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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에서 예능까지, 서장훈 vs 협주엽

[신들의 전쟁, 세상을 뒤흔든 스포츠 라이벌⑥]

ⓒhuffpost

중학생 시절, 한 살 터울의 형과 동생은 틈만 나면 어울렸다. 농구공을 주고받으며 코트에서 함께 땀을 흘렸다. 재활을 핑계로 땡땡이도 같이 쳤다. 시시덕거리며 사춘기를 함께 보냈던 농구 인생의 동반자. 그러나 어른이 된 뒤에는 ‘최고의 자리’를 놓고 불꽃 튀는 자존심 경쟁을 펼쳤다.

형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국내 프로농구 사상 최다 득점과 최다 리바운드의 주인공이 됐고, 동생 역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출중한 실력으로 NBA급 기량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 농구가 낳은 불세출의 슈퍼스타 ‘국보급 센터’ 서장훈과 ‘매직 히포’ 현주엽 얘기다. 휘문중-휘문고 1년 선후배 사이인 둘은 대학 때는 연세대-고려대로 나뉘어 치열한 라이벌전을 펼쳤고, 프로에서는 SK에 같이 입문했지만 곧 헤어진 이후 항상 ‘적’으로 만났다.

서장훈은 프로농구 통산 열여섯 시즌 동안 경기당 평균 20점에 가까운 놀라운 득점력의 소유자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복 없는 꾸준한 플레이를 보였다. 현주엽은 내・외곽을 가리지 않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코트를 휘저었다. 특히 빅맨임에도 가드보다 더 넓은 시야와 패싱 능력으로 2004~2005시즌에는 어시스트 부문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나란히 코트를 떠난 뒤 어느덧 불혹을 훌쩍 넘긴 두 사람은 2017년 4월 말, 현주엽이 창원 LG 사령탑으로 선임되기 직전까지 라이벌 무대를 TV 예능으로 옮겨 입담 대결을 펼쳤다.

야구선수였던 서장훈, 씨름선수가 될 뻔했던 현주엽

서장훈과 현주엽은 한 살 터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장훈은 1974년 6월 3일생이고, 현주엽 선수는 1975년 7월 27일생이다. 서장훈은 태어날 때부터 4.2킬로그램의 초우량아였다고 한다. 아버지 서기춘 씨 역시 188센티미터의 장신이다. 현주엽도 아버지 쪽이 기골이 장대한 거인 집안이다. 특히 어머니 홍성화 씨는 1960년대 국가대표 농구선수였다.

서장훈은 서울 학동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선린중학교 1학년 때까지 투수와 중견수로 뛰었다. 프로야구 두산과 한화에서 뛰었던 이도형, 그리고 한화에서 뛰었던 이영우 등이 서장훈의 야구 동기생들이다. 야구를 그만둔 것은 키가 너무 커버렸기 때문이었다. 중1 때 키가 180센티미터였는데, 중2 때 189센티미터, 중3 때 이미 2미터를 넘어서 202센티미터까지 자랐다. 서장훈은 키가 한창 자라던 중학교 2학년 때 휘문중학교로 전학을 가서 농구로 전향했다. 서장훈은 나중에 맨발로 쟀을 때 207센티미터로 하승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국내 최장신 농구선수였다.

현주엽도 비교적 늦게 농구를 시작했다. 현주엽 역시 서울 도성초등학교 6학년 때 키가 176센티미터로 아주 컸다. 하지만 통통한 체구가 눈에 띄어 엉뚱하게도 씨름부의 유혹을 받았다. 본인은 농구가 하고 싶어서 휘문중학교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통과하지 못했는데, 이른바 ‘뺑뺑이’로 휘문중학교에 배정을 받으면서 농구 특기생이 아닌 일반 학생으로 입학해 농구를 시작했다.

둘은 지금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중학교 1, 2학년 때는 후보 선수였다. 당시 휘문중학교 센터는 3학년 박준영, 2학년 윤제한이 지키고 있었는데, 2학년 서장훈과 1학년 현주엽은 설 자리가 없었다. 둘 다 중학교에 올라와 농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전으로 뛰지 못했던 둘은 틈만 나면 재활을 핑계로 수영장에 가는 게 낙이었다. 하지만 벤치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장훈은 키가 훌쩍 크면서 주전이 됐고, 현주엽도 이내 주전으로 뛰는 일이 잦아졌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둘이 뛰었던 휘문고는 천하무적이었다. 당시 고교 농구는 서장훈・현주엽의 휘문고, 전희철・우지원의 경복고, 김병철・이세범의 용산고가 3등분하고 있었는데, 서장훈과 현주엽이 1, 2학년 때는 세 학교가 팽팽했지만 서장훈의 1년 선배이던 전희철, 우지원, 김병철 등이 졸업한 뒤에는 휘문고 천하가 됐다.

경기당 30~40점은 우습게 넣는 두 선수를 잡기 위한 대학팀의 러브콜은 일찌감치 시작됐다. 서장훈이 먼저 연세대를 택한 뒤 1년 후배인 현주엽은 고심 끝에 고려대로 진로를 정했다. 현주엽은 1993년 3월, 대학연맹전에서 고려대가 8강 진출에 실패한 것을 보면서 고려대로 마음을 굳혔다. 이미 대학 최강의 전력을 갖춘 연세대보다는 고려대에 들어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고교 선수로는 이례적으로 그해 3월 31일 기자회견까지 열어 고려대 진학을 발표했다. 이미 대학생이던 서장훈은 연세대 1학년 때 대학팀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는 데 앞장서며 자신은 MVP의 영예까지 안았다.

연세대 서장훈 vs 고려대 현주엽, 치열했던 라이벌전

둘의 진로가 연세대와 고려대로 엇갈리면서 대학 무대에서 나란히 팀의 에이스로 라이벌 대결을 펼치게 됐다. 사실 포지션은 센터와 포워드로 달랐지만, 현주엽이 서장훈을 막는 일이 잦아지면서 둘이 매치업 되는 경우가 많았다.

둘의 첫 대결은 1994년 MBC배 대학농구대회. 고려대는 일찌감치 연세대를 만나 28점 차로 크게 졌다. 고려대 선수들은 전원 삭발을 하고 절치부심했다. 패자부활전을 통해 결승까지 오른 고려대는 최종 결승에서 다시 연세대와 맞붙었다.

경기는 치열했다. 연세대가 경기 내내 앞서갔지만 종료 1분을 남기고 고려대 양희승의 골로 동점이 됐다. 고려대 현주엽은 마지막 공격에서 회심의 레이업슛(드리블해 달려오다가 골 근처에서 점프한 상태로 백보드나 링에 볼을 올려놓듯이 하는 슛)을 날렸다. 그런데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연세대 김택훈의 반칙. 남은 시간은 불과 0.4초였다. 현주엽은 자유투 2개를 침착하게 모두 성공시키면서 대학 첫 무대를 감격의 우승으로 장식했다.

여기서 잠시 그 당시 연세대와 고려대 베스트5를 살펴보자. 현주엽이 1학년이던 1994년 당시 고려대는 1학년 현주엽과 신기성, 2학년 양희승, 3학년 김병철과 전희철이 베스트5였다. 연세대는 문경은이 졸업했지만 4학년 이상민, 3학년 김훈, 우지원, 석주일, 2학년 서장훈이 베스트5를 이뤘다. 즉 이상민이 4학년이었던 연세대가 고려대보다 조금 우위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5년 이상민이 졸업하고 서장훈도 1년간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고려대가 전관왕을 달성했다. 특히 고려대는 20연승을 이어가다가 그해 가을 대학연맹전 예선 첫 경기에서 홍익대에 3점 차로 덜미를 잡히면서 연승이 좌절됐다. 이유는 발목 부상으로 현주엽이 결장했기 때문. 고작 2학년이던 현주엽의 팀 내 위상을 새삼 확인해준 경기였다.

서장훈은 1년 유학을 마치고 1996년 3학년으로 복학했다. 현주엽과 학년이 같아진 것이다. 즉 둘이 3학년이던 1996년과 4학년이던 1997년은 두 선수의 자존심을 건 라이벌 대결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서장훈은 복귀하자마자 고려대의 7회 연속 우승 행진에 제동을 걸며 대학농구 정상에 복귀했다. 이후 연세대는 파죽지세로 44연승 행진을 이어가며 1970년대 말 고려대가 세운 49연승에 도전했다. 하지만 1970년대 말 고려대 이충희, 임정명의 후예들은 기록 경신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 선봉에 현주엽이 섰다.

두 선수의 대학 무대 마지막 대결은 1997~1998 농구대잔치 4강 플레이오프였다. 1997년 초, 이미 프로농구가 출범했던 터라 당시 농구대잔치는 대학팀들의 잔치였다. 즉 연세대-고려대의 4강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는 팀의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현주엽은 4강 플레이오프 3경기에서 평균 30점을 넣는 맹활약을 펼치며 서장훈과의 맞대결에서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승부는 2승 1패로 연세대가 챔피언 결정전 진출권을 따냈고, 내친김에 우승까지 차지했다.

농구대잔치에서 서장훈의 연세대는 대학팀으로 1997년 프로 출범 이전까지 2번이나 정상에 올랐고, 서장훈은 2번 모두 MVP를 차지했다. 하지만 현주엽의 고려대는 결국 한 번도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 뒤 현주엽은 고려대가 아닌 상무에서 뛰던 2001~2002 농구대잔치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고 자신도 MVP를 차지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지금은 농구대잔치 우승을 밥 먹듯 하는 상무지만 이때 우승이 상무로선 농구대잔치 최초의 정상 등극이었다. 또 현주엽으로서는 당시 상무 감독이었던 추일승 현 고양 오리온 감독과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짧은 만남 그리고 긴 이별

서장훈과 현주엽은 나란히 대학을 졸업한 뒤 프로에서는 공교롭게도 같은 팀에서 뛰게 됐다. 1997년 초, 8개 팀으로 출범한 프로농구는 1997~1998시즌부터 프로농구에 참가하는 신생팀 진로와 LG에게 93학번 졸업생들을 상대로 대학 우선 지명권을 줬는데, LG는 양희승, 박재헌, 박훈근, 박규현이 졸업하는 고려대를 택했고, 진로는 추승균이라는 걸출한 에이스가 있는 한양대를 선택했다. 당시엔 서장훈의 진로가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에 두 팀 모두 연세대를 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서장훈이 미국 유학 1년 만에 귀국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서장훈을 잡기 위해 두 팀 모두 연고 우선 지명학교를 연세대로 바꾸겠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진로가 한양대 대신 연세대를 우선 지명하면서 서장훈은 진로로 가게 됐고, 진로가 나중에 SK에 인수되면서 서장훈의 프로 첫 팀은 청주 SK가 됐다. 어쨌든 이 일로 추승균의 진로도 대전 현대로 바뀌었고, ‘이성균 트리오’(이상민-조성원-추승균)가 완성될 수 있었다.

94학번인 현주엽이 1998~1999시즌을 앞둔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SK의 지명을 받으면서 현주엽-서장훈 두 선수는 휘문고 졸업 이후 5년 만에 다시 같은 팀에서 한솥밥을 먹게 됐다. 당시 청주 SK 안준호 감독은 추첨을 통해 전체 1순위를 뽑은 뒤 “우승이야”라고 외쳐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전체 1순위는 곧 현주엽을 의미했고, 이것은 또 서장훈과 현주엽, 두 선수가 한 팀에서 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SK의 운명은 안준호 감독의 바람과는 달리 영 딴판으로 흘러갔다.

서장훈, 현주엽의 미묘한 자존심 대결과 포지션 중복에 따른 부조화, 게다가 외국인 선수 기대주였던 토니 러틀랜드의 부진이 겹치면서 SK는 우승은커녕 19승 26패로 전체 10개 팀 가운데 8위에 머물며 플레이오프 조차 오르지 못했다.

서장훈과 현주엽의 개인 성적은 뛰어났다. 두 선수 똑같이 45경기 가운데 34경기에 출전했는데, 서장훈은 경기당 평균 25.4득점, 현주엽도 경기당 평균 23.9득점을 올렸다. 리바운드도 서장훈 평균 14개, 현주엽 평균 6~7개를 기록했다. 두 선수의 기록을 합하면 50득점에 20리바운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산술적인 계산일 뿐, 둘이 같이 뛰면 시너지 효과는커녕 엇박자가 났다. 둘 다 자신이 공을 가지고 자신이 주도하는 농구를 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안준호 감독이 경질되고 후임으로 선임된 최인선 감독은 현주엽을 트레이드시켰다. 199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청주 SK 현주엽과 여수 코리아텐더 조상현이 맞트레이드됐다는 빅뉴스가 전해졌다. 이로써 서장훈과 현주엽의 만남은 1년 반 만에 이별을 고하고 말았다. 사석에서는 허물없이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였지만, 코트 안에서는 둘 다 팀의 에이스가 되길 원하면서 미묘한 경쟁을 펼쳤던 두 선수는 ‘공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두 선수의 희비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서장훈은 2번의 우승과 2번의 정규리그 MVP, 1번의 챔피언 결정전 MVP의 영예를 안았다. 반면 지독하게도 운이 없었던 현주엽은 우승은커녕 챔피언 결정전조차 경험하지 못했다.

서장훈은 1999~2000시즌 도중 현주엽이 떠나자마자 청주 SK에서 연세대 후배인 조상현, 황성인 등을 이끌고 우승을 차지했다. 상대팀은 신선우 감독과 ‘이성균 트리오’가 건재하며 3년 연속 우승을 노리던 대전 현대였다. 서장훈은 이때 정규리그와 챔피언 결정전 MVP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서장훈은 이후 서울 삼성으로 팀을 옮겨 2005~2006시즌 다시 한 번 우승의 영예를 맛봤다. 공교롭게도 당시 삼성의 사령탑은 청주 SK 시절 스승이던 안준호 감독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정규리그 MVP에 등극했다. 하지만 이때는 울산 모비스의 양동근과 함께 프로농구에서 전무후무한 공동 MVP 수상자가 됐다.

반면 현주엽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열 시즌 동안 단 한 번도 정상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는 현역시절 주변 사람들에게 “KBL에서 뛰는 웬만한 간판선수들은 모두 우승을 맛봤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꼭 우승하고 싶다”며 우승에 대한 간절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6강과 4강 플레이오프에만 4번 진출했을 뿐, 챔피언 결정전조차 오르지 못했다. 플레이오프에서 팀 성적은 1승 9패에 그쳤다. 지독히도 팀 운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우승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기회가 있긴 있었다. 우승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은 창원 LG에서 뛰던 2006~2007시즌이었다. 당시 LG는 ‘우승 청부사’ 신선우 감독을 영입하며 무관의 아픔을 씻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외국인 에이스 찰스 민렌드와 현주엽을 중심으로 정규리그 2위를 차지하며 우승 가능성을 부풀렸다. 하지만 부산 KTF와의 4강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또 다른 외국인 선수 퍼비스 파스코가 심판을 폭행해 영구 제명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홈에서 열린 1, 2차전을 내준 LG는 파스코의 퇴장에도 천신만고 끝에 원정에서 열린 3차전을 이겼지만, 4차전에서 외국인 선수 한 명만 뛰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부산 KTF에게 1승 3패로 밀려 챔피언 결정전에 오르지 못했다.

‘국보급 센터’ 서장훈 vs ‘포인트 포워드’ 현주엽

서장훈은 왜 위대한 선수였나. 그는 프로 통산 열여섯 시즌 동안 688경기에서 1만 3,231점을 기록했다. 당당히 통산 득점 1위다. 경기당 평균 19.2점의 놀라운 기록이다. 현역시절 막바지에 득점력이 뚝 떨어진 것을 감안하면 전성기 때는 경기당 30점 가까운 득점을 올렸다는 얘기다. 통산 득점 2위(1만 19점)인 동기생 추승균(현 전주 KCC 감독)과의 격차는 무려 3,212점이나 난다.

서장훈이 전주 KCC에서 뛰던 2008년 11월 19일, 프로농구 역사상 처음으로 1만 득점을 달성하던 순간, 상대팀이 하필 현주엽이 뛰고 있던 창원 LG였다. 서장훈은 현역시절 “골대 밑에서 몸싸움을 기피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승부욕이 강해 리바운드만큼은 적극적이었다. 통산 리바운드도 5,235개(경기당 평균 7.6개)로 1위다. 통산 리바운드 2위인 원주 동부 김주성과의 격차가 크다. 김주성이 은퇴할 때까지 서장훈의 기록을 넘어서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주엽은 만능 플레이어답게 프로 통산 열 시즌 동안 트리플더블을 7번이나 달성했다. 포인트가드 출신인 주희정의 8번에 이어 통산 2위다. 그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 때문에 현역시절 막바지에 경기당 평균 득점이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하지만 포워드이면서도 어시스트가 뛰어나 ‘포인트 포워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통산 어시스트가 5.2개에 이르렀고, 2004~2005시즌에는 무려 7.83개의 어시스트로 전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 경기 매너가 좋아 선수시절 내내 테크니컬 파울이 딱 5번에 그쳤고, 2006년에는 모범선수상도 받았다.

프로에서는 ‘최고’의 자리를 다투던 라이벌이었지만, 국가대표팀에선 한솥밥을 먹는 동료였다. 둘은 나란히 아시안게임에 3번 출전해 금메달 1개와 은메달 2개를 일궈냈다. 1994년 히로시마, 1998년 방콕 대회에선 중국에 밀려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마침내 중국을 누르고 한국 남자 농구가 20년 만에 금메달을 따는 데 앞장섰다. 특히 현주엽은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88 대 90으로 패색이 짙던 종료 직전 중국 후웨이동의 자유투 2개가 연이어 실패한 뒤 멋진 드리블 돌파에 이은 레이업슛으로 동점을 만들고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현주엽은 연장전에서도 과감한 1 대 1 돌파와 중거리슛으로 중국 수비를 농락하며 연속 득점을 해 서장훈, 김승현과 함께 우승의 최대 히어로가 됐다.

두 선수는 현역 막바지에 같은 팀에서 의기투합해 우승해보자고 다짐했지만, 결국 그 꿈은 이루지 못한 채 현주엽은 2009년 5월 만 서른네 살에, 서장훈은 2013년 3월 만 서른아홉 살에 정든 코트와 작별했다.

두 선수는 더 이상 코트에서 볼 수 없는 농구팬들의 아쉬움을 예능에서 달래줬다. 서장훈이 2014년 먼저 예능에 발을 들여놓았고, 현주엽은 서장훈의 권유로 2015년 예능에 데뷔했다. 서장훈은 이제 완전히 ‘방송인’이 됐고, 현주엽은 케이블 TV에서 고정 MC를 맡기도 했다. 비시즌에만 ‘방송인’이고, 시즌 때는 ‘체육인’이라며 선을 그었던 현주엽은 결국 친정팀 창원 LG의 부름을 받고 사령탑으로 코트에 복귀했다. 현주엽이 프로농구 감독이 됐을 때, 서장훈이 무척 부러워했다는 후문이다. 언젠가 둘이 코트에서 사령탑 대결을 펼칠 날이 올지도 궁금하다.

현역시절 때로는 미묘한 감정으로 대립도 했고, 때로는 서로에게 자극이 되며 코트에서 열정을 불태웠던 두 사람이 이제는 서로 다독이고 아껴주며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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