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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이 줄리언 어산지를 도울 수 있다

ⓒhuffpost

서구 세력이 작은 나라 에콰도르로 하여금 줄리언 어산지를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도록 배후에서 엄청난 강도로 압박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어산지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외부인이 그를 방문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런던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6년째 갇혀 지내고 있는 어산지는 사회적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셈이다.

미국 대선 기간에도 그에게 지금과 같은 조처가 취해진 적이 있다. 당시에는 어산지가 위키리크스 문서를 공개해 미국 대선에 영향력을 미치려 했다는 구실이라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명분조차 없다. 최근 어산지가 국제 정세에 “간섭”하려 한 일이라고는 카탈루냐 분리독립 문제와 스크리팔 부녀 음독 사건에 대해 인터넷으로 의견을 표명한 것 정도밖에 없다. 그런데 왜 어산지에게 이렇게까지 혹독한 조처가 취해지는 것일까? 여론은 왜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두번째 질문에, 사람들이 이제 어산지에 대해 지겨워한다고 답하는 것은 무언가 불충분하게 들린다. 그보다는 세심하게 준비된 인신공격 전략이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 전략은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저급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어산지가 씻기를 싫어하고 옷을 갈아입지 않아 몸에서 역한 냄새를 풍기는 바람에 에콰도르 대사관이 그를 쫓아내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올해 초부터 돌기 시작한 것이다.

어산지를 공격하는 첫번째 단계에서는, 그의 옛 친구들과 동료들이 위키리크스가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어산지의 정치적 편향 때문에 결국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어산지에 대한 더 직접적인 중상모략이 행해졌다. 그가 편집증적이고, 오만하며, 권력에 사로잡혀 있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의 체취와 위생 상태까지 들먹이는 노골적인 수준까지 내려왔다.

어산지 비판자들은 어산지가 편집증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첩보기관으로부터 끊임없이 감시를 받고, 머리 위부터 발밑까지 도청장치가 되어 있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편집증적이 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그들은 또 어산지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 미국 법무부 장관은 어산지를 체포하는 것이 미국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산지는 자신이 적어도 누군가에게 “거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가 마치 정보기관의 우두머리처럼 행동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위키리크스 자체가 정보기관이다. 세상의 배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다른 정보기관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라, 어산지가 처벌을 피하기 위해 망명했다는 비난도 존재한다. 하지만 스웨덴 검찰이 이미 어산지에 대한 수사를 종결한 마당에 아직도 그를 체포하려 드는 것이 올바른 사법절차일까?

이제 더 큰 질문을 던질 차례다. 왜 하필 지금일까?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라는 이름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어산지는 거대 사기업과 정부기관 간의 공모를 폭로하는 작업에 몰두해왔는데,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야말로 바로 그 어산지의 노력, 그리고 그가 맞서 싸우고자 하는 것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개입했는지 여부는 그동안 매우 큰 쟁점이었다. 그런데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사실 러시아 해커들이 아니라, 정치세력과 결탁한 서구 데이터분석 업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물론 이것이 러시아가 대선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미국이 (“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 개입해온 것과 같은 방식으로, 러시아 역시 미국 대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을 것이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사건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무서운 적이 크렘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어산지가 줄곧 주장해온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서운 적은 정확히 어디에 있는 것일까? 통제와 착취가 어느 정도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기업과 정치조직 간의 관계뿐 아니라,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정보를 수집·처리하는 기업과 국가안보기관 간의 상호관통하는 관계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중국 정부의 통제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충격적인 것은 자신이 온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믿는 우리의 모습이다.(중국인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규제받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규제와 최근 유전자공학의 발전이 결합하게 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통제가 생겨난다. 이에 비하면 20세기의 “전체주의”는 원시적이고 투박한 수준의 통제기구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인지-군사 복합체(cognitive-military complex)가 이룬 가장 큰 성취는 직접적이고 눈에 보이는 억압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각 개인은 자신을 자유롭고 자율적인 행위자로 경험할 때 더 쉽게 통제된다. 위키리크스의 교훈이 여기에 있다. 자유의 부재가 마치 자유의 현현인 것처럼 오인되어 경험될 때 위험성은 가장 커진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쉽게 널리 알릴 수 있고, 자신만의 가상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면 누구라도 자신이 가장 자유롭다고 느끼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디지털 네트워크를 민간자본과 국가권력의 통제로부터 끄집어내 공적 논의의 장에 완전히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재창조하는 작업이 긴급한 이유이다. 어산지가 저서 <구글이 위키리크스를 만났을 때>에서 주장한 것처럼,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규제되고, 규제가 어떻게 자유로 경험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기업과 국가 비밀기관 사이의 은밀한 관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모든 주류 매체가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사건을 다루는 지금 시점에 어산지가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이유를 이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을 쥔 이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 사건을 일부 사기업과 정치조직이 개인정보를 “오용”한 특수한 사건으로 축소하려 한다. 그럼 국가와 “그림자 정부”의 보이지 않는 장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스캔들”을 집중적으로 보도해온 <가디언>이 최근 어산지를 과대망상증 환자이자 도망범이라고 비난하고 나선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 입장에서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는 마음껏 다뤄도 상관없는 대상이다. 어산지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 그러니까 이 “스캔들”을 조사하고 있는 국가 장치 자체가 사실은 문제의 일부라는 점만 쏙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말이다.

어산지는 자신이 민중의, 민중을 위한 스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권력을 쥔 이들을 위해 민중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위해 권력을 쥔 이들을 감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중만이 지금 그를 도울 수 있다. 우리가 압력과 동원을 행사해야만 그가 겪고 있는 곤경을 줄일 수 있다.

우리는 옛소련 첩보기관이 수십년을 들여 반역자를 처벌하면서도, 그들이 적의 포로가 되었을 때는 그들을 구해내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읽는다. 어산지 뒤에는 국가가 없다. 대신 우리 공중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도 최소한 소련이 했던 것처럼 해야만 한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우리는 어산지를 위해 싸워야 한다.

번역 김박수연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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