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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인권운동을 이끄는 ‘블랙 라이브스 매터’ 세대가 기억하는 존 루이스

미국 ‘의회의 양심’이라고 불린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전설, 존 루이스 하원의원이 지난 금요일 별세했다.

ⓒLynsey Weatherspoon / Reuters

존 루이스 하원의원(민주당, 조지아)이 미국 젊은이들에게 행동할 것을 촉구하고 학생운동가로 시작해 원로 정치인이 될 때까지 모범을 보인 행보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그는 2013년 밀레니얼 운동가들과 함께 미국 이민법의 포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운동을 펼치다 체포됐다. 2016년에는 미국 올랜도 의 성소수자 나이트클럽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에 관해 총기규제를 놓고 하원에서 연좌농성을 주도했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을 때는 젊은 층에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힘썼다. 1965년 3월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 있었던 ‘셀마 행진’을 주제로 한 그래픽 소설 시리즈의 출판을 기념하기 위해 2015년에 샌디에이고에서 열렸던 코믹콘 행사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코스프레 하여 등장한 게 대표적이다. 이 셀마 행진에서 루이스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나란히 연이어 행진하며 그해 투표권법 통과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존 루이스 하원의원
존 루이스 하원의원 ⓒmpi04/MediaPunch/MediaPunch/IPx

지난 6월, 그는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 이후 촉발된 전국적인 시위를 계기로 백악관 인근 도로 위에 ‘블랙 라이브스 매터’ 글귀가 페인트로 칠해지자 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 등장한 사례들 중 하나였다.

흑인 인권운동을 위해 앞장서고 있는 지금의 ‘블랙 라이브스 매터’ 세대에게, 루이스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루이스는 젊은 시절 인종차별과 흑인의 투표권을 위해 행진하며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했고, 하원의원으로 일하는 동안 루이스는 플로리다주 샌포드에서 미주리 주 퍼거슨, 볼티모어, 미니애폴리스에 이르기까지 여러 활동가와 자주 모임을 갖고 많은 의견을 공유해왔다.

″그가 꼭 우리와 함께 해야 했던 건 아니지만, 그는 본인이 직접 그렇게 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열린 민주적 미디어와 기술 플랫폼을 지지하는 ‘미디어 저스티스’의 설립자 겸 선임 연구원 말키아 데비치 시빌이 말했다. ”그게 바로 진정한 리더십이다.”

'블랙 라이브스 매터'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존 루이스
'블랙 라이브스 매터'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존 루이스 ⓒASSOCIATED PRESS

 

’블랙 라이브스 매터′ 운동을 이끄는 주요 인사들은 AP와 진행한 단독 인터뷰에서 존 루이스 하원의원을 추억하며 그가 남긴 업적과 숙제에 관해 이야기 했다.

 

브리트니 팩 네트 커닝햄 퍼거슨 운동가 겸 교육자 : 

“나는 루이스와 오바마 대통령의 반대편에 앉으며, 이건 역사적인 다세대 민권 회의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난 그저 존 루이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자고 되뇌고는 했다… 마침내 지금 우리의 세대가 걷고 있는 이 길을 위해 앞장선 그를 직접 마주 보고는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었다. 그는 친절함이 느껴지는 눈빛과 결의에 찬 목소리는 자유로 향하는 길이 절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그게 바로 우리가 계속 이 길을 가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는 내게 ‘중간에 분명 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럼에도) 계속 한결같이 이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줬다).”

 

필립 애그뉴, 경찰 및 교도소 폐지 단체인 ‘드림 디펜더스‘의 공동 창립자이자 ‘무브먼트 포 블랙 라이브스’ 활동가 :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매년 열리는 의회 블랙 코커스 의회 재단이었다. 당시에 나는 루이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나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나에게 먼저 다가오더니 우리 단체가 플로리다에서 한 일이 자랑스럽다고 말해줬던 게 기억한다.”

 

패트리스 컬러스, ′블랙 라이브스 매터’의 공동 설립자 :

“루이스 의원을 처음 알게된 건 1990년 P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아이즈 온 더 프라이즈(Eyes on the Prize)를 통해서였다. 나는 그 때 ‘어, 이거 나잖아’라고 생각했다. (1960년대) 당시 루이스는 젊고 급진적인 흑인으로 정부는 물론이고 흑인 인권운동 내의 나이 든 지도층에도 도전하고 있었다. 난 그 다큐멘터리에서 경찰 테러와 경찰의 잔혹성, 그리고 경찰이 에드먼드 페터스 브릿에서 흑인의 평등을 위해 시위에 참여한 이들에게 가했던 잔혹한 방식을 목격하고 분노했다. 현재 2020년에도 경찰들은 흑인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우리에게 여전히 잔인한 방식의 제재를 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루이스 하원의원은 단 한 번도 단념하지 않았고 이는 흑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알렌시아 존슨, 정치 전략가 겸 활동가 :

“나는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엘리자베스 워렌 상원의원을 보좌할 기회가 있었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슈퍼 튜즈데이’ 경선을 앞둔 일요일에 에드먼드 피터스를 건너는 행사를 할 때였다. 그날 루이스도 왔다. 그는 보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횃불을 나눠주고 있었다. 루이스가 (암 투병 중에) 병상에서 나와 셀마까지 왔을 때의 그 감동을 잊지 못한다. 그 현장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그에게 감명받았고 함께 싸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요즘 시위에 나오는 젊은이들을 자신이 얼마나 존경하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애쉬-리 우다드 헨더슨, 사회 정의 리더십 훈련 학교 ‘하이랜더 연구 교육 센터’ 공동 이사 :

“난 존 루이스의 삶이 얼마나 중요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고, 당분간은 계속 그럴 것이다. 이 순간이 너무나도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과 격려의 말들을 기억한다. 루이스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갖고 우리에게 희망을 일깨워 준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유산은 계속될 것이다.”

 

샤를린 카루터스, 흑인 청소년 단체 ‘BYP100’ 설립자 겸 ‘무브먼트 포 블랙 라이브스’ 활동가 :

“루이스가 한 일의 반만이라도 따라 할 수 있다면 내 인생은 가치 있는 것이다. 완벽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평생 이 일에 몸 담을 것’이라고 하는 게 중요한 거다. 나는 이 일에 몸 담고 있다. 명예나 영광을 누리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는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다. 루이스는 평생을 흑인 인권을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첼시 풀러, ‘무브먼트 포 블랙 라이브스’ 대변인, 풀뿌리운동 단체 ‘블랙버드’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

“2000년에 나는 그 나이대의 다른 아이들처럼 미래에 무엇이 될지 고민하고 있던 12살이었다. 당시 루이스는 나에게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하는지,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그에게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흑인의 역사에 관해 공부하길 좋아하지만, 교수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와 같은 흑인을 사랑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일은 별 볼일 없는 게 아니라 대단한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존 루이스 하원의원은 흑인들의 이야기와 자유를 위한 흑인들의 투쟁이 갖는 힘을 보라고 격려해준 사람이다.”

 

*허프포스트 미국판 기사를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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