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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누나’의 배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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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ffpost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라는 상큼한 제목의 드라마가 지난주에 끝났다. 커피 전문 기업 가맹운영팀 소속 슈퍼바이저이자 10년차 대리인 35살 여성 윤진아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의 동생인 4살 연하 서준희의 연애담을 그린 작품이다. 이야기는 두 축으로 나뉜다. 아는 누나와 동생 사이로 오래 알고 지내던 남녀가 사랑에 빠지면서 부딪치는 갈등과 극복 과정이 중심축에 놓인다. 그리고 윤진아의 직장 내 성폭력과 관련돼 벌어지는 각성과 투쟁의 과정이 또 다른 축이다. 평범해지기 쉬운 스토리 라인이 지루함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극의 리얼리티가 많은 부분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윤진아의 가족을 빼놓고선 극중 갈등이 설명되지 않는다. 대기업 출신이지만 정년 퇴임 뒤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아버지, 딸에게 부모라는 명목으로 집안과 학벌을 갖춘 신랑감을 요구할 수 있다고 믿는 어머니, 명문대 박사과정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지만 집안일에는 어느 정도 무심한 남동생에 둘러싸여 장녀 윤진아는 자라났다.

가족주의, 사내 성추행 촘촘히 묘사

부모님의 기대와 사회 기준에 맞춰 적당히 착하고 성실하게, 큰 갈등 없이 살아온 그가 시도한 맨 처음 탈선은 고작 친구의 동생을 사귀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어머니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남자를 사귄다는 이유로, 또 오래도록 가족처럼 지낸 관계 속 질서를 위협한다는 사정으로 연애는 순탄하게 흘러가지 못한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사소한 문제가 사건 내부를 들여다보면 인물들의 인생을 뒤흔들 만큼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신선한 제목 덕분에 드라마는 처음부터 화제를 모았지만, 극중 남녀의 나이 차이는 네 살밖에 나지 않는다. 갈등을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성장 환경의 차이, 가치관의 대립 등을 촘촘히 드러낸다. 나와 그리 다를 것 같지 않은 인물들 속에서 시청자는 자신의 모습 혹은 가족 일원과 내 곁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우리 안팎의 가까운 가족주의, 집단주의, 소시민성을 약간의 거리감만 두고 바라봐도 비릿한 실체가 드러남을 목도한다. 뉴스를 채우는 사건의 주인공인 재벌, 권력가, 정치계, 법조계만이 비판과 반성, 성찰의 대상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우리 삶에서 지속적으로 마주치는 갈등과 투쟁은 정치적 구호나 사회의 부정부패를 극명히 드러내는 것이 아닐 경우가 더 많다. 내가 사랑하는 부모, 가족, 회사 동료와 상사와의 관계에서 더 자주 비롯된다. 곳곳에 포진한 폭력을 사적 관계라는 변명으로 넘어가고 인정한다. 가까이서 바라보는 삶이기 때문에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더 당연히 용서해야 한다고 강요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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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되는 성추행의 주체이면서도 문제가 제기되자 자신을 집안의 가장이자 아이들의 아빠로 묘사하며 밥줄을 끊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주장하는 직장 상사는 바로 곁에서 보고 겪고 형상화할 수 있기에 대항하기 더 힘들다. 잘못을 저질러도 더 떳떳하게 이해해줄 것을 요구하는 태도는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너무 쉽게 용인된다. 피해자보다 더 피해자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가해자는 그만큼 더 폭력적임에도 스스로 자각조차 못한다. “동생 같아서, 딸 같아서”와 같은 명목으로 경계를 침범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동생이나 딸이 그런 대우를 받기 원하지 않는다. 가깝기에 더 지지하고 아껴줘야 할 가족이 사랑과 관심이라는 명목으로 존중은커녕 함부로 침범하고 강요하고 폭력을 자행한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기에 옛 애인의 사생활을 폭로할 수 있고 남은 사랑이라는 허울 아래 스토킹에 납치까지 저질러놓고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각한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음에도 제대로 법적 대응을 하지 않는 윤진아는 낯설지 않지만 안타깝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평범한 연애를 둘러싼 폭력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 사랑으로 굳게 결속된 연인이라도 자유롭지는 않다. 윤진아는 서준희의 감정과 의견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준희에게 아버지를 향한 용서와 화해를 유도하려 한다. 서준희는 윤진아가 지속적으로 겪는 가족과의 갈등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핑계로 그의 동의 없이 미국행을 결정한다.

배신을 통해 어른이 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을 포장했던 선의는 지금 여기 우리의 삶과 관계 또한 지옥으로 탈바꿈한다. 물론 지옥이 지속적이지 않은 건 그 안을 지키는 사랑과 존중과 공감과 연대에 제자리를 찾아주려는 노력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은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리를 서로에게 내주는 이웃이자 때로 한 몸이기도 하다. 100% 부정하고 미워하고 격파해야 할 적이 있지 않아 싸움은 더 어렵다. 우리는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하고 함께하고 싶지만 도망가고 싶다. 이 아슬아슬함 속에 가족이, 연인이, 친구가, 동료가 있다.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지 않아 쉽지 않은 관계의 실상을 바라보고 고민하고 이야기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연대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사랑과 연대가 변화시키는 삶과 사람을 보여주지만, 그들 또한 완벽하지 않고 과정에 있음을 그려낸다. 누가 더 완벽한가를 판단하고 보여주는 것은 연출자의 의도가 아닌 듯이 보인다. 갈등하고 성찰하고 배우고 연대하고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갱신하고 협상하고 잡은 손을 놓았다가도 다시 잡는 사람들을 카메라는 조금 더 떨어진 시선으로 지켜본다. 자신의 아집에 갇혀 스스로 돌아볼 수 없는 이는 성장과 연대의 기회조차 부패와 몰락을 앞당기는 계기로 만들고 마는 것을 보여준다. 극을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깨닫는다. 살아남더라도 변화하지 않는 몸과 마음은 화석이 되는 것임을. 화석이 된 그들에게 삶이 고유성과 독자성을 잃고 그저 그런 인생으로 규격화되는 건 시간문제인 것을.

극 중에서 가장 큰 갈등의 제공자인 윤진아의 어머니는 스스럼없이 딸에게 소리친다. “내가 너고 네가 나지.” 이 한 줄 대사만으로도 사랑과 관심이라는 미명 아래 한 줌 권력으로 경계를 잃고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는 폭력성이 상징화된다. 그렇게 경계를 침범함으로써 사랑을 통제와 휘두름으로 변질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존엄까지 손상시킨다. 인간의 존엄과 품위는 다른 인간을 존중하고 그 품위를 지켜줄 때 스스로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혼돈된 채 윤진아의 삶을 지배했던 억압과 통제는 직접적 갈등을 계기로 민낯을 드러낸다. 여기서 윤진아의 성장은 연인의 무조건적 지지와 사랑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자각함과 함께 1차적으로 일어난다. 그는 비로소 어머니에게 자신의 욕망과 감정의 고유함을 드러내고, 어머니의 욕망에서 해방되려 투쟁한다.

직장에서 ‘윤탬버린’으로 통할 만큼, 남성 상사들의 과도한 스킨십을 받아내며 분위기를 잘 맞추던 윤진아는 더 이상 자신을 함부로 소비되게 놔두지 않겠다며 일어선다. 직장 내 성추행에 결연하게 맞선다. 이 과정에서 누구보다 훌륭한 동지를 만나고 연대의 기쁨도 찾는다. 그렇지만 그의 가장 큰 두 번째 성장은 연인의 사랑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갈등과 투쟁의 과정 속에서 바닥을 치고 일어선 그가 비로소 고유한 주체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방식은 ‘배신’을 통해서다. 우리는 모두 배신을 통해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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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인’은 결핍 깨닫게 하는 장치

가장 가까운 권력을 배반하고 떨쳐 일어나지 않은 세계는 무력하다. 자신의 좁은 세계에 갇혀 삶을 자발적으로 제한한다. 윤진아 역시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며 삶에서 중요한 선택 순간에 사사건건 제한받고 그걸 당연히 여기며 지내왔다. 겉으로는 다 성장한 어른이지만, 그의 실체는 어른이 될 기회를 놓친 나이 많은 아이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나이를 더 먹은 아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자신의 욕망을 모르고 타인의 경계 침범에 아니라고, 부당함에 맞서 스스로 지키는 법을 배우지 않은 아이가 사랑을 선택하고 성취하면서 부모를 배신하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한 걸음을 내디딘다. 더 나아가 그의 배신은 부모의 보호에서 자신의 보호 속으로 그를 서둘러 편입시키려는 연인의 선의를 거부하는 것까지 나아간다.

좀더 슬기로운 방식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윤진아는 윤진아의 방식으로 독립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것은 잠깐의 패배를 앞당기기도 한다. 부모님의 욕망에 맞는 남자친구를 또다시 만나고, 그럭저럭 경계에 걸친 삶을 사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체를 들여다보면 그는 적어도 새로운 연인과의 관계가 만족할 만한 상태가 아님을 인지하고 있다. 이미 사랑과 존중으로 맺어진 관계를 알아버린 사람에게 그 밖의 관계는 결핍을 더 깨닫게 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는 직장 내 성희롱 투쟁으로 본사에서 밀려나지만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둬내기도 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만큼 부쩍 자라버린 것이다. 이미 커버린 사람에게 지난 삶의 틀은 맞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속도로, 타인의 속도를 무시하지 않고 조율하며, 변화와 성장을 이뤄낸다.

윤진아의 어머니는 모호하지만 스스로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사과의 말을 쑥스럽게 남기고 그는 부족한 사과마저 끌어안는다. 떠났던 연인과 서로의 과오를 인정하며 뜨거운 포옹을 나누게도 된다. 앞으로 그 삶에 벌어질 일이 ‘모두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간단히 정리되지 않으리란 것은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지난하고 때로는 답답하기조차 했던 그만의 느린 투쟁과 협상, 변화와 성장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얻은 믿음이 있다. 나는 이 드라마를 윤진아를 향한 믿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 기뻤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달달한 로맨스의 외피 아래 의도적으로 담아내려던 것은 바로 우리의 일상 속 폭력성과 부조리함이다.

우리 일상은 우리의 이상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인다. 그 속의 작은 변혁은 외부인의 시선에선 보잘것없을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삶은 노선이 바뀌고 세계가 재창조된다. 안판석이 연출한 드라마가 보여준 건, 특별한 로맨스의 성취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자각과 성찰과 진보, 연대의 이야기다. 한때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의지하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다고 해서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적절한 도움과 연대를 끌어안을 수 있음도 용기다.

도움과 연대를 끌어안는 용기

안락한 보호와 보살핌에 주저앉지 않고, 자신의 속도와 느린 호흡으로, 보호자를 영원한 보호자로 내몰지 않고 보살핌을 주고받는 관계로 이뤄낸 윤진아의 용기는 연인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인 바로 그 용기와 맞닿아 있다.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사랑과 관계라는 미명 아래 자신의 독립성과 욕망을 외면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때로 어떤 선택은 당장 어리석어 보일 수 있지만 스스로는 안다. 건강한 배신을 통해 살아남은 자들에겐 성찰의 눈과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감각이 진화됐기 때문이다.

* 한겨레21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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