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
2019년 05월 18일 16시 21분 KST

'요즘 애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바텐더는 이 사람이다

국내 최고령 바텐더다.

오후 네시부터 칵테일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고? 심지어 평일인데도 네시부터 꽉 차는 칵테일바라니. 문을 열고 들어가면 더욱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20대의 ‘힙스터’들이 할아버지뻘 바텐더 앞에 쪼르륵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국내 최고령 바텐더인 이명렬 바텐더의 칵테일을 맛보기 위해서다.

손님 정재민씨(인스타그램@affogato_jeong) 제공
국내 최고령 바텐더 이명렬씨가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 그는 계량을 하지 않는다. 45년동안 칵테일을 만든 베테랑이기 때문이다.

14일 오후 네시, 서울 여의도 충무빌딩 지하 일 층에 위치한 칵테일 바 다희. 문 여는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건만 이미 손님들이 많다. 바에서 가장 오른쪽 자리에 비스듬히 앉은 할아버지 손님의 모습이 낯이 익다. 그는 기자가 처음 다희에 왔을 때도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두 번째 왔을 때는 옆자리에 앉아 대화도 나눴다.

“혼자 왔어? 혼자도 괜찮지. 술은 혼술이 최고야.”

주인도 아닌 그가 자연스레 자리를 안내한다. 지난 달에 옆자리에 앉아 계시지 않았냐고, ‘자네는 성이 무어냐’ 물어 신씨라고 대답했더니 같은 성씨라며 칵테일 한 잔 값도 계산해주셨는데 기억이 나지 않느냐 물었더니 그제서야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아, 그때 그 기자인가? 나이가 77살쯤 되면 어제 일도 기억이 잘 안나.”

10년째 일주일에 두세번은 다희에 온다는 신씨 할아버지와 또다시 대화를 나눴다. 그는 퇴직 후 무료해진 시간들을 집 근처에 있는 다희에서 보냈다고 했다. 몇년 전 집이 이사를 가는 바람에 이제 걸어서 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지만 버스를 타고서라도 온다고 했다. 다만 젊었을 때에 비해 주량도 체력도 많이 떨어져서 한 두잔만 마시고 다섯시쯤엔 귀가한다고 했다. 그는 “늦둥이 아들이 결혼을 하지 않아서 고민”이라며 “‘요즘애들’은 원래 그렇게 늦게 하는거냐”고 묻기도 했다. 다희에서는 2030도, 힙스터(주류 문화에 반항하며 독특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드는 젊은 세대)들도 70대 할아버지와 ‘친구’가 된다.

오래된 가게를 ‘노포’라고 부른다. 다희 역시 바(bar)계의 노포라고 할 수 있다. 트렌드를 잘 반영해야 하고, 고급스러움을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바라는 공간과 노포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희는 ‘요즘애들’에게 ‘힙’(hip·유행을 선도하고 신선하다는 뜻)의 끝판왕이 됐다. 건물 지하에 위치한 세평 남짓한 공간에서 20대부터 70대까지 칵테일을 마시고 건배를 하고 김광석의 노래를 ‘떼창’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국내 최고령 바텐더인 다희의 이명렬(72) 바텐더를 지난달과 이번달에 걸쳐 세차례 만났다. 그는 공식적인 사진촬영은 사양했다.

손님 정재민씨(인스타그램@affogato_jeong) 제공
국내 최장수 바텐더 이명렬씨가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 그는 계량을 하지 않는다. 45년동안 칵테일을 만든 베테랑이기 때문이다.

명동 사보이호텔에서 일 시작

 

“우리 집 처음이면 무조건 진토닉이야. 진토닉 마셔”

“처음 아닌데요.”

“그래도 첫 잔은 진토닉이야.”

이명렬 바텐더는 “우리 집에선 진토닉이 가장 유명하다”라며 권했다. 진토닉은 진을 베이스로 해 토닉워터를 첨가해 만든 칵테일이다. 이명렬 바텐더는 여기에 진을 약간 더 넣고, 레몬을 컵 가장자리에 꾹꾹 눌러 네바퀴 반 닦아내듯 돌리고 휘저은 뒤, 손님에게 내어준다. 47도의 진을 넣는다는데 독한 맛보다는 상큼하고 시원한 느낌에 한잔이 금방 바닥이 난다. 진토닉은 칵테일 중 기본이지만, 바텐더들의 실력을 알 수 있는 술이기도 하다.

이명렬 바텐더는 국내 최고령 바텐더이고, 그의 바는 국내 최장수 바다. 그는 1947년 충남 서천군 판교면에서 태어났다. 군 제대 후, 친구와 함께 당시 유망 직종이었던 관광관리종사원 자격 시험을 봤고 합격해 1974년 명동 사보이호텔 지하 바 ‘구디구디’에서 바텐더 일을 시작했다. 1983년에 지금 자리에 세들어 자신의 바를 냈고, 1986년 5월20일 가게 자리를 사들였다. 오는 20일이면 33주년을 맞는다. ‘다희’(多喜)는 한자로 ‘기쁨이 많다’는 뜻이다.

이명렬 바텐더는 칵테일을 만들 때, 계랑을 하지 않는다. “45년 동안 같은 일을 했더니 계랑 안 해도 될 만큼 손에 익었다”고 했다. 진토닉, 데킬라 선라이즈, 싱가폴 슬링, 갓퍼더, 마티니 등 45년전 처음 칵테일을 배웠을 때부터 만든 칵테일을 지금도 만들고 있다.

다희는 해외 바를 탐방하기 위한 출장을 제외하곤 명절 때도 문을 닫아본 적이 없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운영하는 다른 바들과는 달리 오후 네시부터 문을 열고 열시면 닫는다. 이제 60~70대가 된 단골 손님들의 생활 패턴에 맞춘 것이다. 가격도 20년 넘게 똑같이 한잔 5천원이다.

“이것도 전략이라면 전략이다. 칵테일은 전부 5천원이고 안주는 무한 리필인데, 맛까지 좋으면 누가 단골이 안 되겠나. 내 칵테일의 맛에 대한 자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다희의 기본 안주는 멸치와 땅콩, 파래김, 그리고 간장과 고추장을 섞은 소스다. 일주일에 한번에서 두번 정도 중부시장에 가서 안주를 사고, 남대문시장에서 술을 사온다. 다희의 특별 안주는 손님들이 한 두봉지씩 사오는 과자들이다. 빈손으로 오느냐, 과자를 사오는냐를 보고 단골 여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손님들이 사온 과자를 손님 모두가 나눠 먹는다. 또 하나 다희의 특별한 규칙은 한 사람당 5잔 이상은 마실 수 없다는 것이다. 이명렬 바텐더는 조용히 손님을 보고 있다가 5잔이 됐다 싶으면 돌려보낸다.

한겨레
서울 여의도의 한 빌딩 지하에 위치한 세 평 남짓한 칵테일바 다희에서는 70대 바텐더와 20대 힙스터들이 함께 어울린다.

20대들 “유튜브 보고 왔어요”

 

몇년 전부터 레트로(복고) 바람이 불면서 노포를 찾은 젊은이들이 많이 생겼다. 다희 역시 칵테일을 좋아하거나, ‘힙’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20대들이 줄 서서 찾는 곳이 됐다.

경기도 부천에서 왔다는 디자이너 백아무개(23)씨는 한 유튜브 채널에서 다희를 방문한 영상을 보고 찾아왔다고 했다. 백씨의 말에 뒤쪽 테이블에 앉은 두명의 남성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 저희도 그 유튜브 보고 왔어요!” 올해 대학에 입학했다는 이들은 유튜브를 보고 궁금해져서 인천에서 지하철을 타고 왔다고 했다.

다희의 단골 손님인 정재민(25)씨는 스무살 때부터 이 곳을 찾았다. “우연히 다희를 알게 돼서 5년째 오고 있는데, 몇년 전부터 제 또래 손님들이 부쩍 늘었어요.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린 나 같은 사람들 때문인 것 같아서 오랜 단골 손님에겐 미안하죠. 다희가 좋은 이유는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나이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친구가 돼 어울릴 수 있다는 점이에요.”

이명렬 바텐더는 아직 2G폰을 사용하는 70대지만, 그를 만나러 오는 손님들은 블로그나 유튜브를 즐겨보고, 모든 순간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는 2030들이다. 이명렬 바텐더는 “단골 손님들이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일이 많다”고 아쉬워하면서도 “젊은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들이 좋다”고 했다. “대학생들 여름, 겨울 방학때는 말도 마. 내가 세시반에 나와서 청소 하고 있으면, 그때부터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니깐.”

그는 젊은 손님들이 오면 그들의 취향에 맞춰서 노래를 틀어준다. 버스커버스커의 노래를 틀 때도 있지만 주로 김광석, 김현식의 노래를 튼다. 이명렬 바텐더가 우렁찬 목소리로 선창을 하면 어느새 모든 손님들이 ‘떼창’을 하곤 한다.

33년간 하루도 안빼고 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운영 시간을 줄였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 일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떻게 술을 파는 곳을 10시에 닫느냐고, 더 늦게까지 운영해달라고도 하지만, 단골 손님들을 생각하면 일찍 열어야 하고, 내 건강을 생각하면 더 늦게까지 일할 수 없다. 젊은 친구들하고 오래 오래 보려면 내가 건강해야한다. 작더라도 내 가게에서 손님에게 정성스런 칵테일을 만들어줄 수 있고, 그들과 함께 늙어갈 수 있는 것,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는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아주는 것, 이 모든 것에 감사할 뿐이다.”

다희의 벽에는 오래된 영화 포스터, 사진, 손님의 편지 등이 빼곡하게 붙어있다. 단골 손님(김상기씨)이 30주년 되는 날(2016.5.20)에 보내온 글이 눈에 띄었다. “다희라는 말보다 이 세상에서 더 간절한 말은 없습니다.”

한겨레
다희의 기본 안주인 땅콩, 멸치, 김.
한겨레
다희의 벽에는 오래된 영화 포스터, 사진, 손님의 편지 등이 빼곡하게 붙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