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나는 ‘축복’ 받지 않았다. 나는 무신론자이고 신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

모태신앙이었던 가톨릭을 버렸다

Back view backlight portrait of a single woman watching a sunset on the city with a warm light in the background
Back view backlight portrait of a single woman watching a sunset on the city with a warm light in the background ⓒAntonioGuillem via Getty Images

육중한 나무 문을 당겨 여니 닳은 경첩이 삐걱거린다. 벽이 돌로 된 휑뎅그렁한 방이 나온다. 커다란 거미를 닮은, 연철로 된 통나무 거치대가 있는 벽난로가 나를 돌아본다. 그 주위의 돌은 검은 재로 더럽혀져 있다.

실내는 어둡다. 11월치곤 비교적 밝은 날이지만, 작은 육각형 창문 두 개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미미하다. 문틀마다 성배가 놓여있다. 벽에서 튀어나와 있는 돌들에는 초를 켰던 흔적이 있다.

이 예배당은 어딘가 드루이드교(고대 켈트족 종교)의 느낌이 있지만, 내가 여러 해 전 버린 기성 종교의 교회와도 많이 닮아있다.

나는 감사를 드리러 왔지만, 이 예배당은 내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촛불을 켜길 요구하고, 그건 내겐 더 이상 진짜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종교의 밖에서 감사를 드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친구, 가족, 내 커피를 만들어주는 낯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필멸의 인간들에게 맡겨질 수 없는 선량함에도 감사한다. 이 선량함은 우리 인간들보다 더욱 큰 존재라고 느낀다. 물론 나는 내 행복에 기여한 일을 내 스스로 했지만, 전부 내가 이룬 거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누구의 덕일까? 우주? 나를 둘러싼 에너지? 지구?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신이 아니라는 건 내겐 명백하다.

나는 “고맙습니다.”(thank you)라고 말하려고 예배당에 왔지만, “됐습니다.”(No, thank you)라고 말하고, 문을 닫고 언덕 기슭에 세워진 석조 건물에 등을 돌린다.

나는 1년에 몇 번씩 여기로 주말에 휴식 여행을 온다. 24만 제곱미터가 넘는 이 지역에서, 이 예배당은 여러 종교적 표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 마리아나 요셉 상이 덤불 아래에서 튀어나와 있고, 벤치 옆에 조용히 앉아있는 불상들도 있다. 잔디밭에서 자라난 듯 보이는 십자가들도, 다른 신앙과 사상의 상징들도 있다. 온갖 형태로 신성함을 기리는 곳이다.

나는 크리스천 상징이나 다른 신념체계의 상징 중 딱히 선호하는 것은 없다. 나는 우월한 존재를 믿지 않는데, 그래서 어머니는 많이 실망했다.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고 자신의 아이들도 그렇게 키우려 했다. 우리 가톨릭 커뮤니티는 내 어린 시절의 의미있는 한 부분이었다. 나는 그 기억을 늘 감사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나? 그 대상은 없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신에게 감사했다. 땅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와 우리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게 내가 매일 저녁 하던 기도의 일부였다. 다른 부분은 부탁이었다. 더 지켜주세요, 더 사랑해주세요, 더 많은 참을성을 주세요. “신이시여, 부디 제가 …...를 하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부탁한 것을 받지 못하면 나는 내 잘못이라고 느꼈다. 내가 신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나는 원하는 것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미국에서 신과 감사함은 얽혀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고마움을 느낄 때 ‘축복’(blessed)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신이 축복을 내렸고, 어떤 신성한 이유로 어여삐 여기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들은 신을 섬긴다. 감사할 줄을 모르면 지옥에 가도 마땅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나는 ‘축복’이라는 말을 이젠 쓰지 않는다.

그 대신 ‘운이 좋았다’(lucky)고 말한다. 나는 운이란 걸 믿지는 않는다. 재수가 좋았던 걸 내멋대로 해석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내 삶은 여러 상황들이 겹쳐져 일어난 결과일 뿐이다. 이런 상황 중 하나라도 어떻게든 달라졌다면 내 삶도 바뀌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각을 선호한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고통을 겪을지 선택하는 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면 그건 삶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그런 상황들의 결과로 고통을 겪을지 겪지 않을지가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나는 선한 사람들이 선함의 보상을 받는다고도 믿지 않는다. 팝스타들이 남들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해서 상을 받는다고 믿지 않는다. 신의 선택을 받은 미식축구 선수들이 터치다운을 더 많이 기록한다고도 믿지 않는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내가 무신론자라고 결론내린 날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세상의 불평등을 점점 더 많이 경험하면서, 과학을 배워가면서, 고통을 목격해가면서 천천히 일어난 일이었다. 내 부모님은 언젠가 나와 천국에서 만나지 못할 거라며 슬퍼하지만, 내가 앞으로 한동안 갈 곳은 다 지상에 있다. 내 몸이 이 지구를 키우고 내 에너지가 생명을 줄 수 있는 곳들이다.

우리는 우리를 가장 위안해주는 걸 믿는다. 내 부모님의 경우 영원함이 위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보다 확실한 끝이 있는 게 좋다. 내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의 양이 정해져 있다는 게 내가 여기서 보내는 시간을 더 의미있게 만들어준다. 신을 포기한 이래, 누군가의 지침에 따라 사는 것보다 내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이 더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필자가 방문했던 예배당
필자가 방문했던 예배당 ⓒCOURTESY OF JENNIFER FURNER

30대인 지금,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내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종종 생각해 본다. 1년에 몇 번씩 이 아름다운 곳에 찾아와 머리를 비우고 글을 쓰고,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나는 운이 좋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 내가 이제까지 배운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 혹은 무엇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나?

대초원을 하이킹하며 나는 감사를 드리기 위해 만들어진, 곧 다가올 추수감사절을 생각한다. 내 가족, 즉 내 오빠, 우리의 배우자들, 우리의 아이들, 내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가톨릭식으로 자란 우리들은 서로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이며 어머니가 “신이시여, 우리와 당신의 선물을 축복하소서”라고 말하거나 오빠가 우리 모두 신에게 얼마나 축복받았는지를 즉흥적으로 읊기 전까지는 저녁식사에 손을 댈 수 없었다. 나는 손을 잡긴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지는 않고 그냥 기다린다. 가족들이 감사해 하는 건 좋다고 생각하고, 가족들이 감사해 하는 것을 나 역시 고맙게 여긴다. 하지만 식탁에 앉아서 눈을 뜨고 입을 닫고 있는 나는 가족들의 눈에 감사할 줄을 모르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리고 곧 크리스마스가 찾아온다. 어떤 사람들은 굳이 애를 써서 “예수가 이 축일의 이유다”라고 일깨워주려 하며, 보다 포용적인 ‘연말연시를 즐겁게 보내라’(Happy Holidays)가 아닌 ‘메리 크리스마스’가 더 적절한 인사라고 우긴다. 모든 감사와 축하가 기독교의 신에게 바쳐져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다른 신앙을 지닌 사람들 뿐 아니라 나와 같은 무신론자들도 배제한다. 그저 눈, 나무, 반짝이는 불빛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죄책감을 안긴다. 서로에게 행복한 연말연시를 빌어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말로 우리의 시각을 묵살해 버린다. 감사는 언제나 신에게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을 떠난 뒤의 내 경험은 그 반대임을 입증한다.

신이 없어져도 감사함은 남는다.

신이 없어지자 나는 내 행동이 타인과 내 주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더 잘 인식하게 되었다. 신이 우리 지구를 구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쓰레기를 버릴 때 보다 신경쓰고 고기는 덜 먹는다. 신이 인류를 구해줄 거라고 바라지 않기 때문에 증오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보다 많은 참을성과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려 한다. 비극이 닥치면 나는 마음과 기도를 보내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포옹과 식사와 도움을 준다.

가끔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거대한 기독교 커뮤니티의 일원이 아니라는 게 슬플 때도 있다. 내가 다수가 아닌 소수에 속해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럴 때면 나는 내가 더 큰 커뮤니티의 일원이라는 걸 떠올린다. 인간의 커뮤니티, 지구에 거주하는 생명체의 커뮤니티다. 내 삶에서 신을 떼어내고 나자 다른 모든 것들이 들어올 공간이 정말 많아졌다.

계곡으로 이어지는 자갈길로 돌아선다. 계곡에서 높이 자란 풀에는 미로가 만들어져 있다. 그 미로 속을 거닐기에 완벽한 가을 오후다.

마른 풀이 바람에 흔들리며 걸어가는 나의 손과 뺨을 스친다. 마른 낙엽을 신발 위에 올린 다음 날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볼이 빨개지는 걸 느낀다. 그래서 멈춰서서 태양 쪽을 향한다. 얼굴을 들고 눈을 감아 햇볕이 차가워진 내 뺨을 녹이게 한다. 그리고는 입에 미소를 띄운 채 계속 걸어간다.

미로 끝의 탁 트인 곳에 왔을 때, 돌 위에 노끈으로 묶은 마른 꽃다발이 놓여있는 게 보였다. 제단이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으고 이렇게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고 즐길 수 있었던 이 멋진 날에 대한 감사를 드려야 할 것만 같다.

무릎을 꿇지만 양손을 모으지 않고 땅에 댄다. 이마도 댄다. 나는 땅을 끌어안고, 하늘 위로 기도를 보내는 대신 풀 속에 속삭인다.

 

* HuffPost US의 I’m Not ‘Blessed.’ I’m An Atheist And I Don’t Need God To Give Thanks Or Show Gratitude를 번역한 것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기독교 #가톨릭 #추수감사절 #무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