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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 23일 17시 12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4월 23일 17시 12분 KST

출산파업을 확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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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국어사전이 말하는 ‘혁명’의 첫 번째 의미는,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이다. 이에 따르자면 2017년 촛불에 ‘혁명’을 붙이는 것이 얼마나 과잉인지는, 박근혜 재판부가 보인 ‘이재용 대접’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의 등장 역시 체제 내 정치권력의 자리바꿈이어서, 근본적 변화는 기대하지 않는다. 정치권이 자본의 정책담당부서로 전락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다.

사회운동 활동가의 계기가 30대 초반인 1987년께 만난 예수인 사람으로서, 타국의 혁명들에 경도될 기회는 없었다. 십여 년의 진보정치 활동을 접고 아직 함께할 진보정당을 갖지 못한 사람으로서, 혁명의 기미를 두리번거리는 것은 떨칠 수 없는 습관이자 세상을 보는 관점이다. 그러다가 최근 혁명의 기미를 넘은 징후를 문득 감지하고, 긴가민가하여 의심과 상상을 거듭하며 설레고 있으니, 그것은 출산파업이다.

내가 ‘출산파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진보정당의 여성위원장을 맡은 2004년 무렵이었다. 계속 하락하던 출산율이 2004년에 1.154로 떨어졌고, 당시는 경고의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했다. 이후 미미한 등락을 거듭하던 출산율은, 2017년 1.05로 추락했다. 지난 10년간 쏟아부은 126조원의 저출산 대책 예산에도 말이다. 임계점을 넘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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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이제 명실상부한 출산파업 현상은 경고의 대상인 부정적 상황이 아니라, 혁명의 징후를 가늠하는 희망적 상황이다. 자본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도긴개긴 해봤자 어차피 노예일 수밖에 없는 ‘근로자이자 소비자’를 더 만들어주지 않겠다는, 만들어줄 형편이 못 된다는 출산파업 현상은 만국 노동자들의 단결보다 자본에 근본적인 타격이며, 선동도 구호도 아닌 현상이어서 더 믿음직하다.

지금의 사회체제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래야 자신의 삶도 더 낫다고 기대하는 사람과 집단에게, 출산파업은 당연히 막중한 사회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래야 혹 자신의 삶에도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출산파업 현상은 체제 변혁이 불가항력이 된 희망적 상황일 수 있다. 모든 혁명과 파업은 위험과 불안과 두려움이 없을 수 없지만, 그것 아니고는 탈출구가 없는 설국열차의 뒤 칸 사람들에게 이 임계상황 이후는 기대해 볼 만하다. 그것이 해체든, 붕괴든, 리셋이든, 다른 시작이든.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에는 아이를 낳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이 이미 부지기수다. 가난한 가임기 사람들, 동성애자, 성전환자, 중증 장애인, ‘그런 가족’ 아닌 다른 삶에 집중하고자 하는 활동가와 예술가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미 체제 밖으로 밀려났거나 혹은 선택했다. 각별한 정체성만이 아니다.

‘이런 세상’에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는 판단을 넘어, 아이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말하는 합리적인 판단들도 이젠 흔하다. 이미 부모가 된 사람들 중에도,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이런 세상에 아이를 태어나게 한 것만으로도 죄지은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횡행하는 종말론적 저출산 담론은 저들의 협박이자 헛소문이다. 나눠 먹을 총량은 이미 충분하다. 나눠 먹는 사회로 뒤집어지지 않는 한, 낳은 사람이든 낳지 않은 사람이든 각자의 방식으로 출산파업을 확장하자. 주도권은 노예가 아닌 삶을 살고자 하는 시민에게 있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