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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 06일 15시 01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4월 06일 15시 01분 KST

끝나지 않은 퍼펙트 게임, 최동원 vs 선동렬

[신들의 전쟁, 세상을 뒤흔든 스포츠 라이벌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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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과 호남, 연세대와 고려대, 롯데와 해태.

최동원과 선동열의 라이벌 구도는 시나리오의 복선처럼 필연적이었던 것일까? 출신 지역, 출신 학교, 소속팀까지 모든 것이 대척점에 존재하며 둘의 라이벌 대결을 더욱 뜨겁게 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팬들의 기억에 가장 또렷하게 각인된 라이벌. 드라마틱한 승부가 영화 <퍼펙트 게임>으로도 만들어져 화제를 뿌렸던 라이벌. 최동원과 선동열은 과연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이 불행이었을까, 행운이었을까.

노히트노런 투수, 경남고 최동원과 광주일고 선동열

사실 이 두 명의 최고 투수를 비교하면서 고려해야 할 게 하나 있다. 바로 나이 차이다. 최동원이 나이는 다섯 살이나 많고, 학번은 4년 빠르다. 최동원은 1958년 5월 24일 부산에서 태어났고, 선동열은 1963년 1월 10일 광주 태생이다. 선동열이 빠른 63년생이기 때문에 학년으로는 4년 차이가 난다. 최동원이 대학을 졸업하던 1981년에 선동열이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중·고교는 물론 대학시절에도 두 선수의 맞대결은 볼 수 없었다.

두 선수가 야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흥미롭다. 최동원에게 아버지의 존재가, 선동열에게는 형의 존재가 영향을 끼쳤다.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 씨(2003년 작고)는 한국전쟁 때 기갑장교로 참전했다가 큰 부상을 입었고, 결국 최동원이 중학교 때 한쪽 다리를 절단한 뒤 의족 신세를 져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삼 형제 중 큰아들인 최동원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함께 캐치볼을 하면서 야구선수의 꿈을 키워주었고, 평생 최동원을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했다(삼 형제 중 막내가 현 프로야구 심판 최수원 씨다).

선동열은 채소농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야구를 접하게 된 것은 형 선형주 씨의 영향이 컸다. 형은 초등학교 때 야구선수였고 포수를 봤는데, 선동열은 어린 시절부터 형을 향해 공을 던지며 투수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선동열이 초등학교 6학년 때, 고등학교 2학년이던 형은 백혈병으로 세상과 작별을 고하고 말았다.

두 선수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것은 고등학교 때다. 최동원은 경남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5년 가을, 전국대회 4강 이상 상위팀들이 초청된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당시 고교 최강이던 경북고등학교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또 그다음 경기였던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를 상대로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이어가면서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세웠다. 고3 때이던 1976년 청룡기대회에서는 군산상고를 상대로 한 경기 최다인 20개의 탈삼진과 4경기 연속 완투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당시 고교야구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엄청났는데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기, 황금사자기 등 4개 메이저대회의 총관중이 100만 명을 넘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서도 은테안경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최동원을 소재로 한 만화책이 발간될 정도로 당시 고교야구와 최동원의 인기는 대단했다.

선동열 역시 광주일고 3학년 때이던 1980년 봉황대기대회 1회전에서 경기고를 상대로 삼진 15개를 잡아내면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선동열을 앞세운 광주일고는 그해 4개 메이저대회 가운데 2개 대회에서 우승했고, 선동열은 평균자책점 1.27이 말해주듯 최고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대륙간컵 MVP 최동원 vs 세계선수권 MVP 선동열

두 선수는 국제대회에서도 탁월한 성적을 남겼다. 최동원은 대학시절 무려 23연승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대학 1학년 때이던 1977년 캐나다에서 열린 대륙간컵대회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8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면서 대회 최우수선수와 최우수투수에 뽑혔다. 영화 <퍼펙트 게임>의 첫 장면은 바로 이 대회를 소재로 한 것이다.

선동열도 대학생 신분으로 1982년과 1984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해 두 차례 모두 MVP에 올랐다. 특히 1982년 가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미국과의 경기에서는 삼진 15개를 잡아내며 한국의 2 대 1 승리를 이끌었다.

선동열은 나중에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 진출했는데, 이에 앞서 최동원도 해외 진출 기회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77년 일본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한국계 일본인이던 당시 가네다 마사이치(한국 이름 김경홍) 감독이 최동원을 양자로 들이는 조건으로 입단을 추진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가네다 감독은 선수시절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 기록인 통산 400승을 달성한 전설의 야구인이다. 최동원은 또 대학을 졸업하던 1981년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연봉 61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1994년 박찬호가 LA 다저스에 입단할 때 계약금이 120만 달러였으니 그보다 13년 전인 당시로선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병역 문제가 끝내 발목을 잡았고, 토론토와의 계약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1970~1980년대 스포츠 스타들에게 병역은 해외 진출의 큰 걸림돌이었다. 1978년 공군에서 뛰던 축구 스타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지만 복무 기간 6개월을 모두 채운 뒤에야 독일로 떠날 수 있었다. 최동원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병역 혜택이 주어졌으나 해외 진출 기회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반면 최동원과 함께 이 대회 우승 멤버였던 선동열은 당시 대학 2학년으로 일찌감치 병역 문제가 해결돼 공백 없이 프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해외 진출 기회는 1996년에서야 찾아왔다.

해외 진출 기회를 놓친 최동원은 프로야구 출범 직전 실업 무대에서도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최동원이 대학을 졸업한 것은 1981년 봄이고, 프로야구는 1982년에 출범했다. 하지만 그해 9월,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선수에 차출되는 바람에 최동원은 김시진, 김재박, 한대화, 김정수, 이해창, 심재원 등 당시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프로 진출이 1년 유보됐다.

최동원은 연세대를 졸업하던 1981년 실업야구 롯데에 입단해 그해 실업야구 리그에서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총경기 수가 36경기이고 롯데가 소화한 총이닝 수가 324이닝인데 최동원 혼자 206이닝을 던졌다. 또 전기리그 롯데가 거둔 13승 4패 중 최동원 혼자 12승(1패)을 달성했다. 최동원은 롯데의 우승을 이끌면서 그해 MVP와 신인상, 다승왕 등 3관왕에 올랐다.

영남 vs 호남, 연세대 vs 고려대, 롯데 vs 해태

선동열이 등장하기 전까지 최동원의 라이벌은 김시진이었다. 김시진과는 같은 58년생 동갑내기인 데다, 1981년 실업야구 최고팀을 가리는 코리안시리즈, 그리고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으면서 한때 라이벌로 불렸다. 선동열은 1985년에야 프로에 입단했기 때문에 그 전에는 최동원-김시진 라이벌 구도가 성립될 수 있었다.

1981년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는 지금의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와 흡사한데, 최동원의 롯데와 김시진의 경리단(육군)이 불꽃 대결을 펼쳤다. 마치 그로부터 3년 뒤 펼쳐질 1984년 롯데와 삼성의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를 미리 보는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당시 롯데는 프로야구 롯데, 당시 경리단은 프로야구 삼성 선수들이 주축이었다.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는 5전 3선승제였는데, 아마추어 롯데는 1무 2패로 뒤지다가 내리 3연승을 거두고 3승 1무 2패로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최동원은 당시 6경기에 모두 출2부 조선의 라이벌, 한국의 라이벌 201전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3년 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도 롯데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승 3패로 삼성을 따돌렸고, 최동원 혼자 4승(1패)을 따냈다. 

롯데 자이언 츠 및 삼성 라이온즈 사진 제공.
최동원(왼쪽)과 선동열의 라이벌 대결은 영화 '퍼펙트 게임'으로도 만들어졌다. 

맞대결 1승 1무 1패, 그리고 숨겨진 맞대결

롯데 자이언츠의 ‘무쇠팔’ 최동원과 해태 타이거즈의 ‘무등산 폭격기’선동열은 국내 프로야구에서 세 차례 선발투수 맞대결을 펼쳤고, 결과는 1승 1무 1패로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3경기는 공교롭게도 모두 롯데의 홈구장인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렸는데, 역사적인 첫 대결은 1986년 4월 19일에 있었다. 이날 두 선수 모두 9회까지 완투했고, 해태가 1 대 0으로 이겼다. 두 선수는 똑같이 9이닝 동안 안타 6개씩 맞고 삼진도 5개씩 잡았지만, 최동원은 3회 송일섭에게 솔로 홈런으로 1점을 허용하는 바람에 완투패를 당했다. 이 패배로 1985년부터 이어져온 연승 행진을 12경기에서 멈춰야 했다. 반면 선동열은 프로 데뷔 첫 완봉승을 라이벌 최동원을 상대로 거두게 됐다.

두 번째 대결은 그로부터 4개월 뒤에 성사됐다. 1986년 8월 19일, 역시 부산 사직구장이었고, 이번에는 최동원이 2 대 0 완봉승을 거두며 설욕에 성공했다. 선동열 역시 잘 던졌지만 수비 실책으로 2점을 내주며 비자책 패배를 기록했다. 1회 말 1사 1·3루의 위기에서 1루 주자 홍문종이 2루로 도루를 시도하자 해태 포수 김무종이 2루에 송구하는 사이 3루 주자 정학수가 홈을 파고들었다. 이때 해태 2루수 차영화가 홈으로 던진 것이 그만 악송구가 되면서 1점을 내줬고, 이어 4번 김용철의 적시타로 홍문종 마저 홈을 밟으며 2 대 0이 됐다. 선동열은 이후 8회까지 안타 3개만을 허용하고 삼진을 무려 9개나 잡았지만,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다. 최동원은 9회까지 해태에 산발 7안타만 허용하고, 삼진 7개로 타선을 꽁꽁 묶으면서 완봉승에 성공했다.

결승전이 돼버린 두 선수의 세 번째 맞대결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였다. 영화 <퍼펙트 게임>이 바로 이 세 번째 대결을 영상화한 것이다. 1987년 5월 16일, 역시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해태의 정규시즌 경기는 연장 15회까지 무려 4시간 56분 동안 혈투를 펼친 끝에 2 대 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최동원은 연장 15회까지 60타자를 맞아 투구 수 209개를 기록했고, 선동열은 56타자를 상대로 232개를 던졌다. 오후 2시에 시작된 경기는 해가 지고 조명탑에 불이 들어온 저녁 7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치열했던 명승부가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끝났지만, 두 선수는 여유가 넘쳤다. 최동원은 선동열의 손을 맞잡으며 “동열아, 우리 끝날 때까지 한번 던져볼까?” 하고 농담을 건넸고, 선동열은 그런 선배를 보고 “형님, 한번 해볼까요?” 하며 웃음으로 되받았다.

그런데 두 선수의 숨겨진 맞대결이 있는데 소개하자면 이렇다. 1987년 4월 12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경기로, 이날 롯데 선발은 최동원이었고, 해태 선발은 고(故) 김대현이었다. 그런데 김대현이 경기 직전 팔 통증을 호소하는 바람에 한 타자만 상대하고 곧바로 선동열과 교체됐다. 결과는 해태의 6 대 2 승리. 선동열은 9회까지 9안타, 3사사구를 허용하며 2실점만 허용했고, 삼진 9개를 잡아냈다. 반면 최동원은 4회까지 볼넷 1개만 허용하는 완벽한 투구를 펼치다가 5회 3실점, 6회 3실점하고 7회부터 교체됐다. 결국 선동열이 승리투수, 최동원이 패전투수가 됐다. 하지만 이 경기는 선동열이 선발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발 맞대결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최동원의 명품 커브 vs 선동열의 칼날 슬라이더

두 선수의 주 무기는 시속 150킬로미터를 넘는 호쾌한 빠른 볼이었다. 여기에 최동원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낙차 큰 커브볼, 선동열은 방망이를 비껴가는 예리한 슬라이더가 있었다. 두 투수는 이렇게 딱 두 가지의 구종으로 타자를 압도했다. 지금은 투수 대부분이 패스트볼, 커브볼, 슬라이더, 체인지업 등 적어도 서너 가지 구종을 가지고 있지만, 최동원과 선동열, 두 최고 투수는 이렇게 ‘투피치’만으로도 타자를 압도했다.

통산 기록은 선동열이 앞선다. 최동원은 8년 동안 103승 74패 26세이브를 기록했고, 선동열은 11년 동안 146승 40패 132세이브를 올렸다. 통산 평균자책점은 선동열이 1.20으로 1위, 최동원은 2.46으로 2위다.

당시 우승을 밥 먹듯 했던 해태와 정규시즌에서 최고 승률을 거둔 적이 한 번도 없는 롯데의 전력도 둘의 성적에 영향이 없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연투 능력만큼은 최동원이 한 수 위였다. 최동원이 선동열보다 세 시즌을 덜 뛰었는데도 프로 통산 완투경기 수는 최동원이 80경기, 선동열이 68경기로 최동원이 12경기나 더 많다. 완투승 역시 최동원 52경기, 선동열 51경기로 세 시즌을 덜 뛰고도 최동원이 1경기 더 많았다.

이런 최동원의 연투와 완투 능력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빛을 발했다. 7전 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은 롯데의 우승에 필요한 4승을 혼자 모두 따냈다. 외국 기자들은 “최동원이 혼자 4승을 따냈다”는 데 한 번 놀라고, “그런데 4승 말고 1패가 더 있다”는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선동열은 꿈의 0점대 평균자책점을 무려 5번이나 찍었다. 또 지금까지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한 시즌 0점대 평균자책을 기록한 투수는 선동열이 유일하다. 또 통산 최다승과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도 여전히 선동열이 가지고 있다.

‘꿈의 20승’으로 불리는 한 시즌 20승 이상 기록은 선동열이 세 차례, 최동원이 두 차례 가지고 있다. 특히 최동원은 1984년 한 시즌 동안 무려 28423이닝을 던지면서 27승을 올렸는데, 이때 기록한 한 시즌 탈삼진 223개는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최동원은 투수로서도 최고였지만 프로야구 초창기 선수 권익을 위한 프로야구선수협의회 결성에 앞장서기도 했다. 1988년 9월, 대전 유성호텔에 모인 7개 구단 140여 명의 선수들은 최동원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최동원은 구단에 찍히는 바람에 팀 후배 김용철과 함께 고향팀 롯데를 떠나 삼성의 김시진, 장효조와 2 대 2 트레이드를 당했다. 몸에 맞지 않는, 어색한 유니폼을 입은 이들 네 명은 선수시절의 말년을 우울하게 보냈다.

2011년 9월 14일, 최동원이 쉰세 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을 때 선동열은 빈소에서 “최동원 선배는 나의 우상이었다.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며 몸을 낮췄다. 그는 특히 “최동원 선배의 연투 능력은 아무도 넘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동원과 선동열. 야구팬들은 지금도 둘 중 누가 더 최고 투수였는지를 놓고 끊이지 않는 논쟁을 벌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둘 다 금세기 한국 야구 최고의 ‘국보(國寶)’급 존재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