낯설어서 그렇지 너무 좋아한다.그녀의 얼굴은 쿨톤의 하얀 피부 + 여성스러운 얼굴이다. 그래서 나는 하얀 얼굴을 잘 살려주기 위해서 오버사이즈의 아이보리 코트를 주축으로 한 룩과 여성스러운 얼굴과 상반되는 밀리터리 재킷을 중심으로 한 룩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여성스러운 얼굴의 소유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분위기와 같은 방향으로 액세서리나 옷을 선택한다.  나는 내가 착용하고 있던 삼각뿔 두 개가 연결된 기하학적 형태의 실버 귀걸이를 빼서 그녀에게 건네며 착용해 볼 것을 권했다. 

그녀가 귀걸이를 착용하니, 그녀의 얼굴 분위기를 중성적인 쪽으로 끌고 오면서도 피부톤과 맞아 세련된 느낌이 났다. 그녀는 늘 큐빅 박힌 골드 색상의 하트 귀걸이 같은 것을 착용해왔다고 말했다. 이제 어떤 액세서리를 구입해야 할지 알겠단다.

밀리터리 재킷 룩을 제안하자, 한 번도 밀리터리 재킷을 입어보지 않았다며 망설인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나는 내가 평소에 자주 방문하여 구경하던 온라인 여성 쇼핑몰을 띄웠다. 쇼핑몰의 경우 쇼핑몰 대표가 모델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그곳은 정말 여성스러운 얼굴의 여사장이 운영하는 곳인데, 내가 그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얼굴 분위기를 중화시키는 옷을 많이 소개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여사장이 프릴 달린 여성스러운 원피스 드레스를 입은 사진과 밀리터리 재킷을 입은 사진을 비교해서 보여줬다. ‘귀차니스트’양은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제 외투 안에 입을 하의와 상의를 결정할 차례다. 늘 ‘신경 썼다’ + ‘불편하다’의 주범이 되었던 타이트한 미니스커트를 대체할 것으로 A라인 혹은 플레어 미니스커트를 룩에 포함시켰다. 더구나 밀리터리 재킷에 헤링본 소재의 A라인 스커트를 매치하면 ‘반대의 법칙’에 의해 룩이 한결 스타일리시할 것이다.

그리고 밋밋한 아이보리 코트와 카키색 야상에 에지를 더해줄 하의 아이템으로 나는 버건디색 스키니진을 제안했다. 두 가지 외투 모두와 색상이 어울릴 뿐 아니라 뻔하지 않은 색이라 디테일 없이도 화려함을 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녀의 ‘화려함’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 게다가 스키니진의 타이트한 핏과 아우터의 벙벙한 핏이 ‘반대의 법칙’에 딱 맞기 때문에 핏의 대비로도 역시 균형이 맞아 멋스럽다.

내가 컨설팅을 진행하며 강조했던 것이 다소 과감한 디테일을 더하고 싶다면 상의보다는 하의로, 얼굴에서 먼 곳에 착용할 수 있는 신발이나 양말, 장갑이나 팔찌, 시계 같은 아이템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유는 ‘여백미의 법칙’ 때문이다. 얼굴 주변에 뭔가가 블링 블링 하면 나와 대화하는 상대방이 굉장한 피로를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다소 화려한 색상의 옷을 선택하고 싶다면, 상의보다는 하의를 선택하기를 권하는데, 버건디 스키니진도 같은 맥락이다.

그녀는 늘 짧은 다리에 콤플렉스가 있어서 하이웨이스트 바지를 선택했었는데, 하이웨이스트 바지는 개인적으로 참 어려운 아이템인 것 같다. 그보다 허리와 다리의 경계가 어디인지 알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헐렁한 니트를 매치하는 것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오히려 감추려 할수록 더 드러나는 법이니 자신 있게 드러내고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이 현명하다.

한편 ‘귀차니스트’양이 멋을 낼 때 착용하는 하이힐은 불편했다. 그리고 하이힐은 여성스러운 얼굴의 분위기를 중화시키지도 않는다. 공식적인 자리에 가지 않는 이상 아직 학생인 ‘귀차니스트’양에겐 하이힐보다는 발전체를 감싸주면서도 작은 키를 커버할 수 있도록 부츠 형태의 신발이 더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성적 매력을 듬뿍 더해줄 워커힐과 웨지힐 스니커즈를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중성적인 느낌이 나면서도 베이식한 다이얼이 큰 갈색 클래식 시계를 구입하기로 했다. 팔에 화려한 디테일을 더하길 원한다면, 시계 옆에 팔찌를 보태면 되기 때문이다. 

“컨설팅 받으면서 저 자신에 대해서도 주변 환경에 대해서도 더 많이 깊게 생각해보게 됐어요. 앞으로가 더 기대돼요. 참! 오늘 쇼핑하면서 아이보리 코트, 카키 야상, 셔츠 3개(데님, 화이트, 그레이) 샀어요. 오랫동안 얘기하고 생각도 많이 해서 그런지 딱 사려고 하는 걸 미리 알고 와서 고민 없이 골랐어요. 정말 좋아요!”

이 정도로 룩을 구성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며칠이 지나고, 쇼핑 일정을 잡기 위해 SNS로 그녀에게 말을 걸자 이런 말을 한다.

역시 성취자형 인간이다. 보통은 쇼핑 일정을 잡으면 나와 거의 모든 아이템을 함께 선택을 하면서 실전으로 배우고, 구입하지 못한 것은 그 이후에 혼자 구입한다. ‘귀차니스트’양은 유일하게 미리 혼자 쇼핑을 어느 정도 소화했다. 빨리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하고 싶었나 보다. 어떤 마음으로 쇼핑을 소화했을지, 그동안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 궁금했다. 

#4 “정체성이 확실해지니, 쇼핑이 쉬워요!”

잠실의 쇼핑몰에서 만난 그녀는 아이보리 스웨터와 오버사이즈의 아이보리 코트를 입고 있었다. 잘 어울렸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먼저 내게 스타일링의 법칙을 배운 후, 한 가지 룩으로 여러 상황에서도 다 통할 수 있으면서 스타일리시할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화려하게 입는 것 = 불편하게 입는 것’이었는데, 불편하지 않게 입고도 핏과 길이, 색상 매치만으로도 스타일리시하게 입을 수 있는 법을 알게 된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야상을 사서 야상을 계속 입고 다녔는데 야상 안에 입는 옷을 스타일링을 달리 했었어요. 저의 스타일링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났던 날이 있었어요. 그 날은 오전에는 학원에 일하러 가야 했죠. 학원 원장님이 저에게 너무 학생처럼 입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날은 셔츠 입고 검은 바지 입고 야상을 입고 갔었죠. 학원 안에서는 야상 벗어놓고 일을 했는데, 검은 바지에 흰 셔츠니까 그곳에서 일을 하시는 분들과 비교해도 때와 장소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옷차림이었죠. 일을 마치고 오후에 친구 만나서 놀 때는 답답해서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어요. 그다음에 저녁에 친구들과 ‘클럽 갈까?’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냥 셔츠 단추를 몇 개 더 푸니까 클럽에 맞는 복장이 되더라구요. 정말 ‘아 오늘 옷 정말 잘 입고 나왔다.’ 생각했었어요. 그 화장품 아이섀도 팔레트 광고할 때 낮에는 연한 색상, 밤에는 진한 색상 모두 사용할 수 있고 하잖아요. 저는 그런 걸 옷에서 느껴본 것 같았어요.”

내가 신청자들과 컨설팅이 끝나갈 무렵 늘 던지는 질문이 있다. 어떤 법칙이 가장 유용했느냐고. 그러면 대부분은 ‘빼기의 법칙’을 말한다. 

디테일이 있는 옷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디테일이 없는 옷을 선택한 다음, 어떤 아이템을 기본 아이템만 입은 룩에 더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변형 가능하다. 그 간단하고 강력한 법칙을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신다.

‘귀차니스트’ 양도 그 날 처음으로 그런 걸 경험했던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아침에 선택한 옷들이 여러 상황에 어울릴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단다. 정말 그렇다. ‘빼기의 법칙’에 따라 옷을 입으면 웬만해서는 TPO에 벗어나는 일이 없다. 내가 그 기본 룩에 좀 더 어떤 디테일을 더하느냐가 그 룩을 조금씩 변형시킨다. 단추를 잠그고 푸는 것, 소매를 걷는 것 모두 우리가 알게 모르게 더하고 빼는 디테일들이다.

그리고 늘 어두운 색만 선호했었던 모습에 변화가 생긴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제가 정말 검정색만 입었거든요. 검정색이나 회색만 입다가 색상이 좀 달라진 후 물론 주위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지만, 무엇보다도 제 모습을 제가 맘에 들어하는 게 정말 큰 변화예요. 물론 저는 처음에 선배님께 아이돌 스타 얘기하면서도 발랄하게 입고 싶은 맘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발랄하게 입는다는 게 저에게는 핑크색 맨투맨? 그 정도 범위에서 벗어나질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런 건 입기 싫고 ‘아 나는 맨날 까만 것만 입어야 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그 타협점을 잘 찾은 것 같아요.” 

아마도 그녀가 어두운 색만 고집했던 것은 그녀 스스로의 장점을 보기보다는 단점만 보려 했던 부정적인 자아상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피부톤이 그렇게 밝고 투영한데, 자신의 피부톤을 살려줄 색상을 찾기보다는,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자신을 숨겨줄 색상만 고집했었으니.

물론 내가 그녀를 만나러 갈 때 예시로 보여주기 위해 입었던 아이보리 니트와 아이보리 코트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는 ‘난 치밀한 귀차니스트인 나를 사랑해. 내 피부가 하얀 편이니까 나는 이런 코트를 잘 소화할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자아상이 그녀가 밝은 색상의 코트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자아상이 긍정적이지 못했던 탓에 쇼핑도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저의 지난 쇼핑이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봤어요. 일단 백화점 여성 캐주얼 코너에 가요. 한번 그냥 봐요. 형식적으로 한 군데씩 들어가서 옷을 봐요. 저한테 어울리는 게 없으니까 다른 매장에 가요.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왜 나한테는 어울리는 게 없지?’하며 아래 지하 1층 식품 매장에 가서 맛있는 거 사 먹고 집에 가죠.” 

그녀의 과거 쇼핑 패턴을 듣다 보니 너무 재미있으면서도 이토록 예쁜 그녀가 그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번에는 쇼핑이 즐거웠냐고 묻자, 쇼핑이 쉽고 즐거웠단다. 

“이번에는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어요. 일단 제가 생각하는 걸 찾는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어떤 옷을 사야겠다 하는 목적의식이 있으니까, 일단 매장에 가면 내가 찾는 옷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고 찾으니까 엄청 시간이 짧아지고, 이상한 옷 뒤적거리지 않아도 됐죠. 만약 몇 가지 옵션이 있으면, 그 사이에서는 이건 디테일 있으니까 빼고 이건 길이가 안 맞으니까 빼고. 그렇게 제가 진짜 쉽게 고르는 거예요. 그리고 가격도 ‘이건 이 정도 질은 있어야 되니까 이 정도 가격은 괜찮아.’ 그런 판단이 되니까 엄청 빨리 정말 맘에 드는 걸 다 골랐어요.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옷을 사봤어요. 집에 와선, 사실 그날 진짜 돈을 많이 썼거든요, 그런데도 하나도 후회가 안 됐죠. (쇼핑이) 재밌었어요, 처음으로. 집에 와서도 ‘아 아까 거기선 예뻐 보였는데 집에 오니깐 이상하네’라는 기분도 안 느껴지고, 확신이 드니까 집에 와서도 다시 안 입어봤어요. 이미 다 아니까요.”

쇼핑을 하며 가장 좋았던 건 ‘빼기의 법칙’을 기억하고 그것을 적용해서 배제할 줄 알게 된 자신의 모습이었단다. 

“제일 좋은 건 그거였어요. 어떤 것을 사지 말아야 할지를 확실히 안 거요. 뭔가가 사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아 이건 아니지’라는 판단을 해서 아닌 건 금방 배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옷 살 때도 편하고 입을 때도 (매치하기) 편해서 정말 좋았어요.”  

또한 과거의 쇼핑 패턴이 얼마나 한심했었는지 말한다. 과거의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하고,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점검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기보단 다수의 선택에 맡겨버렸었다.

“예전엔 가방 사려고 하면, 검색을 해요. 일단 잘 모르는 상태니까 포괄적인 검색어, ‘20대 여자 가방’을 쳐요. 그러면 ‘20대 여자 가방 브랜드 추천’이 떠요. 그러면 그중에서 골라서 샀던 거죠. 제가 아마 이대로 계속 나이가 들었으면 다들 비슷하게 사는 그런 가방 샀겠죠.”

그러자 내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구*, 프*다, 루이뷔* 같은 데서. 물론 거기서 내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가방이 있으면 사도 돼. 그러나 그것이 누구나 ‘저건 구*야’라고 알면 재미가 없어요. 안전하긴 하겠네요.” 

아마도 그녀가 그런 선택을 했던 건 그녀가 어려서는 아닌 것 같다. 상당수의 30대, 40대 여성들도 그와 비슷한 선택을 하니까. 그래서 나도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제 그녀도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가방을 ‘치밀하게’ 찾는 쇼핑을 할 수 있길.

우리는 이제 함께 구성한 룩 중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쇼핑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빠른 실행력 덕분에 다른 신청자들과 달리 쇼핑을 정말 빠르게 끝냈다. 미리 혼자서 실습을 해봐서인지도 모르겠다. 

자라에서 우연히 발견한 쫙쫙 늘어나는 진청 스키니진을 입어보자 마자 바로 구입 결정했고, 야상에 매치할 헤링본 미니스커트 대신 그 비슷한 분위기의 회색 글렌 체크 패턴의 프릴 스커트를 구입했다. H&M에서는 버건디 스키니진을 구입했고, Fossil에서는 실버 프레임의 갈색 가죽 스트랩의 시계를 구입했다. 망고에서는 아이보리 스웨터를 구입했다. 

쇼핑을 마치고 그녀가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한다. 

“왜 선배님 친구들이 선배님과 같이 쇼핑하자고 말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네요. 처음에는 (컨설팅이) 일회성인 줄 알았어요. ‘이런 게 어울릴 것 같네요.’라는 말로 끝나는. 저희 아빠가 회사에서 한 번 받으셨거든요. 아빠가 받으신 컨설팅은 ‘웜톤이니까 어떤 색상이 어울린다’는 말 몇 마디와 사진 몇 장 찍어서 주신 게 전부였어요. 그래서 처음에 (선배님과의 컨설팅이) 뭔가 새롭다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선배님 블로그에 컨설팅 신청) 글 쓴 게 올해 제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 같아요.”

나는 컨설팅이 ‘치밀한 귀차니스트’ 답게 입는 것에 맞아떨어졌는지가 궁금해졌다. 

“쇼핑이나 스타일링 계획은 치밀하게 짜는데, 막상 입는 건 편하게 입는 거니까 ‘치밀한 귀차니스트’에 딱 맞는 거죠. 저는 외출하면 슬슬 귀찮아지고 후회되는 게 늘 제가 불편한 옷을 입기 때문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나중까지 불편하지 않고 귀찮지 않죠. 색상 매치만 잘 하면 불편하게 입지 않아도 스타일리시할 수 있으니까요.” 

#5 ‘치밀한 귀차니스트’를 진정으로 허용하기

몇 주가 흘렀다.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와 그녀와 2차 쇼핑을 하기는 어려웠다.

기말고사가 끝나고도 남았을 무렵. 그녀의 변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연락이 쉽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고 마침내 그녀와 연락이 닿았다. 기말 고사 기간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단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병이 왔고,  거의 병원을 전전했다는 것. 그러다 그만 시험은 거의 다 망쳤다고 한다.

다행히 몸은 회복이 되었고,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이 없다는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앞으로 갔고, 그녀의 집 앞 놀이터에서 간단히 촬영을 마치고 헤어졌다. 

차를 몰아 귀가하는 길, 나도 모르게 그녀의 ‘나만의 곡’을 틀었다. 어딘지 쓸쓸한 노래를 들으며, 그녀에게 자신을 허용하고 인정하는 것이 평생 과제라는 사실을 말했어야 하나 살짝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누가 말해준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문제를 알아차리는 것도, 답을 찾는 것도 평생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나.

영화 <버드맨>의 스토리가 떠올랐다. 영화는 헐리웃의 60대 퇴물 배우에 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과거 자신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었던 수퍼 히어로물 주인공 캐릭터 버드맨을 뛰어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연기력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브로드웨이 연극에 과도하리만치 집착하는 주인공의 고군분투. 

그러나 마침내 주인공은 버드맨을 뛰어넘으려던 그것이 자신을 옭아매왔던 족쇄였음을, 그리고 스스로 아무 것도 증명해보일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진짜 하늘을 나는 사람이 된 듯한 자유를 얻게 된다. 그는 그렇게 60대에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평생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지만, 결국은 자신을 여유롭게 허용할 주 아는 용기와 지혜를 가질 때 진짜 어른이 된다. 나도 그게 어른이라는 걸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겐, 이제 그런 탐구를 시작한 20대 초반의 ‘귀차니스트‘양에게 거만한 훈계따위 늘어놓을 자격이 없었다. 다만 그녀가 찾고자 하는 밝은 자신은 ‘치밀한 귀차니스트’를 진정으로 허용하고, 자신에게 무엇을 성취해서 뭔가를 증명해보일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찾을 수 있으리라고 혼자 생각해보았다.

다시 몇 주가 흘러 해가 바뀌었다. 그녀가 SNS로 근황을 알렸다.

“작년 말에 기말고사를 그렇게 망치고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스스로 더 비참하고 초라해진것 같고. 인정받는걸 그렇게 좋아하는 제가 공공연한 중도포기자로 낙인찍힌듯 했으니 오죽했을까요.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오히려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운동도 하고, 공부 끝나면 마음 편하게 쉬기도 해요. 옷에도 여전히 관심 많이 쏟고 있구요. 적절하게 계획해서 예쁜 옷을 짠 하고 입으면 어린이만화에 나오는 평범한 여고생이 마법소녀로 변신한 것처럼 신이 나요. 이런 기쁨을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가끔은 여전히 힘이 들지만 선배님과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원하는게 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의외로 간단한 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다시한번 감사 드려요.”

한층 밝은 분위기의 메시지를 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그녀가 어른이 되는 그 쉬울 수 없는 과정을 중도 포기하진 말길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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