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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29일 11시 23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3월 29일 17시 22분 KST

동물은 효리를 왜 잘 따를까? 효리를 보면 안다

huffpost

효리네 민박을 좋아한다.

지금 하는 모든 프로그램 중 가장 좋아한다. 이효리를 꽤 오래 좋아한 것도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이유 중 하나지만, 무엇보다 나는 그들의 방식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그들의 방식은 차를 마신다거나, 고요한 부유함을 즐기거나, 장난기 가득한 그들의 사랑놀이가 아니다.

나는 그들이 동물을 대하는 방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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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동물이 선택한 자리를 존중해 준다.

누가 어디에 있든, 그대로 둔다. 자연스럽게 지나간다. 자연스럽게 눕는다. 호들갑 떨거나 가로막거나 굳이 손으로 잡아서 귀여워하지 않는다. 그대로 둘 뿐이다. 심지어는 밥을 먹을 때조차 테이블 위의 고양이를 억지로 들어서 옮기지 않는다. 그들은 동물이 있는 그 위치를 존중한다.

그 덕에 이효리의 오래된 고양이 미미는, 사람들의 식사를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장모 고양이의 집사로서, ‘저러면 털이 다 밥에 들어가겠는걸’ 싶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미미가 사람에게 말을 걸 것만 같다. ″그거 맛있냐? 냄새는 별론데?”

JTBC
효리네 민박집의 또 다른 주인들. 왼쪽부터 미미, 순심이, 고실이.

유기견으로 만난 강아지 순심이는, 그 덕에 이효리의 발치를 지킨다. 이효리가 걸어가면 함께 걸어가고, 이효리가 누우면 엉덩이를 대고 자리를 잡는다. 이효리가 일어나면 함께 깨서 움직이고, 이효리가 앉으면 함께 앉아서 같은 곳을 바라본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가장 예민한 개라는 얘기를 듣던 모카는, 그 덕에 사람들의 손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순심이와 함께 이효리가 일어나면 움직이고, 깨어나고, 걷는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누워 있는다.

이효리가 없이는 산책하러 가지 않는 두 강아지를, 이효리는 억지로 잡아서 쓰다듬거나, 다른 곳에 못 가게 하거나, 못 오게 하거나, 억지로 보내거나, 옮기지 않는다.

그저 둘 뿐이다. 모카가 하고 싶은 대로. 순심이가 하고 싶은 대로. 귀찮아하거나 고까워하지도, 행복에 겨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함께 있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말하는 것조차 생소할 정도로 익숙한 자연스러움이다.

이들의 ‘그대로 둠‘이 가장 눈에 띄는 순간은, 집에 잘 들어오거나 사람들 사이에 잘 섞이지 않는 개 ‘고실이’가 등장할 때다.

고실이는 그들이 거둔 개가 아니다. 그 많다는 제주의 유기견 중 한마리다.

″밖을 돌아다니던 강아진데, 그냥 어느 순간부터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아~”

이효리가 고실이를 설명한 말이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산다는 개를, 여상스레 말하는 이효리와, 어느새 이효리의 집에서 다른 강아지들과 뛰놀며 이효리를 지켜보는 개.

이효리와 이상순이 고실이를 억지로 잡으려 할 때는 딱 두 번, 더운 여름 털을 밀어주려고 했을 때와 폭설이 오고 한파가 밀어닥쳐 집 밖이 모두 얼어붙었던 날이었다.

다른 개들이 모두 들어와 거실에서 따뜻한 불을 쬐고 있을 때, 고실이는 눈이 몸에 쌓이는 것을 감수하며 웅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이효리가 들어오라며 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하지만 고실이는 끝내 들어오지 않다가 모두가 잠든 밤에 들어와 쿠션 위에 언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이 들었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 있다.

털 많이 빠지는 긴 털 고양이의 자리는 식탁이다. 누군가에게 버려졌던 발발이는 이효리의 머리맡에서 잔다. 사람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떨던 벌거숭이 작은 개는 이효리의 발치를 떠나지 않는다. 거둔 적 없는, 거둬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개는 있고 싶은 곳에 있다.

동물이 선택한 그 자리에 있게 두는 것. 그것이 그들을 존중하는 법이라는 것을 나는 그들을 통해 배웠다. 예뻐하거나 껴안거나 옆으로 좀 비켜줘야겠어 하며 억지로 동물의 엉덩이를 밀어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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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그런 존중의 기회가 있었으나 나는 잘 해내지 못했다. 나의 고양이 ‘심바‘가 옆에 누워있으면 나는 기어코 한번 손을 들어 털을 헤집어 놓고, 쓰다듬고, 발바닥을 들어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고 세게 껴안아서 ‘꺅’소리를 들은 후에나 뽀뽀를 마구 퍼부은 다음 놔줬다.

심바는 내가 억지로 껴안고 뽀뽀하고 만지지 않을 때면 늘 옆에 다가와서 조용히 누웠다. 내가 잠이 들 무렵이면 머리맡에 몸을 말고 눕거나, 등이나 엉덩이를 내 팔 안쪽에 댄 채 털을 골랐다. 그럴 때면 나는 조용히 숨을 참으며 그 시간을 음미했다. 억지로 곁에 당기지 않아도 살짝 맞대어져 있는 그 온기가 좋아 조용히 숨을 내쉬며 공기 중에 퍼져있는 부드럽고 고소한 냄새를 맡곤 했다.

때로 내가 누워서 아이패드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을 때 다가와 머리를 맞대고 눕기도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나는 큭큭 웃으며 ”뭐 하는 거야...” 조용히 읊조리며 사진을 찍거나 괜스레 모른 척하곤 했다. 다큐멘터리에 집중하는 척하며 정수리에 느껴지는 따뜻하고 보송한 존재를 더듬는 시간은, 단언컨대 내 인생의 달콤한 조각이었다. 분명 밤이었는데도 햇빛냄새가 나는 듯한 기억.

나의 고양이는 이제 ‘가족의 고양이’가 되었다. 한창 과외를 주말 없이 뛰느라 밤마다 홀로 두는 날이 늘었던 때, 심바는 내가 돌아오자마자 다리를 절었다. 놀라서 황급히 울며불며 하네스를 입히고 껴안고 달려 병원에 가자마자 다리 따위 절었던 적 없다는 듯 멀쩡히 돌아다녔던 심바.

고양이도 분리불안이 오는 것을 왜 그때야 알았는지. 내 무지를 탓할 수밖에 없던 그때. 홀로 오래 둘 수 없어 본가에 심바를 데려갔던 명절 연휴, ‘털 짐승은 기르는 게 아니고, 고양이는 더더욱 집안에서 기르는 게 아니라’고 말하던 아빠가 ”고양이는 두고 너만 가라.”는 말과 함께 날 내쫓았다.

분리불안이 걱정되어 바쁜 시즌이 지나고 나면 데려와야지 하며 돌아왔던 그 날 이후, 심바는 우리 가족이 되었다.

서울로 이사 오기 전까지, 심바와 함께 하던 오피스텔에서 나는 늘 내 고양이의 자리를 더듬었다. 너무 얼굴 옆 가까이 다가와서 자다가 재채기를 해도 괜찮던 그 날의 온기들을 더듬었다. 밤늦게까지 과외를 하고 들어와 문을 열면 소리를 지르며 도도도 달려 나오던 발자국이 찍힌 자리를 더듬었다.

이제 심바의 자리는 우리 집 쇼파 옆에 있는 나무 의자 위의 방석이다. 낮에는 볕이 잘 드는 통유리 앞에 앉아 길고양이들이 모여 밥을 먹는 것을 본다. 가족들이 밥을 먹을 때면 엄마가 해외를 다니며 모아온 기념품들이 들어있는 나무 장식장 앞에서 우리를 바라본다. 가족들이 티비를 볼 때면 아빠의 접은 다리 밑에서 이불 해먹을 즐긴다. 자는 곳은 할머니의 가슴팍 위다.

할머니는 이놈 새끼 무거워 죽겠다면서도, 누울 때면 꼭 심바를 쳐다보신다.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심바는 냉큼 달려와 할머니의 가슴에 누워 골골대며 눈을 감는다. 그러면 할머니는 고개만 까딱 들어 나를 보며 씨익 웃으며 잘난 체를 한다.

″얘 좀 봐라. 꼭 이러고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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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살인지 모르는 나의 심바. 알 수 없는 곳에서 태어나 모르는 골목을 헤매던 나의 고양이. 울음소리가 귀엽고 강아지처럼 짖고 꼬리를 흔드는 아이. 그가 어떤 자리를 거쳐 지금의 자리에 왔는지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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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기 때문에 그저 심바가 자신이 선택한 그곳에 오래도록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빠의 다리 밑, 쇼파 옆에 놓인 의자의 방석 위, 햇빛이 쏟아지는 통유리의 앞, 나무 장식장의 앞.

그리고 할머니의 가슴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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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만큼, 오래도록 있기를 바란다.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