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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맥주, 트라피스트 에일

'맥덕'이 들려주는 맥주 이야기

ⓒhuffpost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고, 가장 향기로운 전통을 지닌 맥주

새로운 맥주의 장르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트랜드에 따라 다른 디자인으로 빚어져 유통되는 요즘의 변화무쌍한 맥주시장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을 전통과 역사를 자부심으로 삼고 묵묵히 자신들의 길을 걷는 맥주들이 있다.

쉴 틈 없이 변화하며 맥주애호가들의 트랜드를 좆는 브루어리도 있지만,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엄격한 자기기준 속에서 변치않는 품질과 높은 수준으로 한결같은 맥주를 빚는 브루어리들이 그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고, 가장 향기로운 전통을 지닌 맥주들을 우리는 일명 ‘수도원 맥주‘, 즉 ‘트라피스트 에일(Trappist Ale)’이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수도원에서 양조되는 술은 유흥의 목적이라기보다 수도생활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예를 들어 수도원에서 제조되는 술 중 가장 유명한 포도주는 미사중 영성체 의식의 성혈로 상징된다. 따라서 그 술을 만드는 일은 단순한 유흥을 위한 목적이 아닌 종교적 의미로 가득찬 성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수도원의 술은 영양 성분이 풍부해 사순 시기(편집자주 :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참회와 희생, 극기, 회개와 기도로써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에 부족해진 영양분을 보충하게 했을 것이다. 영양 성분이 풍부한 동시에 섭취하기에도 간편해서 ‘액체 빵’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 성스러운 술은 세속으로 내려오게 된다.

역사적으로 수많았던 전쟁에 의해 수많은 수도원들이 파괴됐고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이 변화함에 따라 상당수의 수도원이 사라지거나 그 종교적 ‘성스러움’이 사라졌다. 그런 과정을 거쳐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던 양조의 명맥이 점점 희미해지면서 결국 제조법이 세속의 양조장에 팔리게 된다.

술을 빚는 일을 ‘신에게 다가가는 성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하던 수도원 양조자들은 한탄했을 것이다.

20세기초, 트라피스트 에일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지며 사기꾼들이 창궐하게 된다. 품질이 증명되지 않은 유사품이 시장에 난무하거나 수도원 맥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제조방법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저질스러운 맥주에도 트라피스트 에일이라는 상품으로 제조되어 시중에 유통되기에까지 이르렀다.

쉽게 말하면 수도원 맥주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지고 수도원 맥주는 난장판 속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진짜’ 수도원 맥주를 정의하다 :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의 창립

가짜 트라피스트 에일과 여러 유사품들, 라벨만 트라피스트 에일로 바꿔치기 하는 난장판 속에서 이를 보다못한 수도원 8군데가 트라피스트 에일의 전통을 위해 모이게 된다. 그리하여 1997년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The International Trappist Association)가 조직되었다.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는 트라피스트 맥주의 인정조건을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 트라피스트 에일은 반드시 트라피스트 수도원 담장 안에서 양조되어야 한다.

- 트라피스트 에일은 반드시 수도자의 철저한 관리를 받아야 한다.

- 트라피스트 에일의 상업적 목적은 이윤창출이 되어선 안된다.

- 양조장에서의 모든 일은 수도생활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상업적인 행위는 차선으로 한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맥주가 ‘트라피스트 에일’로 인정 받으며 그 상징인 육각형 로고안에 ‘Authentic Trappist Product (진정한 트라피스트 제품)’이라는 문구가 적힌 로고를 부착한다. 현재까지 정식으로 인정받고 유통되는 트라피스트 에일은 단 11종류이다.

트라피스트 에일은 이와같이 그 역사가 가진 배경도 고풍스럽고 독특하지만 풍미또한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트라피스트 에일은 다른 맥주들의 최적음용온도(라거는 일반적으로 섭씨 3-5도, 다른 에일은 섭씨 5-7도에서 제일 맛있다고 알려져 있다)와 다르게 15℃ 라는 다소 높은 온도에서 고블릿이라는 성배 모양의 전용잔에 먹는것이 권장된다. 또한 일반적인 맥주와는 다르게 효모를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병입되어 병 안에서 2차 발효가 일어나는데 2차발효가 진행되는 컨디션에 따라서 그 맛이 각양각색으로 열리며 입을 즐겁게 한다.

현재 인정받는 단 11종의 트라피스트 에일

1. 베스트플레이터런(Westvleteren)

1838년에 양조장이 설립되어 성 식스토 수도원(Sint-Sixtusabdij)에서 양조되는 트라피스트 에일이다.

2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단 한 번도 양조를 멈춘 적이 없는 저력을 가진 양조장으로 맥주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본인 명의의 전화번호와 차량번호가 있어야 구입을 할 수 있으며 최대 2박스까지 구입 가능하다. 한 번 구입하면 60일 이내에는 다시 구입을 할 수 없다.

2. 라 트라프(La Trappe)

1884년 설립된 양조장으로 상업적인 성향이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생산량이 늘어나자 1999년 네덜란드의 맥주회사 바바리아(Bavaria)와 위탁양조 계약을 맺고 맥주를 공급하고 있다. 이 일로 “수도자들에 의해서만 생산되어야 한다.”는 대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트라피스트 에일 양조장에서 제명당한 적도 있다.

3. 베스트말러(Westmalle)

1794년 설립되었으며 1934년에 9.5도의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스트롱 에일을 양조해서 트리펠(Tripel)의 시작선을 끊은 역사적인 양조장이다. 어마어마한 생산량을 자랑하는 베스트말러는 시간당 4만5000병의 맥주를 만들어낸다. 이는 연간 12,000,000리터를 생산하는 양이다.

4. 시메이(Chimay)

가장 대중적인 양조장이다. 국내 대형마트에서도 쉽게 볼 수 있으며 그 맛또한 크게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대중적인 맛을 자랑하고 있다. 맥주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가장 저평가받는 트라피스트 에일인 것은 사실이나 소비자와의 접근성이나 친숙함으로는 제일 훌륭한 장점이 있다.

5. 오르발(Orval)

파란만장한 풍파를 겪은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1132년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나 1252년 일어난 대화재의 시련을 겪은 후 다시 30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약탈과 파괴의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다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수도원이 완전히 파괴되어 방치된다. 1887년에 비로소 재건이 시작되어 1935년에 복구를 마친 후 트라피스트 계열의 수도원이 되어 1931년부터 양조를 시작한다.

6. 아헬(Achel)

아헬 역시도 파란만장한 시련을 겪었다.

1648년 양조를 시작하였으나 프랑스 대혁명으로 수도원은 완전 파괴되었고, 간신히 복구되어 그 후로 명맥을 이어 오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독일군에 의해 700kg의 구리가 징발되며 양조를 멈추게 되었다. 1998년에 형제 트라피스 수도원인 (위에서 소개한) 베스트말러와 로슈포르의 후원으로 2001년도에 양조사업에 복귀하였다.

7. 로슈포르(Rochefort)

1230년 여성 수도원(수녀원)으로 건립되었다가 이후에 남성 수도원이 된 특징이 있는 양조장이다.

무려 1595년에 양조장 설비를 갖춰 현존하는 트라피스트 에일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생산량은 상당히 적어서 양조장 인근에만 공급되다가 1950년대에 이르러 대량생산 체계가 완성되었다.

8. 쥔더르트(Zundert)

투브뤼흐트 수도원(Abdij Maria Toevlucht)에서 생산되는 트라피스트 에일 양조장이다.

쥔더르트의 양조역사는 2013년부터 시작되었다. 굉장히 짧은 편이다. 원래는 농업이 수도원의 수익모델이었는데 여러가지 문제로 농사를 통한 수익창출이 어려워지자 2012년에 양조장을 지어 2013년에 첫 양조를 시작하였다.

9. 엥겔스첼 수도원(Engelszell Abbey)

2012년에 트라피스트 협회의 심사를 통과하여 8번째 수도원으로 등록된 오스트리아 트라피스 에일 양조장이다. Engelszeller Trappistenkäse 치즈와 Engelszell Gregorius Trappistenbier 맥주를 생산한다.

10. 메사추세츠 스펜서 성 요셉 수도원(St. Joseph’s Abbey, Spencer)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스펜서 지역에 위치한, 2013년에 등록된 트라피스트 양조장이며 스펜서 트라피스트 에일(Spencer Trappist Ale)이 시그니처이나 최근에는 IPA과 임페리얼 스타우트도 생산하는 독특한 트라피스트 브루어리이다.

11. 트레 폰타네 수도원 (Tre Fontane Abbey)

2015년에 11번째로 등록된 막내 트라피스트 에일 양조장이다. 비라 델 모나키 (Birra Dei Monaci)를 생산한다.

* Pairing TIP

깊고 풍부한 트라피스트 에일, 무엇과 먹을까

1. 말린 고구마

트라피스트 에일은 특유의 달큰한 풍미가 있다.

트라피스트 에일이 주는 달큰함과 꾸덕한 말린 고구마의 같은 듯 다른 두 단 맛의 환상적인 조화는 일품이다. 시중에서 구하기도 쉬운 말린 고구마로 최고의 페어링을 즐겨보자.

2. 육류

고기랑 어울리지 않는 맥주가 있을까 싶지만 트라피스트 에일은 육류의 무거운 풍미를 깔끔하게 북돋아준다.

기름진 고기와 깊고 풍부한 풍미의 트라피스트 에일은 찰떡궁합이다.

3. 치즈

치즈는 맥주만큼이나 많은 수도원이 수익원으로 삼고 있는 음식이다.

트라피스트 에일의 양조와 치즈의 생산은 같은 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도생활과 그 맥을 같이하는 치즈와 트라피스트 에일은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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